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아버지는 그루안 상단에서 취급하는 약초의 재배법을 빼돌려 대량으로 생산하고 있다. 하지만 그 효능은 그루안 상단에서 판매하던 약초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분명 같은 약초, 같은 재배법인데도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게 의아한 모양이지?
“대체 무엇 때문에 그루안 상단에서 파는 약초와 우리 상단에서 파는 약초에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그리고 아버지는 내가 셀트론에게 그 차이점을 들었을 거라고 여기는 게 분명했다.
바보 같은 아버지, 생각을 해 보세요. 아무리 무너져 간다지만 상단주가 비법을 처음 본 어린애에게 알려 주겠어요?
나는 아버지가 한심스러웠다. 하지만 동시에 아버지가 이 일로 그만큼 골치를 앓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여기서 잠시 생각해 봤다.
나의 산수 능력은 더욱 뛰어나졌으니 저번 생처럼 아버지와 일을 할 건 분명했다. 하지만 단순 계산을 맡는 기간이 짧아질 뿐, 바로 아버지 사업의 핵심으로 파고들진 못한다.
요컨대 지금 당장은 셀트론에게 아버지의 사업 기밀을 퍼다 나를 수 없다는 말이다.
내가 기억하는 건 내년의 사업부터다. 하지만 여기서 내가 아버지의 신뢰를 아주 약간 얻는다면? 내 덕분에 골머리를 앓고 있는 약초의 효능도 상승시키고, 나의 뛰어난 산수 능력의 덕도 본다면?
나는 조금 더 일찍 아버지의 핵심 사업을 알아낼 수 있지 않을까?
좋아, 생각을 마친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잘은 모르지만 토양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토양?”
“네. 제가 듣기로 후원의 토양은 약초를 재배하기 좋은 약을 섞은 흙이라고 했어요.”
“그래. 그 덕분에 약초를 아주 많이 재배할 수 있지.”
“하지만…… 제 생각에 약초는 너무 쉽게 자라면 안 될 거 같아요.”
“그게 무슨 소리지?”
소파 등받이에 기대어 방만하게 앉아 있던 아버지가 내 쪽으로 상체를 확 기울였다. 나는 아버지의 흥미를 사로잡은 김에 한 번 짚고 넘어가기로 했다.
“어…… 이건 전부 저의 생각일 뿐이에요.”
하지만 아버지는 내 말을 그다지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바보 같은 아버지는 셀트론이 내게 비법을 말해 줬으리라 철석같이 믿고 있는 모양이다.
나는 떨떠름한 표정을 꾸며 내며 말했다.
“여름이 약간 가물어야 그해 가을의 과일이 달 듯이, 흙도 약간 거칠어야 하지 않을까요? 고구마나, 감자 같은 것도 그렇잖아요.”
내 말을 셀트론의 말이라 여기고 있어서 그런가? 아버지는 나의 말을 아주 주의 깊게 들었다.
내가 마저 말했다.
“약초도 땅에서 자라는 거니까…… 땅이 비옥하지 않아야 약초가 더욱 영글 것 같았어요.”
사실 그루안 상단의 약초가 좋은 건 셀트론이 드루이드의 후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지금 말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내가 9살이 될 무렵, 아버지는 우연히 한 농학 박사를 만난다. 그리고 그는 아버지에게 ‘온실 속 화초’는 가냘프지만 ‘야생의 들꽃’은 강인하다는 걸 말해 줬다.
글라델리스 후작가의 약초가 효능이 약한 이유 중에는 ‘너무 빨리 성장시켰기 때문’도 있던 것이다.
“아름다운 진주는 조개가 아주 큰 고통을 참고, 참아야 만들어진다고 들었어요. 그 고통이 없었다면 아름다운 진주는 만들어지지 않았겠죠.”
약초가 홀로 고된 시간을 버티며 영글 시간조차 주지 않고, 영양을 때려 박아 키운 탓에 그 효능이 약했다. 이것만 개선하더라도 효능이 두 배는 높아질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그루안 상단의 약초에는 미치지 못할 테지만 말이다.
내 말에 아버지의 푸른 눈이 빛났다.
어차피 내 말을 셀트론의 말이라고 생각한다면, 뭐. 이용해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았다.
