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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죽일 남주를 길들여버렸다-14화 (14/186)

14화

이럴 수가.

나도 모르게 속으로 좌절했다.

마법약만 내려다보고 있는 내게, 어머니가 조소하듯 말했다.

“그래. 그럼 이 약이 어디에 있던 물건인지도 알겠지?”

그 순간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번쩍 들었다.

……설마.

어머니는 부채로 입가를 가린 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머니의 새하얀 얼굴이 오늘따라 무척 악독해 보였다.

“응? 알고 있지 않니, 라티아?”

눈꼬리가 부드럽게 휘었지만, 나에겐 그저 두렵기 그지없는 악녀의 얼굴이었다.

나는 일단 무릎을 꿇고 있는 이 자세가 부당하다고 말하려고 했다. 제아무리 잘못을 추궁하는 자리라고는 해도 나는 후작 영애다. 비록 어머니의 배로 낳은 친딸은 아니지만 아버지가 공인한 장녀란 말이다.

이런 나를 하녀들이 다 보는 앞에서 무릎을 꿇리다니!?

“라티아, 대답을 해야지.”

“아…….”

하지만 저 무시무시한 얼굴을 보니 좀처럼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알맹이는 달라졌다고 하더라도, ‘라티아’의 몸은 여전히 어머니의 사랑을 갈구하고 있었다. 어머니에게 직접 손찌검을 당했을 때의 두려움도 기억하고 있었다.

엄마한테 혼나기 싫어, 사랑받고 싶어.

그런 마음이 자꾸만 말문을 막히게 했다. 나는 간신히 입술만 달싹거렸다.

“말 좀 해 보려무나, 라티아.”

그에 어머니가 더 이상은 기다려주지 않겠다는 듯 내게 한 발자국 다가왔다. 또 얻어맞을까 봐 흠칫 몸이 떨렸다.

하, 세상천지 손찌검에 익숙한 후작 영애가 어디에 있어? 내 몸이 이렇게 겁에 질린 게 내가 내 밥그릇도 못 챙기고 살았다는 증거야. 이젠 그러지 않을 거잖아, 라티아. 버티고 살아남아서, 무시당했던 만큼 떵떵거리며 살 거잖아.

나는 오로지 그 생각만으로, 내 몸이 기억하는 두려움을 이겨냈다. 나는 눈을 부릅뜨고 어머니에게 대꾸했다.

“물론 알고 있어요.”

카르시안의 아버지, 라움디셀 백작에게 받은 마법약은 내 아버지의 서재에 있다.

“하지만 어머니, 이 약은 아버지의 서재에서 가져온 게 아니에요. 결단코 훔친 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나는 무고하다.

나는 한 점 흐트러짐 없는 표정으로 어머니를 올려다봤다. 그에 어머니는 잠시 움찔거렸지만, 이내 부채를 탁 소리 나게 접었다.

“그래?”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는 목소리는 심기가 단단히 뒤틀린 듯 보였다.

“그럼 이 약을, 네가 어디서 구했지?”

“그건…….”

다시금 말문이 막혔다.

그루안 상단주가 예리엘 만물 상단과 거래를 트게 되어서…… 나에게 선물했다. 그렇게 말하면 어머니는 분명 이렇게 물을 것이다.

‘그루안 상단주가 너에게 왜 선물을 하지?’

그러면 그루안 상단주가 사실은 드루이드의 후손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서, 도와줬다는 말을 해야 했다.

그럼 어머니는 또 묻겠지.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았니?’

책에서 읽었다고 둘러대어도 어머니에게는 통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면 드루이드의 야사는 수잔이 저택 밖 도서관에서 몰래 대여해 온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은 사실 후작저에도 있었다. 바로 아버지의 서재에 말이다.

최악의 경우 아버지의 서재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꼴이 될 수도 있다.

그렇다고 원작을 읽어서 알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는데…….

