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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죽일 남주를 길들여버렸다-12화 (12/186)

12화

예리엘 만물 상단의 능력은 정말 엄청났다.

세이렌의 편지지에 쓰이는 마법약은 비싼 것은 둘째치고, 구하는 것도 꽤 어려웠다. 불법적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이유로 황성이 직접 관리하는 마법약 품목 중 하나였으니까.

그런데 그 세이렌의 마법약을 하루 만에 구해다 줬다.

나는 뽀송뽀송하게 잘 마른 편지지에 마법약을 넓게 펴 바르며 중얼거렸다.

“벌써부터 예리엘 상단주와 직통으로 연락하는 사이라니. 그루안 상단은 엄청나게 커질 거야.”

그리고 그건 셀트론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으리라.

그러니까 나한테 이렇게 무한한 신뢰를 갖는 거겠지.

수잔은 마치 모든 미래를 알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나를 가만히 바라봤다.

‘정말 신기해. 아가씨의 생각대로 세상과 상황이 움직이는 것 같아.’ 하는 눈빛이었다.

나는 이쯤에서 수잔의 의심을 한 차례 풀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전생의 ‘내’가 읽은 로판들을 보면 회귀한 여주인공이 멋대로 움직여도 시녀들은 의심하지 않는다. 그저 ‘우리 아가씨가 변했다!’ 하고 기뻐하며 받아들일 뿐이다. 하지만 태어난 순간부터 함께 한 유모는 어떨지 모른다.

갑자기 바뀐 내 모습에 위화감을 느끼고 있을지도 몰라. 어린아이가 할 법한 말로 내 행동을 둘러대 두는 게 좋겠어.

그렇게 생각한 나는 수잔을 돌아보며 말했다.

“있잖아, 수잔.”

“네?”

“내가 비밀 이야기 하나 해 줄까?”

“비밀 이야기요?”

“응. 있잖아, 나한테 천사님이 있어.”

“……네?”

나는 무척이나 재미있는 이야기를 생각한 아이처럼 입가를 가리며 키득키득 웃었다.

“나한테는 수호천사님이 있어. 그래서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두 알려 줘.”

그에 수잔은 황망한 듯 눈만 깜빡거렸다. 그러다 이내 다시 푸근하게 웃었다.

‘때때로 어른스럽게 행동하곤 해도 그래도 아직은 어린아이시구나.’

수잔은 ‘느닷없이 수호천사라니?’ 하고 나를 귀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사실이었다. 그 수호천사는 이 책을 읽은 전생의 ‘나’와 사형당한 회귀 전의 라티아였으니까.

나의 가호가 있는 한, 나는 이번 생에서 절대로 실패하지 않으리란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삐, 삐륵…… 삐르르……. 삑!”

익숙한 새 소리가 경기라도 일으키듯 끊어졌다.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니, 그곳엔.

“어? 저 새는……!”

나와 수잔이 정성껏 보살폈던 아기 새가 게거품을 문 채 기절해 있었다.

* * *

기절한 새, 그의 이름은 ‘금지된 지식을 손에 넣은 자이자 드높은 하늘의 전령이며 떠도는 모든 이들을 긍휼하는 자’다.

주신은 너무 길다며 줄여서 ‘금자’라고 불렀다. 맨 앞 글자와 뒷글자에서 따왔다고 했다. 그리고 금자는 수호천사였다.

정확히는 신이 되기 위해 준비하는 대 수호천사.

이런 수호천사들의 이름은 그들이 쓸 수 있는 능력을 나열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니까 금자로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1. 금지된 지식이 있다.

달리 말하면 그는 이 세상의 것이 아닌 지식을 손에 넣었다는 뜻이다.

2. 드높은 하늘의 전령이다.

금자는 전령인 만큼 신의 말을 들을 수도 있고, 전할 수도 있었다.

마지막 3. 떠도는 모든 이들을 긍휼한다.

긍휼한다는 것은 가엾게 여겨 돌보아 준다는 뜻이다.

그러니 금자를 한 마디로 말하면 똑똑하고, 신의 힘을 기대할 수 있고, 떠도는 자들에게 자비로운 수호천사라는 말이 된다.

수호천사는 다룰 수 있는 능력이 4개가 되면 신이 되는 시험을 치를 자격이 주어진다. 능력을 얻는 방법은 단순하면서도 어려웠는데, 바로 어린아이의 재능을 꽃피우도록 도와주는 것이었다.

수호천사는 아이들의 재능을 알아보는 혜안을 가졌다. 그래서 금자는 라티아를 선택했다. 그녀는 장차 대상단주가 될 거물의 싹이었으니까.

