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방에서 확인한 수잔의 상태는 말이 아니었다.
수잔은 내 생각보다 더 심하게 매질을 당했다. 베티가 이를 악물고 때린 게 분명하다.
“아가씨, 제가 할게요.”
“으응, 아니야. 내가 해 줄게. 등이라서 손도 잘 닿지 않잖아.”
나는 수잔의 등에 타박상에 좋은 연고를 발라 주며 말했다. 이건 셀트론이 바깥에서 공수해 준 거다.
삐로리는 굉장히 영특해서 따로 훈련하지 않아도 전서구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덕분에 셀트론은 내가 처한 부당한 상황과 억울함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아버지와 나눈 대화의 전반적인 상황도 전달했다. 혹시 모르니 입을 맞춰 둘 필요가 있었다.
“그간 잘 지내고 계셨나요?”
수잔이 힘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 지경이 된 와중에도 내 걱정을 해 주는 게 고맙고도 미련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수잔의 등에 연고를 듬뿍 바르며 말했다.
“응. 나는 잘 지내고 있었어. 카르시안하고 삐로리가 도와줬거든.”
“저도 아가씨 덕분에 괜찮았어요. 아가씨께서 삐로리를 보내 주실 때마다, 아가씨는 괜찮다는 걸 알 수 있었으니까요.”
목이 멨다.
삐로리를 통해서 몰래 전달한 물과 안부가 고작인데도, 그것에 안도를 했다니.
수잔이 주는 사랑은 너무도 과분해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간신히 뱉는 숨 사이로 본심이 튀어나왔다.
“후회하지는 않아?”
“……네?”
“수잔은 더 나은 곳으로도 갈 수 있잖아.”
수잔은 사생아인 나의 유모지만 엄연히 글라델리스 후작가에서 일하는 사람이었다. 만약 나를 보살피기 싫어서 떠난다고 하면 어머니는 기꺼이 수잔에게 추천장을 써 줄 것이다.
7살이면 유모와 떨어질 나이가 됐기도 했고, 보살펴 주는 사람이 없는 편이 나를 괴롭히기 좋으니까.
또 수잔은 무척 유능하다. 내 곁에서 이렇게 고통만 받을 만한 이가 아니라는 말이다.
수잔이 여기에 남아 괴롭힘을 당하는 건 전부 나 때문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 생각에 침울해져 있으니, 수잔이 휙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연고로 찐득한 내 손을 꽉 부여잡으며 외쳤다.
“아가씨! 그런 생각하지 마세요!”
그 목소리가 어찌나 큰지, 나도 모르게 눈을 휘둥그레 떴다. 수잔이 나에게 호통을 치는 건 처음이다.
“수잔……?”
수잔은 아주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은 사람처럼 얼굴까지 붉혔다. 그녀의 눈시울이 젖어 드는 건 금방이었다.
“왜, 왜 우는 거야…….”
“흑, 흡…… 다시는 그런 말, 그런.”
수잔은 꽉 부여잡은 내 손 위로 고개를 숙여 이마를 기댔다. 몸이 성하지 않아 뜨끈하게 열이 나고 있었다.
“그런 생각도 하지 마세요. 저는, 저는…….”
수잔은 크게 심호흡을 하며 숨을 가다듬고는 고개를 들어 나를 마주했다. 온화한 성정을 대표하는 것 같은 갈색 머리칼보다 조금 더 연한 갈색 눈동자에 내가 오롯하게 담겼다.
“아가씨를 만나서 행복해요.”
“……!”
“아가씨는 모르시니까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겠죠. 저는, 아직도 잊지 못해요. 금색 강보에 싸여 잠든 아가씨를 처음 안은 날을요.”
“수잔…….”
수잔은 아주 무거운 이야기를 꺼내려는 사람처럼 연거푸 한숨을 내쉬었다.
“아가씨, 아가씨께서 꼭 들으셔야 하는 이야기가 있어요.”
“……응.”
“아가씨도 어렴풋이 알고 있겠지만…… 마님은 아가씨의 친어머니가 아니세요.”
