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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죽일 남주를 길들여버렸다-17화 (17/186)

17화

“……그래서?”

카르시안이 가져온 물까지 야무지게 마신 나에게, 그가 물었다.

“앞으로 어떻게 할 거야?”

조금 전, 나는 그에게 베티에게 들킨 약이 나의 능력으로 얻어 낸 거라는 사실을 밝혔다. 절대로 훔친 게 아니라고 몇 번이나 말했다. 혹여나 카르시안이 나를 도둑고양이 취급할까 봐 무서웠다.

“후작은 분명 네 말을 믿지 않을 거야.”

카르시안의 말에 나는 음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내가 잘못이 없다고 말해 봤자 수잔을 더욱 괴롭힐 게 뻔해.”

“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손 놓고만 있을 수도 없는 거 아냐?”

수잔이 나 대신 잡혀가서 매질을 당하고 있다는 이야기에는 카르시안도 안타까워했다.

나는 손등으로 입가를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미 생각이 있어.”

“뭐?”

“이 방법이라면 베티를 쳐 내는 것은 물론이고 아버지에게도 엿…… 아니. 창피를 줄 수 있어.”

나는 카르시안에게 내 계획의 일부를 귀띔해 줬다. 가만히 고개를 주억거리며 듣던 카르시안이 문득 나를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왜 그렇게 봐?”

“아니, 네가 이렇게 똑똑했나 싶어서.”

그가 콧잔등을 찌푸리며 웃었다. 이미 한 차례 표정을 읽어서 알고 있었지만, 목소리로 들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하긴 원래 나는 좀…… 많이 멍청하긴 했지.

어쩌면 카르시안도 내가 어머니의 사랑에 목이 말라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앞으로는 완전히 달라질 거란 말씀!

나는 카르시안을 한 번 흘겨보고 말했다.

“하지만 이 계획엔 문제가 있어.”

“문제?”

“응. 증거가 없어.”

후작저 사람들은 내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을 터였다. 나는 엄지손톱을 잘근거리며 중얼거렸다.

“모두가 인정할 수밖에 없는 증거가 필요해.”

카르시안은 그런 내 손을 잡아 내리며 말했다.

“방법이 있겠지. 조급하게 생각하지 마.”

그리고는 날카로워진 손톱 끝을 매만지며 혀를 찼다. 그 모습이 너무도 자연스러워서, 나도 모르게 그에게 손을 맡겼다.

원작에서 카르시안은 후작저 사람들 때문에 감정을 잃기 전, 굉장히 섬세한 아이였다. 그래서 나중에 여주인 공주로 인해 감정을 되찾자 굉장히 섬세하고 다정다감한 집착남이 되지.

내 여자에겐 섬세하고 자상하게, 적에게는 섬세하고 가차 없게.

꽁꽁 숨은 적들마저 축출하는 장면은 공포영화 저리가라였다.

카르시안은 무의식중에 내 손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건지, 개의치 않는 얼굴로 말했다.

“그런데 삐로리의 목걸이에 달린 펜던트는 뭐야? 아까부터 엄청 반짝거리던데.”

삐로리가 움직일 때마다 보석 같은 구슬이 달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나도 모르겠어. 그루안 상단주가 선물해 준 건데, 내가 삐로리랑 친해지면 도움이 될 거라고 했어.”

“새랑 친해지면, 저 펜던트가 도움이 된다고?”

카르시안이 의아하다는 듯 되물었다.

그는 곰곰이 뭔가를 생각하더니, 이내 손가락을 튕겼다.

“알겠다. 삐로리, 이리 와 봐.”

카르시안이 손을 내밀자, 테이블 위를 걸어 다니던 삐로리가 매서운 눈빛을 보냈다.

‘내가 개냐! 부르면 가게!’

하지만 카르시안은 삐로리의 표정을 읽지 못하여 어서 날아오라며 종용하기만 했다.

나는 카르시안의 얼굴에 비친 깨달음의 빛을 기민하게 읽었다.

