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예리엘 만물 상단주는 워낙 신출귀몰한 인물이었다. 그래서 상단주의 정체는 아무도 모른다고 했다. 항간에서는 황실 측의 사람이라는 말도 있고, 아예 인간이 아니라는 소문도 있었다.
‘저, 저 여인이 만물 상단주라고……?’
그런 대단한 인물이 지금, 글라델리스 후작가에 나타났다.
* * *
솔직히 내 계획은 보다 단순했다.
셀트론, 아니. 누구든 좋으니 외부의 사람 앞에서 베티의 도둑질을 고발하는 거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니, 아버지가 내 편을 들어 베티를 쳐 낼 거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베티는 어머니의 수족 하녀기도 했고, 또 오랫동안 후작가에 충성을 다하기도 했으니 말이다.
내가 아무리 아버지의 신뢰를 얻었다 하더라도 어려울 것 같았다. 더 확실한 무언가가, 발뺌할 수 없는 증거가 필요했다. 그런데 이때, 뜻밖의 곳에서 힌트를 얻었다.
카르시안이 내게 삐로리의 목에 달려 있는 게 ‘동물어 번역기’라는 걸 알려 준 것이다.
‘너 나한테 빚진 거야.’
그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던 이유는 바로 이것이었다.
카르시안은 가난하기는 해도 백작가의 영식이다. 사생아로 마냥 갇혀 있는 나보다 여기저기서 가십이나 소문을 더욱 많이 들었단 말이다. 그리고 카르시안의 도움을 받아 삐로리와 처음으로 ‘대화’를 나눴을 때.
삐로리는 내게 간과하고 있던 사실을 알려 줬다.
[베티는 어떻게 네 방에서 찾은 마법약을 보고 곧장 네 아버지의 서재에 있는 약을 떠올렸을 것 같아?]
정말 생각지도 못했던 허점이었다.
이후 나는 셀트론에게 아버지가 다음으로 양식할 약초를 알려 주며 은밀히 부탁했다.
‘삐로리에게 선물해 준 번역기의 보증서를 받아 주실 수 있나요?’
삐로리의 목에 걸린 게 그냥 펜던트가 아니고 마도구라면 셀트론이 쉽게 구할 수는 없었을 터다. 그리고 나도 동물의 말을 번역해 주는 마도구라면 아주 잘 알고 있다.
이건 원작에서도 유용하게 쓰였던, 예리엘 만물 상단의 주력 상품이었으니까!
만약 아버지와 베티 사이에 있는 뭔가를 밝혀낼 수만 있다면, 그래서 어머니를 흔들 수만 있다면? 베티를 내쫓는 것은 일사천리였다!
하지만 내가 바란 것은 종이 한 장을 들고 올 예리엘 만물 상단의 상인이었는데, 웬걸. 보증서 수천 장과 함께 장본인이 나타났다.
예리엘 만물 상단주가 말했다.
“‘출처도 모르는 저런 쓰레기 잡것 같은 목줄’이라니.”
그녀는 상처받았다는 듯 눈썹을 늘어트렸다.
“언제부터 우리 예리엘 상단의 물건이 이런 취급을 받았담? 그것도 동종 업계의 사람에게.”
예리엘 만물 상단주는 아버지를 냉랭하게 쏘아봤다.
예리엘 만물 상단은 상당히 의심스럽고 의뭉스러운 구석이 있는 상단인 건 틀림없다. 하지만 감히 누가 넘볼 수도 없는 업계 최고의 상단인 것도 확실했다.
그러니 자부심이 뛰어날 수밖에.
우리 글라델리스 후작 상단이 얼마나 치사한 방법으로 소형 상단을 짓밟는지는 알고 있을 터였다. 같은 업계에 종사하는 이로서 도무지 용서할 수 없는 짓이라는 것도.
예리엘 만물 상단주가 달콤하게 말했다.
“상단 일에서 손을 떼시려나 봐요.”
“그게 무슨…….”
“그렇잖아요. 상단 일을 계속 할 건데, 예리엘 만물 상단에서 판매하는 주력 상품 하나 모르다니. 이래서 어떻게 사업을 하겠어요? 아, 본인의 사업이 아니던가?”
