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죽일 남주를 길들여버렸다-21화 (21/186)

21화

사실 하녀인 베티가 장녀인 내게 따박따박 말대답을 하는 것부터가 글러 먹었다. 하지만 이게 너무 자연스럽고 당연해진 탓에, 아무도 지적을 하지 않았다.

바보 같은 사람들.

나와 베티의 대화가 길어질수록 후작저 내에서의 내 입장이 어떤지 낱낱이 까발리는 것과 다름없었다.

아버지가 침음하는 사이로, 팽팽한 기 싸움이 계속됐다. 베티의 얼굴에 ‘이것 봐라.’ 하는 기운이 어렸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미안해서 어쩌나, 아직 멀었는데.

나는 속상하다는 듯 입술을 비죽이며 말했다.

“나를 하녀나 괴롭히는 못된 주인으로 만들다니. 슬퍼, 베티. 너를 위해서 보들보들초까지 준비를 했는데.”

내가 손을 내밀자 어깨에 앉아 있던 삐로리가 가뿐하게 날아왔다.

“참, 베티. 베티는 그런 적 없어? 동물이 말을 했으면 좋겠다, 대화를 나누고 싶다. 뭐 그런 거 말이야.”

나는 삐로리의 머리통을 살살 쓰다듬으며 베티를 바라봤다. 베티는 경계하는 표정만 지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있어. 그래서 삐로리에게 이걸 달았어.”

반짝, 삐로리의 목줄에 달린 펜던트가 빛났다. 내내 삐로리만 보고 있던 엘레네가 궁금한 듯 눈을 빛냈다.

“베티, 네가 내 방에 몰래 들어와서 멋대로 금품을 가져간다는 것을 내가 어떻게 알았게?”

심지어 베티는 이걸 제대로 부정하지도 않았다.

진짜 바보인 건지, 아니면 사생아의 물건을 훔친 것쯤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건지.

아마도 후자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물론 베티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나는 늘 당하고만 살던 멍청한 라티아였으니까. 하지만 문제가 있다면 나는 더 이상 멍청하지 않았고, 지금 이 자리엔 셀트론이 있다는 것이다.

나는 정말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듯 좌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삐로리가 알려 줬어.”

“삐로리……가?”

엘레네가 의아하다는 듯 되물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펜던트를 반 바퀴 돌렸다.

그러자.

[말해? 말해? 말해?]

펜던트에서 빛이 나오며 허공에 글씨가 떠올랐다. 마치 영사기를 통해 영화가 나오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베티를 쏘아보며 말했다.

“있잖아, 이건 마도구야. 이것만 있으면 그 어떤 동물하고도 대화를 나눌 수 있어.”

일종의 동물어 번역기다. 허공에 새로운 글씨가 떠올랐다.

[라티아의 말은 모두 사실이야. 내가 다 봤어. 저 베티라는 하녀는 실제로 부정도 하지 않았잖아? 그녀가 라티아의 방을 뒤졌어. 금품을 찾기 위해서. 아, 맞아. 그러다가 어떤 약을 발견했지?]

털그럭, 베티의 손에서 화분이 미끄러져 떨어졌다. 화분이 깨지는 소리 사이로 삐로리의 말을 번역한 글자가 계속됐다.

[그녀는 그 약을 보고 단박에 ‘후작님의 것이다.’라고 말했어. 나중에 라티아에게 들어 보니, 후작님의 서재에 똑같은 약이 있어서 오해를 받은 거라지 뭐야.]

삐이, 삐로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이상하지? 어떻게 베티는 그 약을 보자마자 후작님의 서재에 있는 약과 똑같은 것이라는 걸 알았을까?]

“그, 그건.”

아버지가 뭐라 말을 잇기 전에, 다시 글자가 떠올랐다.

[마치, 후작님의 서재에 들어가 본 적이 있는 것처럼 말이야.]

* * *

삐로리의 말에 레이시나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베티! 그 마법약에 후작님의 서재에 있었다는 걸 어떻게 알았지? 설마, 정말로 서재에 들어가 본 건……!”

