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베티와 함께 달려가면서 알버스는 바쁘게 생각했다. 어차피 서재에 걸린 마법을 확인하려면 마법사가 필요했다.
‘그 전에 라티아가 훔친 것이 무엇인지 알아둬야 해!’
만약 그것이 다른 귀족의 치부책이거나 저당을 잡은 물건이라면 여러모로 골치 아파진다.
‘제아무리 가족이라 해도 내가 잡은 귀족들의 약점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아서 좋을 건 하나도 없어!’
알버스는 레이시나의 방에 도착하자마자 노크도 없이 문을 벌컥 열었다.
“레이시나!”
“후작님, 어서 오세요.”
레이시나는 얼른 알버스의 품에 안겨들었다. 순간 베티의 눈썹이 움찔거렸지만 그것을 알아차린 이는 아무도 없었다.
레이시나가 가냘프게 말했다.
“바쁘신 걸 알지만 저로서는 도무지 당해낼 수가 없어요. 어떻게 후작님의 서재에 함부로 들어갈 생각을 다 했는지…….”
알버스는 사색이 된 얼굴로 무릎을 꿇고 있는 라티아를 휙 돌아봤다. 움찔, 라티아의 작은 어깨가 떨렸다.
“심지어 라티아는 자신의 잘못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지 뭐예요.”
“저, 저는 정말……!”
“또, 또! 또 거짓말! 어떻게 입만 열면 거짓말이니?”
라티아가 뭐라 말하려 했지만, 레이시나가 사납게 일갈했다.
알버스는 얼른 라티아가 훔친 물건부터 확인하려 들었다. 다행히 레이시나에게 따져 묻기 전에, 그의 눈에 물건이 들어왔다.
라티아의 무릎 앞에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세이렌의 마법약이 말이다!
‘저건……!’
세이렌의 마법약은 무척이나 고가인 데다가 황성에서 직접 관리를 하고 있었다. 라티아 같은 어린아이가 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그리고 알버스는 라움디셀 백작에게서 받은 마법약을 다름 아닌 서재에 보관하고 있었다.
그것을 깨닫자마자, 알버스는 화산이 터지듯 분노했다.
“라티아아아!”
알버스가 내지른 쩌렁쩌렁한 고성이 레이시나의 방을 터트릴 듯 가득 메웠다. 그의 품에 안겨있던 레이시나도 화들짝 놀랄 정도로 엄청난 목소리였다.
“감히 나의 서재에 함부로 들어오다니!”
그는 레이시나를 밀치고 무릎을 꿇은 채 벌벌 떨고 있는 라티아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겁에 질린 라티아의 멱살을 억세게 잡아 일으켜 세웠다.
“으윽……!”
라티아가 고통으로 얼굴을 찌푸렸지만, 진노한 알버스의 눈엔 보이지 않았다.
“천한 태생을 숨길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는구나!”
천한 태생이라니!
그 말은 라티아가 사생아라고 공공연하게 발표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라티아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은 물론이고,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이 숨을 삼켰다.
알버스가 소리쳤다.
“어떻게 도둑질을 할 수가 있어, 네가 숨어든 곳이 어딘지나 아는 것이냐!”
“저, 저는, 아, 아버지…….”
라티아는 변명하려 했으나 알버스는 그녀에게 변명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라티아! 네가 이토록 천박한 핏줄을 억누르지 못한 건 모두 너를 잘못 가르친 유모 탓이겠지!”
알버스는 라티아가 유모인 수잔을 무척이나 잘 따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물건을 훔쳐 놓고 입을 꾹 다무는 이는 고문해 봐야 소용이 없다.
‘소중한 것을 망가트려야 비로소 입을 연다.’
이것은 아이라고 해서 다르지도 않을 터였다.
“수잔을 매질하고 지하 감옥에 넣어둬라! 그리고 라티아는 제 방에 가둬! 사실대로 말하기 전까지는 물 한 모금도 주지 마!”