상단주의 눈꼬리가 부드럽게 휘었다. 그녀의 말에 아버지의 얼굴은 더욱더 붉게 달아올랐다. 면전에서 ‘하긴, 남의 것을 훔치기 급급한 네가 뭘 알겠니.’ 소리를 들은 건 처음일 터였다.
“전 모든 상단에서 취급하는 품목을 직, 접, 검, 수, 해서요. 제가 자신 있게 보장하겠어요.”
꿀꺽, 아버지가 마른침을 삼켰다.
“후작님께서 ‘출처도 모르는 저런 쓰레기 잡것 같은 목줄’이라고 평한 저 목줄은 예리엘 만물 상단주의 물건이 분명합니다. 그러니 저 새의 말도 사실이라는 거죠.”
그녀의 말과 함께 아버지는 물론이고 베티마저 아연실색했다. 두 사람 사이에 ‘어떤 일’이 있다는 게 공공연연해졌으니까!
아버지의 얼굴은 완전히 표백되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여보!”
동시에 어머니의 카랑카랑한 외침이 기다렸다는 듯이 장 내를 찢었다.
“이게 어찌 된 일인지, 제게 제대로 설명해 주세요!”
“부인…….”
아버지는 붕어처럼 뻐끔거렸고, 베티는 치맛자락을 꽉 쥔 채 덜덜 떨었다.
아니, 아니. 이 정도로는 부족해.
나는 베티를 더욱더, 다시는 고개를 들고 다닐 수 없을 정도로 철저히 쳐부술 생각이었다.
내가 시선을 보내자, 셀트론이 손을 들었다.
“잠시만요. 너무 섣부른 판단인 것 같습니다.”
셀트론은 내 이야기를 전부 들었으면서 아무것도 모른다는 양 아버지의 편을 들어줬다.
“서재에 들어간 거야, 잠깐 심부름을 시킨 걸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다가 본 걸 수도 있고요. 게다가 상대는 새입니다. 새의 말을 고스란히 믿기엔 조금…… 석연찮지 않나요?”
그는 아버지가 서재에 어떤 것을 숨기고 있고, 그렇기에 어머니조차 허락받지 못한 금지 구역이라는 걸 몰랐다.
어머니는 멍청하지 않다. 아무리 남편의 외도가 슬프다 하더라도 가문의 위상보다 중하진 않다. 손님 앞에서 외도를 들킨 걸로도 모자라, 후작가가 무너질 수도 있는 서재의 존재를 밝힐 리가 없다.
어머니는 분노로 덜덜 떨리는 손을 숨긴 채 애써 웃었다.
“그럼요. 그럴 수도 있죠.”
남편의 외도가 명백한 상황이다. 하지만 가문을 위해 홀로 감내하느라 하얗게 질린 어머니의 얼굴을 보자 묵은 체증이 다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그러니 하녀가 정말 라티아 아가씨의 물건에 손을 댔는지 함께 확인을 해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머나, 듣고 보니 그루안 상단주님의 말씀이 맞네요.”
예리엘 상단주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반박하기 전에 얼른 대답했다.
“만약 어린 아가씨가 뭔가를 잘못 알았더라면 애꿎은 하녀만 일자리를 잃게 되잖아요? 저희 물건은 확실하지만 새의 마음은 또 모르니까요.”
손님인 두 사람의 뜻이 이러한 이상, 아버지와 어머니는 두 사람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보는 눈이 많은 것은 둘째치고, 예리엘 만물 상단주는 돈의 흐름을 꽉 쥐고 있는 사람이다.
황실이니, 마탑이니 말이 많지 않나!
요컨대 제아무리 글라델리스 상단이라 하더라도 그녀의 눈 밖에 나서 좋을 건 없다는 말이다.
“자, 그러면 저 하녀의 방으로 가 볼까요?”
그녀의 말에 남은 사람들은 꼼짝없이 베티의 방으로 향해야 했다.
* * *
“이, 이게 왜……!”
방에 들어선 베티는 경악했다.
그녀의 방에는 결코 하녀의 월급으로 살 수 없을 만큼 비싼 보석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당연했다. 이건 모두 삐로리가 끄집어낸 것들이었으니까.