나는 빤한 시선을 보내는 어머니를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좀처럼 입을 열지 못하자, 어머니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스쳤다. 이내 어머니는 혼절할 것 같다는 듯이 휘청거리며 비명처럼 외쳤다.

“세상에. 라티아, 라티아, 라티아!”

눈치 빠른 베티가 얼른 의자를 가져왔고, 어머니는 지친 사람처럼 풀썩 주저앉았다.

“네가 성정이 폭력적이고 모진 아이라는 것은 내가 진즉에 알고 있었지만, 설마 도둑질까지 할 줄이야!”

어머니는 딸에게 할 수 없는 폭언을 늘어놓으면서도, 자신이 피해자인 것처럼 슬픈 표정을 지었다.

“이 어미가 대체 무엇을 잘못한 걸까? 무엇을 잘못했기에 이런 시련이 닥친 거니? 아아, 베티. 나는 잘 모르겠구나.”

“마님, 마님께서는 잘못하신 게 하나도 없으세요.”

“정말 그러니?”

“네, 당연하죠. 모든 잘못은 라티아 아가씨의 탓인걸요. 감히 후작님의 서재에 숨어드는 것으로도 모자라, 물건을 훔치다니요?”

베티가 나를 내려다보며 씩 웃었다. 그 섬뜩한 웃음에, 나는 일이 어떻게 된 건지 알 수 있었다. 베티가 내 방에 숨어들었다가 마법약을 발견한 모양이었다.

뒤에서 나를 따라 무릎을 꿇고 있는 수잔도 이를 알아차렸는지,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어머니는 베티의 아부를 들으며 나를 내려다봤다.

“라티아, 네가 이렇게도 못되게 나오니 이 어머니는 더 이상 해줄 수 있는 일이 없구나.”

“…….”

“그리고 후작님의 서재에 숨어든 것은 아무리 너를 사랑하는 어미라 하더라도 감싸줄 수 있는 일이 아니야.”

사랑?

이번엔 기가 차서 말문이 막혔다. 내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어머니는 베티에게 매달리듯 말했다.

“베티? 너만은 나의 이 슬픈 심경을 이해해줄 거야, 그렇지?”

“그럼요. 마님. 저는 언제까지고 마님의 편인걸요.”

“딸이 호되게 혼나는 걸 알면서도, 그것을 선택한다 하더라도?”

“세상엔 사랑의 매라는 말도 있는걸요.”

과연 수족 하녀와 그 주인이다. 어머니와 베티는 쿵짝이 아주 잘 맞았다.

베티의 말을 들은 어머니는 곧장 그녀에게 명령했다.

“후작님을 모시고 오렴.”

솔직히 어머니가 무슨 벌을 내려도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를 호출하다니!

헉, 나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뒤에 있던 수잔도 깜짝 놀라 펄떡거렸다.

어머니는 내가 아버지의 서재에 숨어들다 못해 물건을 훔쳤다는 사실을 아버지에게 말하려는 모양이었다.

나의 아버지인 알버스 글라델리스 후작은 무척이나 냉철하고 이성적인 사람이지만 그만큼 가차 없기도 했다. 또 야욕은 얼마나 많은지, 아버지는 갖고 싶은 것은 무조건 가져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때 톡톡히 도움이 되는 것이 바로 아버지가 서재에 모아 둔 약점이다.

“어, 어머니.”

나는 더듬더듬 어머니를 불렀다.

차라리 어머니에게 혼이 나는 게 훨씬 낫다. 아버지는 자신의 최대 강점이자 약점인 서재에 드나들었다는 나를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나도 모르게 겁에 질려 선처를 바라려고 하였으나.

“다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잘못을 바로잡으려고 하는 거란다.”

나를 비웃으며 부채 끝으로 내 볼을 토닥이는 어머니의 모습에 할 말을 잃었다.

아, 그래.

속이 헛헛했다.

나는 어머니에게 결코 가엾다는 감정을 불러일으킬 만한 존재가 아니지.