나는 여기서 쐐기를 박았다.
“그루안 상단의 약초는 모두 평야에서 키운다고 들었어요. 저희처럼 약초 온실을 만드는 게 아니라요. 온실 속 화초는 나약하지만 야생의 들꽃은 강한 법이잖아요?”
내 말에 아버지의 표정에 날카로운 깨달음의 빛이 스쳤다. 나는 이 틈을 놓치지 않고 말했다.
“카르시안을 때리다가 손에 상처가 좀 났어요.”
“저런.”
“그런데 연고를 아무리 발라도 상처가 낫지 않아 ‘베티’에게 왜 이런 것이냐고 물었더니 우리 후작가의 약초가 안 좋아서 그렇다고 했어요.”
“……베티가?”
순간 아버지의 입매가 꿈틀거렸다.
“네. 어머니께서 저의 하녀로 주셔서 굉장히 막역한 사이가 되었거든요.”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해맑게 대답했다.
“그리고 베티는 제게 그루안 상단의 약초만큼 뛰어난 게 없다고도 말했어요. 그래서 마침 찾아온 그에게 약초를 구매하려 했어요.”
물론 저는 돈이 없어서 못 샀지만요…….
시무룩하게 덧붙였다.
아버지의 표정에 미묘한 만족감이 스쳤다. 내가 사생아여서 사재가 없던 덕에, 그루안 상단에 돈 한 푼 주지 않고 정보를 빼낸 셈이 됐기 때문이다.
물론 아니지롱. 셀트론에게 구매한 약초는 후원에 몰래 섞어 심어 놨지롱.
이후 아버지는 지난 생처럼 나에게 단순 계산을 맡겼다. 지난 생에서는 네 자릿수 덧셈에도 겁을 먹었지만, 지금은 여덟 자리까지 암산이 가능해서 그런지 두렵지 않았다. 그렇기에 나는 그 자리에서 아버지가 맡긴 일을 전부 해냈다.
나를 보는 아버지의 눈빛이 좀 더 미묘해졌다. 기대도 하지 않던 사생아가 그루안 상단의 비법을 빼내 오고, 산수까지 잘 하는 능력을 가졌으니 그럴 수밖에.
나는 아버지에게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처럼 해맑게 웃고 응접실을 나왔다.
그날 저녁, 하녀가 밥을 가져왔다.
형벌은 거둬졌지만 별로 기대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웬걸.
“세상에…….”
나도 모르게 감탄할 정도로 대단한 진수성찬이었다.
촉촉하게 잘 구운 닭 한 마리가 통으로 있었고, 비리지 않은 생선 요리와 싱싱한 샐러드, 폭신폭신한 빵도 무려 세 종류나 있었다. 게다가 묵직하고 따듯한 크림 수프까지!
“후작님께서 드리는 거예요. 감사하며 드세요.”
하녀는 내게 이런 진수성찬을 주는 게 마뜩찮은지 짜증 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그녀가 문을 쾅 소리 나게 닫거나 말거나 신경도 쓰지 않았다.
“삐로리, 이거 봐 봐.”
“삐륵!”
숨어 있던 삐로리가 날아와 내 어깨에 앉았다.
꼬르르륵, 굶주린 배에서 우렁찬 뱃고동 소리가 들렸다. 나는 군침을 꿀꺽 삼키고 중얼거렸다.
“역시. 복수를 할 때는 하더라도, 내 밥그릇 챙겨가면서 해야겠어.”
쫄쫄 굶으며 고통스럽게 칼을 갈지 않아도, 내 독은 깊어져 간다.
이참에 아주 아버지를 구워삶아서 다시는 나와 수잔을 괴롭히지 못하게 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그리고 카르시안의 아버지는 3년 후에나 돌아온다. 좋으나 싫으나 나와 카르시안은 3년간은 여기에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 3년 동안 후작저 사람들을 끝내주게 이용해서 사생아라고 무시했던 내게 다 갖다 바치게 만들어 주겠어. 그리고 처형은 너희만 당하는 거야.
우후후, 나도 모르게 음흉한 웃음이 샜다.
“삐륵 삐르륵!”
소보루 빵의 부스러기와 싱싱한 과일을 보며 군침을 꼴깍 삼킨 삐로리가 어서 먹자고 나를 채근했다. 하지만 나는 꾹 참고 기다렸다.
