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내가 제2 관리자 자리에 앉고 며칠 후.
엘레네가 산수 공부를 시작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흥, 백날 해 보라지.”
나는 어느 정도 멍이 빠진 수잔의 몸에 연고를 발라 주며 비웃었다.
“엘레네 아가씨는 수학에는 재능이 없지 않으셨나요?”
“그러니까 말이야. 걘 공부 쪽으로는 영 아니거든.”
그렇다고 엘레네가 바보라는 건 아니다. 그녀도 똑똑하긴 하지만 그건 다른 쪽으로였다. 회귀 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린 나는 문득 한기가 들어 부르르 몸을 떨었다.
창틀에 등을 기대고 정원을 보던 카르시안이 물었다.
“그런데 요즘 너무 평화롭게 지내는 거 아니야?”
내 방은 1층이므로 종종 정원을 가로지르던 카르시안이 얼굴을 비추기 시작했다. 나는 수잔의 등 단추를 채워 주며 말했다.
“응, 아니야. 내가 얼마나 치열하게 살고 있는데.”
매일같이 아버지를 따라 일하랴, 셀트론을 위한 정보를 빼내랴, 복수할 기회를 재랴. 몸이 열 개여도 부족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카르시안이 ‘그런 뜻이 아니잖아.’ 하고 입술을 비쭉거렸지만 나는 그를 모른 척하고 조금 전, 삐로리가 가져온 서신을 확인했다.
일전에 나는 내 사정을 셀트론에게 고스란히 전달했다.
셀트론은 내게 자신이 도울 수 있는 일은 없느냐고 물었다. 그래서 나는 셀트론에게 아버지가 새로 양식하려는 약초가 무엇인지 알아내 전해 줬다.
미리 짱짱하게 키워서 경쟁력을 갖추라는 뜻이기도 했고, 맨입으로 부탁하기엔 너무 큰 건이기 때문에 입을 막는 용도기도 했다. 그러며 은근하게 한 가지를 부탁했는데, 지금 그 답이 돌아왔다.
내가 서신을 읽으며 씩 웃자 카르시안이 말했다.
“셀트론이 뭐래?”
실제로 만나 본 적도 없으면서, 카르시안이 넉살 좋게 물었다. 나는 궁금증이 가득한 수잔과 카르시안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알겠대.”
내 말에 카르시안이 “와!” 하고 기뻐했고, 수잔이 박수를 짝짝 쳤다. 이로써 베티를 내쫓고 아버지에게 빅 엿을 먹일 준비는 끝났다.
이제 타이밍만 잡으면 되는데…….
“흐음, 언제가 좋을까.”
내가 서신의 뾰족한 부분으로 턱을 두드리며 중얼거릴 때였다.
똑똑똑, 누군가가 노크를 했다.
“제가 나가 볼게요.”
수잔이 얼른 일어나 문을 열었고, 하녀와 짧은 대화를 나눴다.
달칵, 수잔이 문을 닫으며 나를 돌아봤다. 그녀의 얼굴엔 짙은 만족감이 들어차 있었다.
그 웃음 덕분에 알 수 있었다.
“아가씨, 후작님께서 내일 있을 만찬에 초대하셨어요. 아가씨와 그루안 상단주님을요!”
복수의 시간이 찾아왔다는 것을 말이다.
* * *
“라티아 글라델리스 아가씨께서 오셨습니다.”
만찬은 그랜드 홀에서 열렸고, 다들 벌써 자리에 앉아 있었다. 상석에 앉은 아버지를 중심으로 양옆으로 셀트론과 어머니가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일순간 아버지와 어머니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상할 것도 없었다. 나는 지금 어깨에 삐로리를 얹고 있었으니까.
제2 관리자가 되자마자, 나는 삐로리를 키워도 되냐는 허락을 받았다. 이후 나는 종종 삐로리와 함께하며 단짝 같은 모습을 보였다.
오늘 같은 기회에도 삐로리와 함께하기 위해서!
이 자리, 만찬에 셀트론을 초대한 이유는 아주 간결했다. 셀트론이 이끄는 상단, 그루안 상단이 예리엘 만물 상단과 제휴를 맺었다는 소식이 퍼졌기 때문이었다.
셀트론이 마음만 먹으면 예리엘 만물 상단에 아버지가 저지른 짓의 증거를 요구할 수도 있었다.
아버지는 그게 두려워 미리 셀트론과 화친을 맺을 생각인 게 분명해. 나도 부른 이유는 셀트론과 내가 친밀해 보였기 때문이겠지.
“와아, 새다.”
