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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죽일 남주를 길들여버렸다-23화 (23/186)

23화

오찬은 그렇게 어영부영 파했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대화를 하기 위해 자리를 물렸고, 엘레네도 방으로 돌아갔다.

여기서 아버지가 제대로 된 사업가였다면 이대로 그루안 상단주와 예리엘 만물 상단주를 돌려보내면 안 된다.

글라델리스 후작가는 굉장히 신사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다. 이런 가문에서 하녀가 하극상을 저질러 모시는 아가씨의 물건에 손을 대는 것으로도 모자라, 후작과 불륜이라니!?

이 이야기가 밖으로 새어 나가서 좋을 건 하나도 없었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두 상단주에게 축객령을 내리고 어머니의 뒤꽁무니를 쫓아갔다.

뭐,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친정 쪽에서 상당한 도움을 받고 있었다. 그러니 어머니를 잘 달래 놔야겠지.

나는 아버지에게 축객령을 받은 셀트론과 자신을 시엘이라고 소개한 예리엘 만물 상단주를 데리고 방으로 향했다.

내 방의 위치를 본 시엘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1층에서 생활을 하시는군요.”

시엘의 말에 셀트론은 뭐가 문제가 되느냐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루안 가문은 분명 대단한 상단을 가졌지만, 명문가냐고 물으면 아니다. 거상이라 불렸던 것도 과거의 일이고, 또 상단으로만 유명했다는 말은 결국 ‘상인’에 그쳤다는 거다.

귀족이 아니라는 말이지.

해서, 셀트론은 이상한 걸 몰랐을 테지만, 시엘은 아닌 모양이었다.

나는 조금 창피해졌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

“네, 맞아요. 저는 1층에서 생활하고 있어요. 3층에서 생활하는 다른 가족들과 달리요.”

내 말에 시엘의 표정이 일렁거렸다. 그도 그럴 게 우리 후작저는 총 3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1층은 집사나 하녀장 등의 주 하인들이 사용하는 방과 연회장, 식당, 홀 등의 로비가 있다.

2층은 손님이 묵을 수 있는 게스트 룸이나 응접실, 가문의 역사를 전시해 둔 공간 따위로 구성되어 있고, 아버지와 어머니, 엘레네의 방은 3층에 있다. 아버지의 서재도 3층에 있고.

이건 비단 우리 후작저뿐만 아니라, 귀족들의 방은 보통 최상층에 있었다.

요컨대 장녀인 내 방이 1층에 있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는 소리다. 그제야 셀트론도 이상한 점을 눈치를 챈 모양인지 입을 꾹 다물었다.

방으로 들어온 시엘의 표정은 더욱 심각해졌다.

“드레스룸이 없네요?”

“네, 맞아요.”

보통 귀족의 침실은 욕실, 드레스룸과 이어져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내 방에는 드레스룸 대신 침대 옆에 있는 옷장 하나가 전부다. 엘레네에게 물려받은 드레스와 몇 켤레 되지 않는 구두도 모두 그곳에 있었다.

내 방의 위치와 구조는 내가 처한 상황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수잔이 침대 바로 앞에 있는 낡은 소파로 안내하자 시엘은 기어코 헛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하.”

결국 그녀가 참다못해 물었다.

“대체 어떤 생활을 하고 계신 거죠?”

시엘은 자리에 앉지도 않고 말했다.

“글라델리스 후작이 보여지는 이미지와 다른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어떻게, 이런……!”

과연 예리엘 만물 상단의 주인답다.

모두들 아버지를 신임해 의심치 않는데, 홀로 아버지의 본질을 꿰뚫고 있었다니! 하지만 나는 순순히 감동받은 티를 내지 않았다.

비록 그녀 덕분에 베티를 치울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녀가 나의 편이라는 장담은 못 하니까.

나는 적당히 웃으며 다시금 자리를 권했다. 시엘은 여전히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소파에 앉았다.

수잔이 차를 가져왔고, 나는 먼저 잔을 들며 말했다.

“오늘 이렇게, 어려운 걸음을 해 주셔서 고마워요. 사실 이렇게 상단주께서 직접 찾아와 주실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어요.”

“그런 말씀 마세요. 사실 그렇지 않아도 글라델리스 후작가에 한 번쯤은 오고 싶었어요.”

“의사를 내비치셨으면 후작님께서 초대를 해 주셨을 텐데요.”

내 말에 시엘이 연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런 꾸며 낸 호의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요. 바라는 게 뚜렷한 욕망 어린 시선도 달가워하지 않고요.”

신랄한 말이었다.

면전에서 아버지가 욕보였지만, 나는 이에 대한 반박조차 하지 않았다. 이게 내가 내 처지에 대해 그녀에게 알려 줄 수 있는 최대한의 힌트였다.

이 정도면 나에 대한 정보를 찾으려 할 테고, 내가 사생아라는 걸 알아내겠지.

내가 대답하지 않고 차를 한 모금 마시자, 시엘이 알아서 화제를 돌렸다.

“별로 놀라지 않으시네요?”

“네?”

“제가 마법사라는 거, 혹시 알고 계셨나요?”

시엘의 검은 눈동자가 기민하게 나를 살피는 게 느껴졌다. 그녀는 의기양양한 얼굴로 나를 떠보고 있었다.

시엘의 말대로 나는 그녀가 마법사라는 걸 알고 있었다.

원작에서 중요하게 다뤄지진 않았지만 한두 번 언급이 됐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황성에서 직접 관리하는 세이렌 마법약을 쉽게 구할 수 있는 것도, 애당초 ‘예리엘 만물 상단’이라는 걸 운영할 수 있는 것도. 모두 다 그녀가 마법사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그냥 마법사도 아닌, 마법사 탑의 주인.

어쩔까.