솔솔, 좋은 냄새가 방 안을 가득 메웠을 무렵.
“이게…… 다 뭐야?”
또 후작저 사람들이 나를 굶겼을까 봐, 부랴부랴 빵을 챙겨 온 카르시안이 창문을 넘었다.
그의 물음에 나는 씩 웃으며 말했다.
“내 계획의 일부가 성공했다는 뜻이지.”
나는 카르시안에게 오늘 낮에 아버지와 나눴던 대화를 간략하게 말했다.
“후작은 네 말을 믿어? 아니, 진심으로 그루안 상단주가 처음 본 어린아이에게 비법을 알려 줬으리라고 생각한다는 거야?”
카르시안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물었다. 나는 그에게 진수성찬을 눈짓 했다. 그리고는 눈빛으로 말했다.
‘내 계획의 일부가 성공했다고 말했지?’
그에 카르시안은 “허…….” 하고 헛웃음을 흘렸다.
나는 소보루의 부스러기와 싱싱한 과일을 삐로리 앞으로 밀어 주며 말했다.
“내일은 수잔을 풀어 달라고 할 생각이야.”
“그게 될까?”
“되고말고. 나는 내일도 산수를 잘할 텐데.”
나는 내일 아버지의 앞에서 주판을 완벽하게 다루는 모습을 보여 줄 예정이다.
그럼 아버지는 생각하겠지.
‘이 녀석, 쓸모가 있구나.’
마법약을 훔쳤다는 것도 누명인 데다가, 일까지 잘하는 나를 아버지가 안 써먹고 놔두겠어?
수잔은 내일 돌아올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내일도 먹을 수 있는 음식, 빵이나 과일 등을 한쪽으로 빼두며 말했다.
“어서 먹자. 앞으로는 자주 이런 음식을 받아 올 거야. 되갚아 주는 건 되갚아 주더라도 이용은 해야겠어.”
나는 이제 겨우 7살, 카르시안은 10살이다. 미움받는 것과 별개로 어른들을 알차게 이용하여 성장의 발판으로 삼아야 했다.
이중장부를 만들어 두는 것도 좋겠지.
문득 빵을 집어 드는 카르시안의 손이 눈에 들어왔다. 마구간 일을 하느라 거칠어진 손이 마음 쓰였다. 저 거칠한 손이 얼마나 다정했는지도 새삼 상기되었고. 이중장부를 만들면 그 돈은 카르시안에게 쓰자고 다짐했다.
다음 날, 나는 예정대로 아버지의 앞에서 주판을 완벽하게 사용해 보였다.
“아니, 대체 언제부터…….”
여덟 자리까지는 암산을 하더니, 아홉 자리부터는 주판을 사용해서 빠르게 계산을 마치는 모습에 아버지는 할 말을 잃은 듯 보였다. 동시에 푸른 눈빛이 번득였다. 나를 어디까지 써먹을 수 있을지 계산해 보고 있는 게 분명했다.
이윽고 아버지가 말했다.
“제법 괜찮은 머리를 갖고 있구나.”
참 나, 칭찬 한 마디 쉽게 해 주는 법이 없다. 하지만 나는 해맑게 웃었다.
“감사합니다!”
나는 지금 어디까지나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싶어서 노력하는 사생아로 보여야 했다. 일전에 아버지가 나에게 ‘천한 태생’이라고 말했지만, 의심조차 못 할 정도로 순진한 아이로. 내가 자신의 뒤통수를 치기 위해 준비하고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하도록 말이다.
아버지는 나를 몇 번 더 시험했다. 하지만 내가 계산하는 속도가 점점 더 빨라지자, 내 능력을 더 이상 의심하지 않았다.
“그간 너의 재능을 알아보지 못해 아쉽구나.”
이건 사과가 아니었다. 그저 그간 나를 알아보지 못한 시간을 아까워하는 것일 뿐. 나는 가까스로 도끼눈이 떠지려는 것을 참았다.
“앞으로 이 아비를 위해 힘써 주려무나.”
아버지가 아주 자상한 얼굴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날 나는 소매에 상단 납품 장부와 수잔을 챙겨 방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