수잔의 연갈색 눈동자가 조금 흔들렸다. 나는 다 알고 있었지만 모르는 척 수잔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저는 원래 하녀장님의 보조를 돕는 수석 하녀였어요. 원래 아가씨의 유모역은 당시 아이를 낳은 하녀장님의 역할이었죠. 하지만 하녀장님은 아가씨가 가문 외 자식이라는 이유로 맡기 꺼려 하셨어요. 당시 마님의 배 속엔 엘레네 아가씨도 없었는데 말이에요.”
“……응.”
“그래서 결혼도 하지 않은 제가 아가씨의 유모가 된 것이죠.”
이건 몰랐다. 수잔이 결혼하지 않았다는 것은 알았지만 말이다.
“젖이 나오지 않아서 소의 젖을 데워서 먹였고, 분유를 찾느라 고생했어요. 하지만 그런 고생 따위, 아무것도 아니었죠. 왜냐면.”
수잔이 천천히 내 손등을 매만졌다.
“아가씨를 처음 안은 순간 전 아가씨와 사랑에 빠졌으니까요. 아가씨가 눈을 뜨고 그 작은 손으로 제 손가락을 잡았을 때, 저는 다짐했어요.”
연갈색 눈동자가 나를 가만히 바라보다 부드럽게 휘어 웃음을 지었다.
“내가 해 보자.”
“…….”
“친어머니도, 능숙한 유모도 아니지만 행복을 알려 주자.”
눈물로 젖은 연갈색 눈동자가 찬연하게 빛났다. 그 속에 있는 감정은 무한한 애정이었다.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뭔가가 뿌듯하게 차올랐다.
“그러니까 저는 후회하지 않아요. 단 한 번도 그런 적 없어요. 지친 적도 없어요, 아가씨.”
수잔은 손을 잡고 있는 것조차 닳을까 봐 걱정된다는 듯이 조심스럽게 맞잡은 손을 놓았다. 나는 그런 수잔의 손을 따라가 맞잡았다. 그리고는 수잔이 했던 것처럼 고개를 숙여, 맞잡은 손에 이마를 대고 말했다.
“응. 고마워, 수잔. 나도 행복해. 수잔을 만나서, 수잔과 함께 지낼 수 있어서. 수잔은 내가 가진 유일한 행복이야.”
내 말에 수잔의 손이 멈칫 굳는 게 느껴졌다.
“전부 다 수잔 덕분이야. 하지만…….”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아랫입술을 꽉 물었다가 말했다.
“앞으로 이런 일은 절대로 없을 거야.”
“아가씨…….”
“내가 그렇게 만들 거야.”
수잔의 눈동자가 조금 흔들렸다. 빠르게 차오르는 눈물 때문에 일렁거린 탓이다. 나는 수잔에 비하면 턱없이 작은 손으로 그녀의 눈물을 훔쳐 줬다.
“그러니까 우리 앞으로 행복만 하자?”
왠지 나도 울음이 나올 것 같아서 얼굴을 찡그리며 웃었다. 수잔은 나의 작은 손에 가만히 뺨을 기대고 있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러면 마저 치료해야지.”
“네, 아가씨. 여기도 부탁드릴게요.”
얻어맞은 팔 때문에 움직이기가 여의치 않았다. 나는 수잔이 부탁한 옆구리에도 꼼꼼히 연고를 발라 주며 아주 조용히 베티와 후작저 사람들을 향한 분노를 태웠다. 마른 짚을 태우는 잔불처럼.
* * *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났다.
나는 오늘도 아버지와 함께 장부를 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회귀 전에 있던 일이 하나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이맘때쯤 장부 하나가 조작되지 않았나? 혹시나 싶어서 장부를 뒤적거려 보니, 역시.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아버지의 앞으로 향했다.
“뭐냐.”
지난 생에 비하면 나의 능력 덕분에 유해지긴 했어도 아버지는 여전히 차갑기 그지없다.
나는 아버지의 앞으로 방금 찾은 장부를 내밀었다. 지난달의 월말 정산이었다.
“장부가 잘못되었어요, 아버지.”
“……뭐?”
아버지가 놀라 고개를 들었다.
“제가 방금 계산해 봤는데 120골드가 비어요.”
