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죽일 남주를 길들여버렸다-16화 (16/186)

16화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차라리 삐로리를 키우고 있다고 말할 걸 그랬다.

마법약을 들킬 바엔 삐로리를 들키는 게 나았으니까.

삐로리는 방생하겠다고 해 놓고 밖에서 만나면 그만이잖아. 그에 비해 수잔은……. 아니, 아니야.

나는 자꾸만 땅을 파고 들어가려는 기분을 애써 갈무리했다.

그래, 이미 물은 엎질러졌다. 계속해서 이랬더라면, 저랬더라면 하고 생각해 봐야 좋을 건 하나도 없었다. 빨리 이 위기를 벗어날 대책을 강구해야 했다.

나는 여전히 내게 애교를 부리고 있는 삐로리를 보다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삐로리가 말을 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삐로리는 나의 무고를 증명해 줄 수 없다. 문득 든 생각에 실소했다.

“내가 정말 어떻게 됐나 봐.”

사람도 아니고 새의 도움을 기대하다니.

내가 평범하게 10살에 죽어서 회귀한 아이라면 모를까, 나는 이 원작을 읽은 지식까지 있는 몸이었다.

환생과 회귀를 했으니까. 그런데도 이렇게 터무니없는 생각이라니.

역으로 말하면 그만큼 절박하단 뜻이기도 했다.

문득 내가 나쁜 생각을 하면 삐로리가 아프다는 게 떠올랐다.

“어떻게 해야 할까, 삐로리.”

“삐록?”

“삐로리는 내게 나쁜 짓을 하면 안 된다고 말했지만.”

아니, 내가 표정으로 그렇게 읽은 거지만.

“나는 꼭 복수를 해야겠어.”

“삐…….”

“그러지 않으면 나는 수잔을 볼 면목이 없어. 그리고 앞으로 살아남지도 못할 거야.”

삐로리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을 깜빡거렸지만, 나를 말리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차분하게 가라앉은 표정으로 나를 가늠했다. 그러다 이내 총총 걸어서 내 어깨까지 올라왔다.

“삐로리?”

삐로리는 넓은 날개로 내 옆통수를 토닥거렸다.

“삐로로.”

마치 ‘너의 죄를 사하노라.’ 하고 나의 복수를 응원이라도 해 주는 것처럼 말이다.

* * *

창밖으론 어느새 어둑한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꼬르륵, 배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렸지만 아무도 내게 밥을 가져다주지 않았다. 나는 그동안 삐로리와 함께 소파에 무기력하게 앉아 있었다. 꼬르륵, 다시 뱃고동이 우렁차게 울었다. 그에 얌전히 있던 삐로리는 별안간 격분했다.

“삑! 삐비빅!”

그리고는 문으로 날아가 발톱으로 손잡이를 마구 긁어 댔다. 그러나 굳게 닫힌 문밖에선 그 어떤 인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그런 삐로리를 불러들였다.

“삐로리, 괜히 힘 빼지 마.”

“삐르르!”

‘하지만 저것들이!’ 하고 삐로리가 화를 냈다.

“난 됐으니까 너라도 나가서 뭐라도 먹고 와.”

“삐?”

“창문으로 나가면 돼. 정원에 나무 열매나 지렁이가 있을 거야.”

“삐이…….”

‘내가 너를 두고 어떻게 나가.’ 하듯 삐로리의 표정이 잠시 시무룩해졌다. 나는 그런 삐로리가 귀엽고 기특해서 힘없이 웃었다.

“나는 괜찮으니까 어서.”

잠시 고민하던 삐로리는 ‘내가 열매라도 좀 가져올게.’ 하듯 창밖으로 날아갔다.

그런데 이때였다.

포르르 날아가던 삐로리가 텁. 난데없는 침입자에 의해 붙잡힌 것이다.

“삑!”

“……새?”

침입자는 삐로리를 제 코앞까지 가져다 댔다. 나는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카, 카르시안?”

창문을 통해서 침입한 사람은 다름 아닌 카르시안이었다.