“삐로리, 카르시안에게 가 봐.”

내 말에 삐로리는 ‘라티아, 너마저……!’ 하고 충격을 받았지만 어쩔 수 없이 카르시안에게 날아갔다.

카르시안은 제 손가락을 꽉 움켜쥐고 앉은 삐로리의 목걸이를 살펴봤다.

“역시.”

그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라티아.”

“응?”

“너 나한테 빚진 거야.”

응? 이게 무슨 소리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자, 카르시안이 내게 속삭였다. 나는 그의 말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 이 방법이라면……!”

“나한테 진 빚 잊으면 안 돼.”

카르시안이 키득거렸다. 나는 큼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절대 안 잊을게! 평생 너한테 갚을게!”

터져 나오는 기쁨에 나도 모르게 헤헤, 바보처럼 웃었다.

순간 카르시안의 눈동자가 일렁거렸지만, 그건 아주 짧은 찰나였다.

* * *

사흘 뒤, 아버지는 “이만하면 반성했겠지.”라며 물 한 컵을 보냈다. 딱 목을 축일 정도의 양이었다. 따듯한 미음도 아니고 찬물 한 잔을 주며 선심 쓰듯 말하는 모습엔 기가 찼다.

이를 본 삐로리는 격노하여 머리털을 죄다 뽑아 대머리로 만들겠다고 씩씩거렸다. 삐로리를 달래느라 저절로 분노가 가라앉았다.

덕분에 차갑게 식은 이성으로 생각할 수 있었다.

분명 내게 벌을 내린 날, 마법약이 그대로 서재에 있는 것을 확인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자존심이 무척 세다. 자신의 착각이라며 한 번 내린 형벌을 거둘 리가 없었다.

즉, 아버지는 내 잘못이 아니란 걸 알면서도 일부러 3일이나 굶겼다는 것이다.

그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카르시안과 삐로리가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굉장히 힘들었을 것이다.

삐로리는 그간 몰래 지하를 넘나들며 수잔의 이야기를 ‘말’해 줬다. 그리고 이틀이 더 지난 오늘, 나는 아버지의 호출을 받았다.

“후작님께선 빨리 데려오라고 하셨지만…… 그 전에 씻으셔야겠군요.”

하녀가 나를 보며 코를 잡았다. 마치 나에게서 악취라도 난다는 것처럼 말이다.

웃겨, 진짜.

나는 그동안 카르시안과 삐로리의 도움으로 식사는 물론 씻는 것까지 해결했다. 비록 수잔이 수발을 들어 줬을 때처럼 완벽하진 않지만, 적어도 악취는 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어서 씻으세요.”

하녀는 욕조에 찬물을 받고는 고개를 까딱거렸다. 세숫물도 따로 없었다. 내게는 목욕물조차 아깝다는 듯 보였다.

나는 하녀를 쏘아보다가 홀로 몸을 씻었다. 찬물로 씻어서 그런지 오한이 들었지만 그럴수록 이를 악물고 견뎌 냈다.

내가 기필코 이 더럽고 치사한 집안에서 탈출하고 만다. 그래서 그들이 처형당하는 날, 홀로 살아남으리라.

후작저 사람들의 괴롭힘은 나의 복수심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어 주는 담금질밖에 되지 않았다.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아버지가 들어왔다. 아버지는 마땅한 인사도 없었지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올렸다. 그러나 아버지는 나를 무시하고 말했다.

“내가 오늘 너를 왜 이 자리에 불렀는지, 알고 있느냐.”

그야 나에게 불법 격투장 관리를 맡기기 위해서겠지.

지난 생에서 아버지는 내가 산수를 잘한다는 걸 알자마자 바로 일을 시켰다. 원래라면 아버지가 시간을 들여서 해야 하는 단순 계산을 내게 맡긴 것이다. 워낙 단순한 일이어서 사람을 고용하기도 애매하여 늘 아버지의 시간을 잡아먹던 일 말이다.