순간 레이시나의 얼굴에 ‘그러고 보니!’라는 깨달음의 빛이 스쳐 지나갔다. 라티아가 약을 갖고 있다며 고발한 베티의 말을 들었을 땐 때는 미처 눈치채지 못한 부분이었다.

레이시나가 이렇게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도 당연했다.

알버스는 그간 레이시나에게 서재에 대단히 귀한 것들이 있다는 것만 언질했다. 서재의 조그마한 먼지라도 세상에 드러나는 일이 있으면 후작 가문이 폭삭 무너질 거라는 겁박과 함께. 그래서 후작 부인인 레이시나조차 알버스의 서재에 들어간 적은 한 번도 없다.

결혼한 이후, 단 한 번도!

그런데 그 서재에 하녀가 들어갔다니, 다른 누구도 아닌 수족 하녀인 베티가 들어갔다니?

게다가 베티는 알버스와 불륜 관계라는 추문이 있는 하녀다. 레이시나는 제가 베티보다 뒤처질 것은 단 하나도 없다고 여기고 있었다.

‘나도 못 들어간 곳에, 베티가……!’

눈이 돌고도 남을 일이었다.

“아, 아니에요! 마님! 오해예요!”

베티는 당연하게도 부정했다. 그리고는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삐로리와 라티아를 번갈아 손가락질했다.

“엉터리야! 이런 건 다 엉터리에요!”

레이시나는 분노한 가운데 아직 긴가민가한 듯 보였다. 이대로 라티아와 새의 말을 그대로 믿기엔 섣부르다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베티는 레이시나가 주춤하는 듯 보이자 더욱 목청을 높였다.

“출처도 모르는 마도구로 나를 모함하다니! 이런 엉터리 물건으로 오찬을 망치다니, 이건 후작님을 기만한 거나 마찬가지예요!”

베티는 삐로리를 잡아채려 했다.

[어딜, 어딜! 나 잡으면 용하지!]

삐로리는 퍼드덕 날아다니며 그런 베티를 놀렸다. 날카로운 발톱으로 머리를 엉망으로 헤집는가 하면 저를 잡으려 드는 갈퀴 같은 손을 쪼아 댔다.

“악, 아악! 이 망할 새가……!”

베티의 얼굴에 작은 생채기가 날 무렵이었다.

“그마아안!”

알버스가 식탁을 탕 내려치며 고함을 내질렀다.

그랜드 홀에 메아리치는 목소리에 모두들 쩍 얼어붙었다. 더 이상 셀트론이라는 손님 앞이라는 건 중요하지 않은 듯 보였다.

파닥파닥, 삐로리의 날갯짓 소리만이 고요한 그랜드 홀에 울렸다.

알버스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치욕스러운 얼굴로 라티아를 쏘아봤다. 베티도 아니고 라티아를.

“이런…… 귀한 손님을 모신 자리에서 이게 대체 웬 소란이냐.”

알버스는 애당초 소란을 일으킨 라티아에게 모든 것을 떠넘기려는 생각이었다. 그러며 은근슬쩍 자신의 불륜도 감추려는 속셈인 게 분명했다.

라티아는 기가 찼다.

‘아무리 그래도 난 후작 영애이자 딸인데.’

하녀에게 미심쩍은 부분이 있다면 그녀를 먼저 책망하는 것이 순서에 맞지 않나? 더군다나 지금은 손님 앞인데 말이다. 하지만 라티아는 내색하지 않았다.

‘아버지에게 뭘 바라겠어.’

한편으로는 알버스의 표정이 고스란히 읽혀 이해가 갔다. 알버스는 무시했던 셀트론이 대상단의 문턱에 서서 이렇게 대접하고 있는 것을 불쾌해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셀트론의 앞에서 가문 내의 일을, 그것도 콩가루가 난 일을 들키다니!

“당신도 소란일랑 그만 피우고 자리에 앉으시오.”

알버스가 여전히 혼란스러워 보이는 레이시나에게 말했다. 그리고는 파닥파닥 날갯짓을 하고 있는 삐로리를 눈짓했다.

“저 출처도 모르는 저런 쓰레기 잡것 같은 목줄을 어서 버려라. 아니, 깨트려.”