엘레네가 나보다도 먼저 삐로리를 아는 척했다. 어머니가 엘레네에게 눈치를 주는 게 보였다.
“좋은 오후예요.”
“그래, 오늘 아주 아름답구나.”
내가 드레스 자락을 늘리며 인사하자, 아버지가 다정다감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셀트론의 옆자리에 앉자, 마주 앉은 엘레네가 일부러 혀짧은 소리를 내며 인사했다.
그런 소리를 아버지가 좋아하니까.
“아녕, 라티아 언니? 오늘 예뿌다.”
어머니를 빼닮은 엘레네는 예쁘장한 장밋빛 머리칼과 토파즈 같은 눈동자에 어울리도록 화려하게 차려입은 채였다.
“그래.”
나는 일부러 매몰차게 대답했다.
왜냐면 엘레네는 지금 나를 비웃고 있었으니까.
내가 걸친 예쁘고 깨끗한 드레스, 화려한 장신구는 분명 후작 영애다웠다. 하지만 지금 내가 걸치고 있는 모든 것들은 유행이 지난 것이고, 물려받은 것이다.
내 동생인 엘레네에게서!
엘레네가 이죽거리며 말했다.
“내가 입었을 때는 소매가 좀 짤밧는데, 엉니는 꼭 맞네?”
“수잔이 수선해 줬어.”
“징쨔? 수선을 해서 그런가 바! 새 옷 가태! 계속 그러케 입어도 되게따. 새 옷을 많이 사는 건 낭비쟈나, 그치?”
어처구니가 없었다.
돈을 아끼기 위해 한 명분의 옷만 사고 물려 입자니, 그걸 동생인 엘레네가 말하다니!
“그 귀거리도 엄청 잘 어울려. 엘레네능 하얗기만한 엉니와 다르게 건강한 색이라고 했거등! 그래서 금은 잘 안 어울린대.”
“그래? 나는 피부가 하얘서 그런지 금도, 은도, 백금도 잘 어울리던데.”
내 말에 엘레네의 얼굴에 한 대 얻어맞은 듯한 충격이 어렸다. 내가 대꾸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겠지.
그러게 왜 이기지도 못할 유치한 싸움을 거니?
예전의 나였더라면 ‘잘 어울린다’는 말보다 ‘하얗기만한’에 꽂혀 우울해했을 것이다. 형편없는 자존감 때문에 말이다.
실제로 지난 생에서 나는 엘레네처럼 살을 태우겠다고 뙤약볕에 서 있다가 쓰러진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젠 그러지 않지.
나와 엘레네 탓에 만찬에 애매한 정적이 감돌자 어머니가 나섰다.
“자매들끼리 칭찬이 끊이지 않고, 우애가 참 좋구나.”
호호호, 교양 넘치는 웃음소리에 아버지가 얼른 따라 웃었다. 아버지는 내 옆에 서 있는 수잔을 보고는 ‘마침 좋은 게 있군.’ 하는 얼굴로 말했다.
“그런데 라티아, 수잔이 왜 보들보들초를 들고 있는 것이냐?”
짐짓 다정한 목소리로 내게 관심을 주는 말에,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렇지 않아도 슬슬 이야기를 꺼내려고 했는데, 먼저 물꼬를 터 주다니!?
이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진심으로 우러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 이번에 제가 제2 관리자가 되면서 후원에서 재배되는 약초의 관리상태도 확인하게 됐잖아요.”
난 엘레네와 달리 최대한 또박또박 말하기 위해 노력했다. 앞으로 말할 이야기를, 절대로 ‘7살의 헛소리’로 치부하지 못하도록.
내 말에 어머니와 엘레네의 얼굴이 시기와 질투로 물들었지만, 아버지는 별다를 것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래.”
며칠 전, 아버지는 내게 후원 토양을 전부 갈아엎는다고 했다. 그러며 직접 비교를 하라며 내게 몇 뿌리 주기도 했다. 내가 수잔의 도움으로 가져온 보들보들초는 그때 받은 것이다.
나는 어머니의 뒤에 얌전한 척 서 있는 베티를 보며 웃었다.
“베티, 이건 네 선물이야.”
“저, 저요?”
베티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나는 그녀가 감동을 받으려는 차에 순하게 웃으며 말했다.
“응. 전에 베티, 네가 그랬지? 연고는 아주 귀하다고. 너무 귀해서 카르시안 따위에게 주면 안 된다고.”
딸그락! 누군가가 식기를 놓치는 소리가 들렸다.