나는 아버지에게 칭찬과 인정을 받고 싶었다. 그래서 열심히 했고, 혹여나 틀릴까 봐 밤잠도 줄여 가며 몇 번이고 검산했다. 이후 내가 단 한 번도 실수를 하지 않자, 아버지는 내게 점점 더 어려운 일을 맡기기 시작했다.

내가 죽을 즈음엔 판돈 관리까지 맡고 있었다. 고작 10살의 나이로 말이다. 하지만 이건 ‘내’가 아는 거지, ‘이번 생의 라티아’가 아는 게 아니다. 그렇기에 나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요. 잘 모르겠어요.”

찬물로 씻어서 그런 걸까? 오한 탓에 며칠이나 굶은 사람처럼 가냘픈 목소리가 나왔다.

그에 아버지가 흡족한 얼굴로 말했다.

“요즘 그루안 상단주와 자주 만난다지?”

“……네?”

순간 너무 놀라 눈까지 크게 뜨고 물었다.

아니, 이 주제가 왜 여기서 나오지?

셀트론과 몰래 만난 게 아니니, 아버지의 귀에 소식이 들어갔으리라는 건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루안 상단은 워낙 한미하고, 드루이드의 능력을 깨우친 지금도 눈에 띄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내가 아직 아버지와 함께 일을 하는 게 아니라서, 그에게 전해 준 정보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아버지의 눈에는 그저 ‘사재조차 없는 사생아와 다 쓰러져 가는 상단주의 만남’에 불과할 터.

실제로 그렇기 때문에 그간 방해하지 않았던 게 아닌가? 그런데 불법 격투장 일을 맡겨야 하는 때에 그루안 상단의 이야기를 꺼내다니?

나는 얼떨떨 했지만 이내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맹한 표정으로 아버지의 말을 기다렸다. 상대가 방심할수록 정보를 더 많이 풀 테니까.

그리고 나의 이런 생각은 정확히 적중했다.

“너는 글라델리스 후작가의 장녀다.”

아버지가 자상한 척 꾸며 낸 목소리로 말을 시작했다.

“그런 네가 다른 상단도 아니고 그깟 그루안 상단과 어울린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하겠느냐.”

“…….”

“글라델리스로서의 자각도 없이 굴어 가문에 누를 끼쳐서야 되겠느냐.”

아버지가 훈계하듯 엄하게 말했다. 그에 나는 풀 죽은 아이처럼 고개를 숙였다.

얌전한 모습에 아버지는 잠시간 나를 바라보다 말했다.

“너는 지나치게 순수하고 또 순진한 구석이 있지.”

멍청하다는 말을 이렇게 돌려서 말하는 것도 재능이다.

“분명 그 사기꾼 같은 놈이 너를 꾀어냈을 터.”

힐끔 바라본 아버지의 푸른 눈동자가 탐욕스럽게 빛났다.

아버지가 말했다.

“듣자 하니 처음엔 약초를 팔러 왔다고 했다던데, 그리고 네가 그것을 구매하고자 했고.”

“네, 맞아요.”

“네가 약초가 필요할 일이 무어가 있느냐? 그루안 상단에서 파는 약초라면 후원에도 있지 않느냐.”

이때 아버지가 어째서 그루안 상단의 이야기를 꺼냈는지 알아차렸다.

나는 당시 기사들에게 ‘효능이 뛰어난 약초’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셀트론을 내 방으로 데려갔지.

“‘효능이 뛰어난 약초’라……. 그렇다면 후원에서 자라는 약초는 효능이 약하단 말이냐?”

“네.”

나의 대답에 아버지의 푸른 눈동자가 음험하게 빛났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대체 무엇이지?”

나를 추궁하는 목소리는 아이를 어르는 것처럼 다정하면서도 날카로웠다.

아무래도 아버지는 나와 셀트론 사이에서 오고 간 이야기가 궁금한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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