알버스의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라티아와 수잔의 얼굴엔 절망감이 일었다. 반대로 레이시나와 베티의 얼굴엔 화색이 돌았다.
이후 알버스는 라티아의 발치에서 굴러다니는 마법약을 들고 황급히 서재로 향했다.
‘라티아가 더 훔친 것이 있거나, 들춰 본 게 있는지 확인해야 해!’
하지만 막상 돌아온 서재에는.
“……이게 어찌 된 영문이지?”
라티아가 훔쳤을 게 분명한 세이렌의 마법약이 그대로 보관되어 있었다.
알버스는 혹시나 싶어서 마법사를 불러 서재 안의 발자취를 검사했다. 하지만 아무리 검사해도 라티아는 물론이고 수잔의 발자취도 검출되지 않았다.
“서재에 있는 발자국은 오로지 후작님과 하녀 한 명뿐입니다.”
“내가 심부름 때문에 부른 하녀일걸세.”
알버스의 말에 마법사는 속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다기엔 너무 자주 드나들었는데…… 뭐, 상관없겠지.’
큰 저택이다 보니 심부름 거리가 많은 걸 수도 있다. 마법사는 깊게 생각하지 않고 돌아갔다.
이후 알버스는 한동안 라움디셀 백작이 주고 간 마법약과 라티아에게서 뺏은 마법약을 번갈아 봤다. 그러다 어깨를 한 번 으쓱이고는 다시 서랍에 마법약을 넣었다.
“어차피 어디선가 훔친 게 분명해. 사재조차 없으면서 이런 값비싼 약을 어디서 구했겠어?”
비록 서재에 들어선 건 아니지만, 남의 것을 탐한 죄는 컸다. 알버스는 라티아와 수잔에게 지시한 처벌을 거두지 않았다.
* * *
무슨 정신으로 방에 돌아왔는지 모르겠다.
나는 소파에 웅크려 앉은 채 입술을 사리물었다. 어머니의 방에서부터 아무렇게나 끌려오느라 접질린 발목이 욱신거려서가 아니다.
“지금쯤 수잔은…….”
베티는 수잔을 질질 끌고 가며 비웃었다.
‘그러게 줄을 잘 탔어야지.’
설상가상으로 수잔을 매질할 사람도 베티였다. 분명 성한 곳이 없으리라.
그 고된 몸을 이끌고 지하라는 차가운 곳에 갇힐 수잔을 상상하자 내 자신이 무척이나 미워졌다.
“나 때문이야……. 내가…… 내가 약을 더 꼼꼼히 숨겼더라면…….”
나는 무릎을 감싸 안은 팔에 얼굴을 묻었다. 베티가 계속해서 어떤 식으로든 움직일 건 알았다.
하지만 이렇게 빨리 움직일 줄이야……. 그것도 이렇게 최악의 방법으로 나를 몰아붙일 줄이야……!
나는 웅크린 팔에 열이 받아 뜨끈뜨끈한 이마를 문지르며 이를 악물었다.
“베티가 내 방에 손까지 대고 있었을 줄은 몰랐어.”
베티가 탐욕스럽다는 건 알고 있었다.
‘아가씨는 창백하고 허옇기만 해서 금으로 장식된 목걸이는 어울리지 않아요. 이런 건 건강한 빛의 피부를 가진 저한테나 어울리죠.’
은근슬쩍 값비싼 장신구를 제가 걸어 보기도 했고.
‘어머, 어머. 저는 어쩜 이렇게 화려한 게 잘 어울리는 걸까요? 아가씨가 보기에도 제게 무척이나 잘 어울리지 않나요?’
내게 그것을 달라고 눈치를 주기도 했다.
회귀 전, 나는 카르시안을 괴롭히며 베티와 친해졌고 기쁜 마음으로 베티에게 장신구를 선물하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주는 것으로도 모자라 도둑질까지 하고 있었을 줄은 몰랐다.
아니, 나는 정말 몰랐을까?