나는 잠시 고민했다.

이대로 그녀의 정체를 전부 알고 있다고 말해 버려? 그래서 시엘을 나의 편으로 확 만들어?

솔깃한 생각이었지만 이내 속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이건 별로 바람직한 방법이 아니야.

시엘은 마탑주인데다가 대상단주다. 그녀는 허투루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게 아니다. 고작 7살밖에 되지 않은 내가 그녀의 정체를 다 알고 있다고 말하면 흥미보다 적개심이 먼저 들 터.

내가 놀랐다고 말하려던 때였다.

“그러고 보니, 후작 영애에 대한 이야기는 참 많이 들었어요.”

시엘이 검게 칠한 손톱으로 제 턱을 톡톡 두드리며 입을 열었다. 그녀는 잠시 셀트론을 보다가 웃는 입술로 말했다.

“그루안 상단주도 모르던 그루안 가문의 비밀을 알고 계셨다면서요.”

드루이드에 대한 이야기인 모양이다. 나는 부정하지 않고 의젓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제가 도움이 될 수 있어서 기뻤죠.”

“어떻게 아셨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그건 저희 상단에서도 모르던 정보거든요.”

일순간 그녀의 눈초리가 매서워지는 게 보였다.

‘정말 네가 알아낸 건 맞니?’ 하는 의심이 담겨 있었다.

아주 짧은 찰나였지만, 내 눈에는 똑똑히 보였다.

회귀 후 갑작스럽게 생긴 이 독심술 능력은 이렇게 작은 빈틈마저도 잡아낸다. 그렇기에 나는 여유롭게 대답할 수 있었다.

“그루안 상단주가 말씀드리지 않았나요? 책을 통해 비교해서 알아낸 정보라고요.”

“책이라고요.”

시엘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그걸 묻는 게 아닌 걸, 알 텐데?’ 하는 생각이 고스란히 읽혔다.

나는 속으로 웃음을 삼키며 말했다.

“제 취미가 독서여서요. 각 가문의 역사나 전설에 대해 탐독하다가 알게 됐어요. 혹시나 싶어서 비교를 해 봤고, 역시나였을 뿐이에요.”

“그러니까 우연의 일치라고요?”

“그렇죠. 그게 아니라면 제가 어떻게 그루안 가문의 전설과 진실을 알아낼 수 있었겠어요?”

천연덕스러운 내 말에 시엘의 표정은 더욱더 미묘해졌다. 그녀가 뭐라고 말하려던 때였다.

“오늘 직접 찾아오셔서 도와주신 건 감사하지만, 저는 상단주님이 원하는 답을 해 드릴 의무가 없어요.”

나는 시엘의 검은 눈동자를 똑바로 보며 싱긋 웃었다.

“저희는 아직 그 어떤 제휴도 맺지 않았잖아요?”

그러니 만약 나를 통해서 우리 후작가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그만한 명분을 세우라는 말이었다. 이에 시엘의 얼굴에 흥미로움이 스쳤다. 호기로운 내 말에 관심이 생긴 모양이다.

그녀가 말했다.

“제휴라, 글라델리스 상단과 말인가요?”

하지만 과연 상대는 마탑주면서도 대상단주. 호락호락하게 내 뜻에 따라 줄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손바닥에 땀이 고이고 살짝 피로해질 정도의 기 싸움이 계속되고 있다. 솔직히 나는 조금 재밌기도 했다. 왜냐면 원작을 통해 상대의 전반적인 배경을 알고 있고, 표정을 전부 읽어 내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이런 소모전을 계속할 생각은 없었다.

해야 할 일도 많았고.

나는 여전히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말했다.

“아뇨, 저하고요.”

“네?”

“글라델리스 후작가의 상단이 아니고 저, 라티아 글라델리스하고요.”

시엘이 조금 아리송한 눈빛을 지었다.

“하지만 아가씨는 이미 셀트론 상단에 속해 있지 않나요?”

내가 티아나 아메시스트라는 걸 알고 있는 모양이다.

“네. 하지만 제 원래 이름은 라티아인걸요.”

“그 말은…….”

시엘의 얼굴에 깨달음의 빛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가 붉은 입술을 매혹적으로 끌어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알겠어요. 그러도록 해요. 라티아 글라델리스 후작 영애.”

이로써 시엘은 깨달았을 것이다.

시엘이 글라델리스 후작 가문의 진상을 알고 싶어 한다면 나는 그걸 도와줄 최적의 조력자다. 그리고 지금 나는 그녀가 나를 이용할 방법을 알려 준 셈이다.

나와 제휴를 맺기만 한다면 시엘은 후작저를 낱낱이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아무래도 그녀는 우리 글라델리스 상단이 저지른 잘못을 캐내고 싶은 것 같았다. 소상단을 잡아먹는, 도의적이지 않은 행동 같은 거 말이다.

역시 대상단주. 기회가 있으면 허투루 넘기지 않는구나.

시엘이 말했다.

“조만간 제휴 계약서를 가져오도록 하겠어요.”

“그럼 감사하죠.”

“참, 저희가 첫 계약을 하면 신뢰를 얻기 위해 무료 이용권을 준다는 것도 아시죠?”

“아, 네.”

나는 셀트론을 한 번 보고는 시엘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두세요.”

시엘이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일전에 한 번 셀트론을 통해 삐로리의 정체가 무엇인지, 예리엘 만물 상단에 의뢰해 보자고 생각했었다.

큰돈을 지출할 각오를 했는데, 그럴 필요 있나.

“괜찮아요. 이미 생각해 둔 게 있으니까요.”

내가 손을 뻗자 삐로리가 포르르 날아왔다. 나는 삐로리를 시엘에게 보여 주며 말했다.

“이 새의 정체를 알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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