카르시안은 엄연한 백작가의 영식이자, 지금은 친우인 우리 후작가에 의탁된 사람이다. 결코 ‘따위’로 칭해질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일개 하녀가 영식을 ‘카르시안 따위’라고 말하다니!
“제, 제, 제가 언, 언제 그런 말을…….”
베티가 허겁지겁 변명했지만, 나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수잔이 걸어가 베티에게 보들보들 초를 건넸다. 베티는 얼떨결에 화분을 받았고,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애잔하다는 듯 눈썹을 팔자로 늘어뜨렸다.
“그리고 베티, 돈이 급하면 말을 하지 그랬어. 내게는 어울리지 않다며 가져간 금품이나, 내가 없는 방에서 가져간 걸로는 충당이 안 되는 일이 생긴 거야?”
어쩌면 좋아.
나는 쩍 굳은 베티를 동정하듯 덧붙였다. 매번 비웃던 나에게 되레 동정을 받는 베티의 표정이 볼 만 했다.
“자, 그러니까 베티에게 이걸 줄게. 아주 비싼 연고를 만드는 식물이니, 이것도 아주 비싸게 팔 수 있을 거야.”
나는 너를 아껴서 이렇게 비싼 선물을 주는 거야.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걸 팔아 힘을 보태도록 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하녀의 잘못을 용서하고 오히려 도와주는 보여 준다는 듯이 웃으며 베티의 만행을 낱낱이 까발렸다.
이렇게 웃으면서 멕이는 거, 너만 할 줄 아는 거 아니거든. 내가 그냥 라티아인 줄 알아? 회귀 전엔 몰라도, 환생 전엔 꽤 머리가 굵었다고.
나는 머리가 새하얘진 사람처럼 굳어 있는 베티를 보고 진심으로 미소 지었다.
이때였다.
“우…… 우리 아가씨께선 기억력이 정말 안 좋으시네요. 그건 다 아가씨께서 제게 ‘선물’해 주신 거잖아요?”
베티가 반격을 시작한 것이다. 그래 봤자 내 손 안이다.
“흐응, 가져간 걸 부정은 안 하는구나.”
베티는 순간 덜그럭거렸지만, 이내 시치미를 뚝 뗐다.
“요즘엔 어린아이들도 치매가 온대요. 아가씨께서도 그런 거면 어떡하죠?”
베티는 난감하다는 듯 눈썹을 늘어트렸다. 그리고는 내가 말할 틈을 주지 않고 얼른 아버지와 어머니를 보며 말을 이었다.
“너무 괘념치 마세요. 저와 아가씨는 늘 이렇게 논답니다. 일종의 상황극이에요.”
베티의 수습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한시름 덜은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 그래요. 라티아가 워낙 유별나서 저렇게 하녀를 괴롭히면서 논답니다.”
“매번 베티에게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걱정스럽다오.”
어머니와 아버지가 한마디씩 거들며 상황을 정리하려 했다.
하지만 그럴 수야 없지. 왜냐면 난 아직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이 남아 있거든.
“저런 베티, 너는 내가 어울려 줄 친구가 한 명도 없어서 후작가의 영애가 하녀와 논다고 말하고 싶은 거니? 엘레네는 매일같이 소규모 티파티에 나가서 친구를 사귀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데, 나는 아니라고?”
이 말에는 아버지도, 어머니도 숨을 집어삼켰다.
이래서야 마치 장녀와 차녀를 차별하고 있다는 것 같을 테니까.
심기가 불편해진 아버지가 뭐라 말하려 할 때, 베티가 눈물을 보였다.
“아가씨, 오늘도 기어코 제가 그만둬 달라고 눈물을 보여야 멈추실 건가요?”
“응? 아하하!”
난 웃음을 터뜨렸다.
어머니의 수족 하녀였던 베티를 울리다니. 아무것도 모르는 7살 사생아였을 땐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베티를 울렸다는 사실이 어머니의 귀에 들어가면 분명 날 미워하실 테지. 난 그렇게 겁을 먹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젠 아닌걸.
“모순이네, 베티. 넌 나와 이렇게 논다고 말했잖아. 우는 게 어떻게 노는 거야?”
“그건…….”
베티가 도와달라는 듯이 아버지와 어머니를 바라봤지만, 두 사람은 곤란한 듯 얼굴만 찌푸릴 뿐이었다. 그도 그럴 게 셀트론에게 ‘후작가의 장녀가 하녀에게 놀아난다’는 약점과도 같은 꼴을 보였으니!
미리 말을 맞췄던 대로 셀트론의 표정은 무척이나 혼란스럽고 충격을 받은 듯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