“분명 잘 숨겨 놨, 헉!”
너무 놀란 나머지 저도 모르게 실토하던 베티가 황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이, 이건, 이건……!”
베티는 뭐라 변명하려 했지만 마땅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방 안을 둘러보던 엘레네는 라티아의 어깨에 앉은 삐로리의 턱 밑을 살살 긁어 주며 감탄했다.
“와아, 저건 내가 언니한테 준 거잖아?”
엘레네는 자신이 쓰다가 싫증 난 장신구를 모조리 라티아에게 떠넘기곤 했다.
보석함이 비어 있어야 아버지가 또 사 줄 테니까. 그래서 라티아의 방에 있던 건 모두 엘레네의 것이었다.
“이 목걸이도, 이 귀걸이도, 어? 이 팔찌도. 세상에, 이 반지도 모두 다 내가 언니한테 준 거야.”
엘레네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해맑게 웃으며 증언했다. 덕분에 베티는 입도 벙긋 못 하고 완패해 버렸다.
이제 베티를 감싸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예리엘 상단주의 시선을 선두로 셀트론, 라티아의 눈동자가 조용히 알버스를 향했다. 그중에서 가장 형형한 것은 역시 레이시나의 금색 눈동자였다.
상황이 이렇게 되면 알버스는 가문을 위해 자신의 내연녀를 내쳐야만 했다.
알버스는 주먹을 불끈 쥐며 호령했다.
“감히 모시는 아가씨의 물건에 손을 대다니! 매질을 해서 당장 내쫓거라!”
알버스의 외침에 베티는 억장이 무너졌다.
그간 후작저를 위해서 제가 어떻게 했던가. 알버스와 제가 무슨 사이던가!
베티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알버스를 바라봤다. 그녀는 후작의 내연녀였다. 비록 정실은 아니지만, 공인된 첩도 아니지만 베티는 후작의 서재에 출입이 허가된 유일한 사람이었다.
‘아내도, 딸도 믿을 수 없는 이 세상에서 내게 너는 유일하단다.’
불과 어제도 그의 속살거림을 들으며 함께 살을 맞댔다. 그랬는데 그 결과가 이거라니.
“안 돼, 내게 이럴 순 없어, 어떻게 제게, 나는 후작님의……!”
베티를 결박한 집사가 얼른 입을 틀어막았다. 그녀의 입에서 헛된 이야기가 나올까 봐 미연에 방지한 것이다.
알버스는 레이시나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고, 레이시나는 베티를 경멸하고 있었다. 그 순간 베티는 깨달았다.
저는 정말 철저히 버려졌다고.
다름 아닌 저를 냉랭한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는 저 사생아 나부랭이 때문에!
베티의 탐욕스러운 녹안이 짐승처럼 형형하게 라티아를 쏘아봤다. 그러나 그루안 상단주와 예리엘 만물 상단주를 등에 업은 라티아는 두려울 게 없어 보였다.
오히려 라티아는 작은 입술을 달싹여 속삭였다.
“그러게 줄을 잘 탔어야지.”
베티는 그에 동공이 확 좁아질 정도로 경악했다. 그러나 그녀의 입은 단단히 틀어 막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으읍……! 읍! 으으읍……!”
복도 너머로 베티의 외침이 아스라이 사라졌다.
그 소리를 들으며 라티아는 베티가 앙심을 품고 또 다른 형태로 복수하려 들 거라 예상했다.
‘대비를 해 둬야겠어. 저번처럼 또 당하지는 않을 거야.’
하지만 라티아가 대비한 방책을 펴는 일은 돌아오지 않았다.
‘불륜 사실이 들켜 레이시나의 심기를 거스르면 안 돼. 그녀의 외가에 기대고 있는 사업 자금은 물론이고 이혼이라도 하면…… 글라델리스 후작가의 이미지는 끝이야.’
그렇게 판단한 알버스가 먼저 손을 쓴 것이다.
흠씬 매질을 당하고 성치 못한 몸으로 저택을 빠져나가는 베티의 뒤로 남자 한 명이 따라붙었다. 그의 등 뒤에선 은빛의 초승달이 반짝거렸고, 이후 베티의 행방은 묘연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