카르시안의 뒤로 밝게 뜬 달이 보였다. 푸르스름한 달밤의 빛이 고스란히 카르시안의 잘생긴 얼굴을 비쳤다. 아직 10살밖에 되지 않아 앳됐지만, 과연 남자주인공이다. 어슴푸레한 빛에서 미친 미모의 진가가 발휘됐다.

나는 카르시안이 삐로리를 요리조리 돌려보고 있는 모습을 멍하니 지켜봤다. 아니, 시선을 빼앗겼다는 말이 맞았다.

“삐이이익!”

‘구경만 하지 말고 도우라고!’ 삐로리가 그렇게 외친 후에야 간신히 정신을 차렸으니까.

“카, 카르시안. 삐로리…… 아니, 그 새를 놓아줘. 아파하잖아.”

“새를 키우고 있는 줄은 몰랐는데.”

“얼마 안 됐어.”

내 말에 카르시안은 삐로리를 놓아줬다.

삐로리는 ‘이 괘씸한 녀석!’ 하듯 날개로 카르시안의 손을 찰싹 때리고 내게 돌아왔다. 손가락을 내밀자 거기에 앉은 삐로리가 재잘거렸다.

“삐빅, 삐르르! 삐르르!”

마치 왜 진작 구해 주지 않고 보고만 있었냐고 항의하는 것 같았다. 나는 삐로리에게 사과하며 카르시안을 돌아봤다.

“무슨 일…… 아.”

하마터면 바보같이 무슨 일이냐고 물을 뻔했다. 내가 마법약을 훔쳤다는 이유로 방에 갇혔다는 것을 알았으니 굳이 창문으로 온 것이리라.

나는 서랍에 넣어 둔 편지지를 꺼내 건넸다.

“자, 이걸 받으러 온 거지?”

마법약을 갖고 있는 걸 들켰다는 말은 내가 편지지 복원을 마쳤을 가능성이 있다는 뜻.

카르시안은 편지를 받으러 온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내 예상과 달리 카르시안은 좀처럼 편지지를 받지 않았다. 오히려 ‘아, 이게 있었지.’ 하고 이제야 깨달은 표정이었다.

카르시안이 편지지를 챙겨 주머니에 넣으며 말했다.

“이것도 있기는 해.”

“어?”

“하지만 편지지 때문만은 아니야.”

“그게 무슨 말이야?”

“물 한 모금도 먹지 못하는 벌을 받았다며.”

“아…….”

설마 나를 놀리러 온 건가? 그렇게 쪼잔하겐 안 봤는…… 휴, 아니야.

나는 카르시안에게 저지른 잘못이 있다. 내가 베티에게 복수를 하고 싶은 만큼, 카르시안도 내게 복수를 하고 싶을 터.

진짜 나의 잘못을 뉘우치기 위해서는 카르시안의 복수도 달게 받아야지.

나는 체념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카르시안은 나를 놀리는 대신 뜻밖의 행동을 했다.

“자.”

“……어?”

불쑥 빵을 내민 것이다.

“먹어. 배고플 거 아냐.”

나는 멍하니 카르시안이 쥐고 있는 빵을 바라봤다.

“삑…….”

삐로리도 놀란 눈치였다. 작은 소리에, 카르시안은 반대쪽 손으로 주머니에서 아직 덜 여문 열매를 꺼냈다.

“이건 디저트랍시고 가져온 건데, 네 애완 새에게 양보해야겠다.”

“삐륵!”

삐로리는 ‘누가 애완 새야!’ 하듯 항의했지만, 곧바로 열매가 있는 카르시안의 손으로 포르르 날아갔다. 나는 여전히 카르시안이 건넨 빵만 보고 있었다.

카르시안이 머뭇거리다 말했다.

“아니면 수프 없이는 먹기 싫어? ……쳇, 수프는 훔치기 어려운데.”

카르시안은 곤란하다는 듯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럼 기다려 봐. 내가 훔쳐 올…….”

“아니, 아니야.”

나는 당장이라도 몸을 돌릴 듯 구는 카르시안의 손을 꼭 잡았다. 두 손으로 나보다 단단한 손목을 움켜쥐듯 잡고는 내 쪽으로 당겼다.

“그런 게…… 아니야.”