엄밀히 말하면 가문의 수치이자 그녀의 치부였다. 왜냐면 나는 레이시나의 ‘난임’ 때문에 밖에서 태어난 아이니까.

원작에서 카르시안의 아버지, 클로드와 다른 귀족이 이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있었다. 그에 의하면 레이시나가 난임이어서 바깥에서 나를, 라티아를 낳아 왔다고 했다. 이후 후작은 라티아를 장녀로 인정했지만, 곧이어 엘레네가 생겼다. 이미 세간에 장녀라고 인정을 한 후라서 라티아를 내치지도 못했다.

어머니는 나를 볼 때마다 자신이 난임이라는 걸 상기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이 시대 사람에게는 지독한 수치였다. 가문의 후사를 잇는 데에 문제가 있는 여인이라는 뜻이었으니까.

어머니가 말했다.

“무엇 하고 있니, 베티. 어서 가서 후작님을 모셔오지 않고.”

“네! 마님. 제가 어서 모시고 올게요.”

베티가 신난 얼굴로 달려 나갔다.

커튼을 쳐서 어두컴컴한 방 안이 더욱 어둡게만 보였다.

마치 나의 미래처럼.

* * *

알버스 글라델리스 후작.

그가 사람들의 약점을 모으기 시작한 건 단순한 이유였다.

‘정보는 돈이 되고, 그 정보가 귀하고 개인적일수록 금액이 커진다.’

이건 알버스의 이념과도 같은 것이었다.

글라델리스 후작가는 대외적으로 아주 귀족적이고 신사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이를 이용해서 사람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었고 호의를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

‘그리고 약점을 캐내기에도 용이했지.’

이렇게 손에 넣은 약점 중에는 황제의 최측근의 것도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숨겨둔 곳이 바로 알버스의 서재였다.

알버스가 창틀을 매만지자 피잉 하고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빛의 잔상 같은 자국이 남았다.

‘들어오기만 해도 발자취가 남는 마법이라……. 역시 황실 마법사들은 머리가 좋군.’

황제가 직접 황실 마법사를 파견해줬다. 이 서재야말로 난공불락의 철옹성이었다.

‘어차피 소멸시키지 못할 정보라면 그 누구에게도 들키지 말라니. 과연 황제는 다르다니까.’

알버스는 서재를 둘러보며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이때였다. 똑똑똑, 알버스의 평화를 깨트리는 노크 소리가 들린 것이다.

“음, 무슨 일이냐.”

알버스는 자신의 평온이 깨진 것이 불쾌해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자 집사장이 아뢰었다.

“후작님, 마님의 하녀가 찾아왔습니다.”

“무슨 일이지?”

“다름이 아니고…… 라티아 아가씨가 큰 잘못을 저질렀으니 꾸중을 해달라고 합니다.”

“라티아가?”

알버스는 의아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 아이는 제가 사생아인 줄도 모르고 레이시나의 사랑을 갈구하느라 눈치를 보기 바쁠 텐데.’

그런 라티아가 레이시나의 심기를 거스를 만큼 큰 잘못을 지었다니?

알버스의 푸른색 눈동자에 호기심이 일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바쁘다. 알아서 해결하도록 해.”

알버스는 아이를 꾸중하는 것에 움직일 정도로 한가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세상은 알버스가 평화롭도록 놔두지 않았다.

“안 돼요, 후작님! 라티아 아가씨가 후작님의 서재에서 물건을 훔쳤단 말이에요!”

하녀가 새된 목소리로 외쳤다. 그대로 소파에 앉으려던 알버스의 몸이 움찔 굳었다.

“이 목소리는…… 베티?”

“정말이에요, 후작님. 그리고 마님께서 증거도 갖고 계세요!”

베티의 말에 알버스는 온몸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섬뜩한 감각을 느꼈다. 이 서재가 뚫린다는 말은 자신이 쓰러진다는 말과 같았으니까! 알버스는 혼비백산하여 문을 벌컥 열었다.

“베티, 나를 레이시나가 있는 곳으로 안내하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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