고작 120골드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건 월말 정산 장부다. 1브론즈라도 오차가 있으면 안 된다. 이게 잘못됐다는 뜻은 이전 장부도 잘못됐다는 뜻이니까.
아버지는 얼른 장부를 펼쳐 확인했다. 그리고는 내 말대로 120골드가 빈다는 것을 확인했는지 하얗게 질렸던 얼굴이 다시 붉게 달아올랐다.
“이런 쓸모없는 자식……!”
지금 월말 장부를 책임지고 있는 사람은 아버지가 비싸게 고용한 남자였다. 본 상단의 전반적인 일을 맡길 정도로 아주 고급 인력이란 말이다. 그런데 실수를 하고, 그걸 7살짜리인 내가 눈치챌 때까지 정정을 하지 않았다니.
나는 아버지가 욕을 짓씹는 동안 지지난달 장부도 확인했다.
“역시. 아버지, 이것도 부족해요. 여긴 80골드요.”
아버지의 욕설이 한층 더 커졌다.
회귀 전에서는 분명 3개월 치의 장부가 잘못되었고, 비는 금액은 모두 그 직원의 주머니로 들어갔지?
나는 아버지 앞에서 장부의 잘못된 부분을 전부 짚어냈고, 동시에 이게 실수가 아니라는 것도 알려 줬다.
“실수라기엔 너무 절묘하지 않아요? 보들보들초에서 140실버, 살살이 꽃에서 200실버……. 이런 식으로 시세가 쉽게 변하는 약초에서만 조금씩 빼냈잖아요.”
총 200골드라는 돈이 직원의 주머니로 갔다는 것을 안 아버지는 곧장 나를 돌려보냈다. 그리고 그날 저녁, 나와 수잔 그리고 카르시안은 배가 터지도록 고기를 먹었다.
이튿날, 나는 단숨에 글라델리스 상단의 제2 관리자 위치까지 올라갔다.
“라티아를 제2 관리자로 삼겠다니요?”
이에는 당연히 어머니의 반대가 따랐다. 하지만 아버지는 어머니의 앞으로 내가 바로잡은 장부만 던졌다.
“직원 놈들도, 제1 관리자로 앉아 있는 당신도 놓친 부분이오.”
어머니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장부를 확인했다. 그러나 나의 완벽한 일 처리 솜씨에 할 말을 잃은 듯 입만 벙긋거릴 뿐이었다.
“책임을 묻지 않을 테니, 당신도 아무 말 마시오.”
아버지는 어머니를 내쫓고 내게 후원에 있는 약초밭의 토양을 갈아엎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효과가 있으면 좋겠네요!”
나는 여전히 천진난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렇게나 영특하지만 여전히 어느 정도는 멍청해서 아버지의 손아귀에서 충분히 놀아날 수 있다는 듯이 말이다. 이에 아버지는 조금 누그러진 표정으로 나를 보다가 다시 서류로 시선을 돌렸다.
그 눈빛 덕분에 알 수 있었다. 아버지가 일정량 이상 나를 신뢰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래요, 아버지. 저를 더 신뢰하고 의지해 주세요. 그래야 제가 아버지에게 제대로 복수하죠.
솔직히 날이 무뎌진 아버지에 흔들리지 않는 건 아니다.
이대로 내가 계속 착한 척을 한다면, 언젠가 나를 진짜 딸로 받아들여 주지 않을까? 나를 정말로 사랑해 주는 날이 오지 않을까?
이 빌어먹을 라티아의 몸은 아직도 부모님의 사랑과 정을 갈구하고 있다. 지독한 애정결핍이란 참 무섭다. 하지만 나는 의식적으로 마음을 다잡았다.
더 이상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은 바라지 않아. 두 사람의 썩어 상해 버린 사랑 따위, 줘도 안 가져.
굳이 내 가치를 증명하고 버림받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치지 않아도, 나를 사랑해 주는 이가 있다. 진정한 양육자로서 나를 위해 주는 이가 있다. 어설픈 애교를 부리지 않아도 사랑해 주는, 수잔이 말이다. 그러니 나는 흔들리지 않고 내 갈 길을 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