조금만 깊게 생각하면 베티가 나쁜 손버릇을 갖고 있을 거라는 건 충분히 유추할 수 있었다.
“멍청한 라티아…….”
나를 탓하는 목소리에 자조적인 울음이 섞여들었다.
나는 왜 이렇게 멍청하지?
기껏 회귀를 했건만, 달라진 게 없다. 이전 생에도, 이번 생에도 멍청하긴 매한가지였다.
“삐륵…….”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것을 감지한 걸까?
삐로리가 걱정스럽게 울었다.
그러고 보니 다녀와서 맛있는 걸 준다고 했는데…….
나는 웅크렸던 고개를 들어 올렸다. 바구니 밖으로 빼꼼 삐로리가 흑요석 같은 검은 눈동자로 눈치를 보고 있었다.
“삐로리, 미안해.”
“삐?”
“맛있는 거, 못 줘.”
“삐이?”
“아버지가 내게 물도 한 모금 주지 말라고 명령했거든.”
나는 자조적으로 웃었다. 순간 삐로리의 몸이 홀쭉하게 늘어났다. 마치 ‘그게 무슨 개소리야?!’ 하고 놀란 것처럼 말이다.
새의 표정에서 ‘개소리’라는 말이 읽히다니, 나도 모르게 짧은 웃음이 터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나는 다시금 지독한 무력감과 우울감에 빠져야 했다.
웅크린 다리를 감싸 안은 팔에 얼굴을 묻은 때였다.
“삐륵!”
삐로리가 날아와 내 팔뚝 위에 앉았다. 나는 시무룩한 얼굴로 삐로리를 응시했다.
‘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거야?’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는 삐로리는 마치 그렇게 물어보고 있는 것 같았다.
사람도 아니고 새의 표정까지 읽는 독심술이라니.
어쩌면 착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나는 상대가 누구라도 좋으니 답답한 마음을 토로하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삐로리에게 투정을 부리듯 털어놨다.
“나 때문에 수잔이 매질을 당하고 있어.”
“삐르륵?”
“베티라는 하녀가 나를 함정에 빠트렸어.”
“삐륵…….”
뭔가 짐작이 가는 게 있는 듯 삐로리의 새까만 눈동자에 안광이 사라졌다. 나는 삐로리의 작은 머리통을 손가락 끝으로 슬슬 문지르며 말했다.
“베티가 내 방에 몰래 들어와서 마법약을 훔쳐 갔어.”
“삐르르, 삐, 삐익!”
삐로리가 분통을 터트리듯 발을 동동거렸다. ‘역시!’라는 표정이 고스란히 읽혔다. 그러고 보니 삐로리는 방에 있었을 테니 베티의 도둑질을 다 봤겠구나.
“왜 베티가 물건을 훔치도록 놔두고 있었어? 네가 날갯짓을 하든, 하다못해 쪼아서 내쫓기라도 했으면……!”
괜히 모난 마음이 들어 삐로리에게 책임을 전가했다. 그러나 울컥 솟은 감정은 빠르게 가라앉았다.
“……그래. 맞아. 너를 키우는 걸 들키면 안 되니까 내가 숨겨 놨었지. 넌 내가 곤란에 처하지 않기 위해 숨어 있었을 뿐인데.”
역시 나는 악역 조연이 맞았다. 그러지 않고서야 매사에 이렇게 비뚠 생각이 들 리가 없었다.
나는 눅눅해진 목소리로 사과했다.
“미안해. 상황이 이렇게 되니까 괜히 남 탓을 하게 되네.”
삐로리는 괜찮다고, 더 저를 탓하라고, 제 잘못이라는 표정으로 내 손가락이 머리를 부볐다. 그러나 그건 정답도, 해답도 아니었기에 더 삐로리를 탓하지는 않았다.
삐로리에게 한 차례 마음을 털어놨음에도 울적한 기분이 가시지 않았다.
“하아.”
나는 묵직한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