어째선지 목이 메었다. 더 정확히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감정은 명백한 후회였다.

아, 나는 이렇게 다정한 아이를 괴롭혔던 거구나. 이렇게 자상한 카르시안을 못살게 굴었던 거구나.

나는 목이 졸린 것 같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는…… 너에게 이걸 받을 자격이 없어.”

“…….”

“미안해.”

카르시안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가슴이 수런거리고 위장이 울렁거렸다.

어머니의 사랑을 받기 위해 그를 괴롭혔던 날들은 물론이고, 막연히 ‘살기 위해서 앞으로 잘해 줘야지!’라고 결심했던 날들과 살아남기 위해서 그를 이용하자고 다짐했던 순간이 수치스러워서 몸 둘 바를 모르겠다.

가만히 고개만 푹 숙이고 있자니 카르시안이 말했다.

“그럼 버려?”

“뭐? 그, 그런 뜻은 아닌……!”

깜짝 놀라 고개를 드니, 그 앞엔 찡그리듯 웃고 있는 카르시안이 있었다. 그는 나의 두 손에 붙잡힌 제 손목을 내려다보다 빵을 받으라는 듯 까딱거렸다.

“그럼 받아.”

“내가, 내가 그래도…….”

“버린다?”

무섭지 않은 협박에도 나는 황급히 빵을 받아 들었다. 그러며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워.”

“뭐?”

“……고맙다고.”

울음기 젖은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카르시안의 얼굴을 볼 용기가 없다.

솔직히 나는 자만하고 있었다. 편지지만 해도 그랬다.

그가 나를 믿지 못하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 한편으로는 내 말대로 따를 거라 생각했다. 왜냐면 카르시안에게 별다른 선택지가 없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나는 카르시안의 절박함을 이용했다. 이렇게 다정한 사람을, 나는 이용했다는 말이다.

내 코가 석 자라는 말로도, 살아남기 위해서라는 말로도 도저히 스스로가 용서가 되지 않았다.

이런 생각에 가만히 고개만 숙이고 있는데, 카르시안이 말했다.

“뭐가 그렇게 미안하고 고맙냐.”

카르시안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리고는 고개를 들어 보라는 듯 반대쪽 손으로 내 볼을 톡 건드렸다.

그 손길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그는 달빛을 등진 채 내게 씩 웃어 줬다.

“빚, 갚은 거야.”

카르시안은 정말 끝까지 다정했다. 하지만 카르시안의 웃음은 오래 가지 못했다.

“왜 울어.”

내 눈가에 그렁그렁하게 울음이 들어찼기 때문이다.

“그렇게 배고팠어? 아니면…… 어디가 아픈가?”

고된 마구간 일을 해서 도저히 백작가의 영식이라고는 볼 수 없는 거친 손가락이 눈가를 살살 쓰다듬었다. 그의 손가락에 물기가 묻어났다.

나는 눈가에 닿은 이 거칠함을 평생 기억하자고 다짐했다. 그래서 미래에 카르시안이 아버지를 만나서 행복해져도, 그에게 은혜를 갚자고 생각했다. 그리고 꼭 내가 시한부가 아니라는 것도 밝히자고 다짐했다.

“카르시안.”

“왜?”

“내가 앞으로, 너 진짜 행복하게만 해 줄게.”

너, 나중에 아내가 될 공주랑 한 번 대판 싸우는데 내가 그거 도와줄게. 그냥 쏠랑 도망 안 가고, 그거 해결 방법 알려 주고 떠날게.

나는 그를 결연하게 쳐다봤다.

카르시안은 그런 나를 가만히 바라보다, 내 이마를 톡 건드렸다.

“빵이나 먹어.”

아, 안 믿네.

하지만 나 진짜거든, 나 앞으로 너 무조건 행복하게만 해 줄 거거든.

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카르시안의 말대로 얌전히 빵을 베어 물었다.

“……맛있다.”

다 식어 딱딱해진 빵이었지만 여전히 맛있었다. 내가 배가 무척이나 고파서 그런 건지, 아니면 이 빵을 가져다준 카르시안의 마음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카르시안은 허겁지겁 빵을 먹는 나를 한참이나 바라보기만 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