그렇다면 이번 일은 불문에 부치겠다며, 아버지는 선심 쓰는 척을 했다. 라티아는 지금이 딱 맞는 때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셀트론에게 눈짓을 하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소란을 피워서 죄송합니다. 라티아가 아직은 무척이나 어려서 때와 장소를 제대로 가릴 줄은 모릅니다. 하지만 보셨죠, 하녀를 얼마나 아끼는지. 분명 좋은 상단원으로서…….”

알버스는 흐트러진 냅킨을 다시 목깃에 꽂으며 상황을 무마하려 했다.

이때였다.

팔랑…… 찰딱!

하늘에서부터 떨어진 종이 한 장이 기름기가 번들거리는 알버스의 이마에 딱 달라붙었다.

“…….”

“…….”

장 내엔 또 다른 침묵이 감돌았다. 알버스는 콧수염을 씰룩거리다가 이마에 붙은 종이를 떼어 냈다.

[바보]

종이는 얇았고 글씨는 선명했다. 그 탓에 뒷장에도 종이에 뭐라 적혀 있는지 훤히 보였다. 알버스의 얼굴이 더할 나위 없이 붉어졌다.

“감히…… 감히 누가 이딴 장난을……!”

알버스가 분노를 터트리려던 때였다.

다시 팔랑…… 또 찰딱!

이번엔 알버스의 왼쪽 뺨에 달라붙었다. 알버스가 신경질적으로 종이를 떼어 내서 읽었다.

[멍청이]

“감히이!”

알버스는 바보라고 적힌 종이까지 한데 뭉쳐 바닥에 퍽 집어 던졌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

“대체 어떤 막돼먹은 놈이 이딴 장난을 친 게냐!”

쩌렁쩌렁 울리는 고성에 다시금 팔랑, 찰딱!

알버스의 오른뺨에 붙은 종이를 시작으로 우수수수.

“허억!”

“꺄악!”

텅 빈 허공에서부터 무수한 종이가 쏟아져 알버스는 물론이고 근처에 앉아 있는 레이시나까지 잠식시켰다. 심지어 그 종이들은 모두 보증서였다!

“이익, 이게, 이게……!”

알버스는 억센 장대비처럼 쏟아지는 보증서들 사이에서 어푸어푸 허우적거렸다.

“여보, 여보!”

이런 상황은 레이시나도 마찬가지인지라, 부부는 손을 맞잡고 마치 왈츠라도 추는 것처럼 종이의 바다에서 헤엄쳤다.

“아하하하, 하하하하!”

그러던 중 허공에서 커다란 웃음소리가 들렸다. 이 우스꽝스러운 광경을 도무지 견딜 수가 없다는 듯 즐거운 웃음소리였다.

“그러게.”

또각, 낯선 목소리와 함께 높은 구두가 바닥을 딛는 소리가 들렸다.

“함부로 내 물건을 폄하하면 안 되지. 그러니까 벌을 받았잖아요.”

어느새 열려 있는 문 사이로, 새하얀 빛이 새어 들어왔다. 그 탓에 삐딱하고 요염하게 서 있는 여인의 실루엣이 더욱더 짙게 보였다.

“웬 놈이냐!”

가까스로 보증서의 바다에서 빠져나온 아버지가 엉망이 된 몰골로 물었다.

“나?”

여인은 매혹적인 목소리로 말하며 또각또각, 도도하게 걸어왔다.

지척에 다가온 여인은 칠흑처럼 새까만 머리칼에 마찬가지로 흑진주처럼 윤기 나는 눈동자를 갖고 있었다. 촤악, 그녀는 검은 공작 깃털로 장식된 부채를 펴서 살랑살랑 흔들며 웃었다.

야살스러운 눈꼬리가 여우처럼 확 휘어지자, 알버스는 멍하니 그녀를 쳐다만 봐야 했다. 그만큼이나 매혹적이면서 동시에 위험한 분위기가 풍겼다.

이윽고 여인이 말했다.

“‘출처도 모르는 쓰레기 잡것 같은 목줄’을 판 예리엘 만물 상단 상단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