일전에 금자는 라티아가 선한 아이인지 확인하려고 엿보다가 다쳤다. 라티아는 그런 금자를 데려와 정성껏 보살펴 줬고, 이렇게 착한 아이라면 함께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 무렵.

‘라티아가 카르시안을 괴롭히기 시작했지.’

그렇기에 금자는 실망하여 그녀를 떠났다. 수호천사는 어디까지나 ‘천사’ 이기에 선한 마음을 가진 아이하고만 함께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요즘 어쩐지, 기운이 달라졌단 말이지.’

라티아의 마음엔 오로지 선한 기운밖에 없었다. 간간이 ‘욕망’이 엿보이긴 하는데, 이건 생존에 대한 것이지 결코 악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라티아에게 대체 무슨 바람이 불었나 궁금해서 살펴보던 중이었다.

그런데 이때, 라티아가 충격적인 발언을 했다.

“응. 있잖아, 나한테 천사님이 있어.”

순간 금자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곱게 접어 둔 날개로 귀가 있을 만한 곳을 팍팍 긁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리 긁어도 라티아의 말이 뜻하는 바는 하나였다.

“나한테는 수호천사님이 있어. 그래서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두 알려줘.”

수호천사인 자신이 라티아에게 존재를 들켰다는 것!

금자는 저도 모르게 생각했다.

‘망했다.’

그도 그럴 것이, 수호천사는 아이에게 자신의 정체를 들키면 다음 아이부터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해야 했다.

‘그동안 내가 했던 고생들이 모두 물거품이 된다는……!’

거기까지 생각한 금자는 너무도 큰 충격에 기절하고 말았다.

“삐, 삐륵…… 삐르르……. 삑!”

제, 젠장. 그 짓거리를 또 언제 해!

대충 그런 뜻이었다.

* * *

수잔이 금자의 주변에 소형 탕파를 놓아주며 걱정스럽게 말했다.

“어딜 갔었나 걱정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또 아파서 오다니…….”

라티아는 턱을 괴고 몸져누운 것 같은 금자를 보며 중얼거렸다.

“이렇게 예쁘고 약해서 야생에서 어떻게 살아갈까?”

문득 이 작은 새와 자신이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힘이 없어서 저번 생에 그렇게 허술하게 죽었지.’

요즘도 가끔 목이 내리쳐지는 악몽을 꾼다.

‘이번 생에서는 그렇게 되지 않으려고 독을 품고자 하지만 솔직히 매사에 바짝 긴장하고 있는 건 힘들어.’

하지만 그렇다고 마음을 놓고 지내자니, 자신에겐 힘이 있는 보호자가 없다.

‘내 주변엔 내가 이 새를 주워 보듬듯이, 나를 보호해 줄 능력이 있는 어른이 없어.’

수잔에겐 미안하지만 사실이었다. 수잔은 결코 후작을 거스르지 못하고, 상대할 수 없을 테니까.

라티아가 끙끙 앓는 금자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으며 말했다.

“정신 바짝 차리고 살아야 해. 안 그러면 꿀꺽 잡아먹혀.”

수잔은 어쩐지 침울해 보이는 라티아의 주위를 환기시키듯 말했다.

“이참에 이름을 지어 주는 건 어떠세요, 아가씨?”

“이름을?”

“네. 또 한동안 저희가 보살펴야 할 것 같은데, 저번엔 이름을 지어 주지 못했잖아요.”

“응……. 그러고 보니 그냥 ‘아기 새’라고만 불렀지.”

‘아기 새’라고 칭할 때마다 표정이 표독스러워졌던 것 같기도 하다. 마치 ‘나도 이름이 있거든!’ 하듯이.

‘그 이름이 뭔지 알 수는 없지만…… 새로운 이름을 지어 주는 건 어렵지 않지.’

라티아는 곰곰이 생각해 봤다.

“삐르…… 삐르리…….”

금자는 매우 부당한 일을 당한 사람처럼 끙끙 앓아댔다. 그 지저귀는 소리를 듣던 라티아의 눈에 반짝 별이 튀었다.

“삐로리.”

“삐로리요?”

“응. 삐르르, 삐르리, 그렇게 울잖아.”

개는 멍멍 짖어서 멍멍이고, 고양이는 야옹 울어서 야옹이니까 새도 삐로리라고 지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렇게 따지면 짹짹이가 아닐까?’

하지만 수잔은 어린아이 같은 감상을 말하는 라티아가 귀여워 후후 웃고 말았다.

한편, 라티아가 그의 이름을 지어 주자마자 금자의 몸에 ‘삐로리’라는 보이지 않는 낙인이 새겨졌다. 물론 신의 언어이기 때문에 라티아와 수잔은 알지 못했다. 다만 이렇게 금자는 ‘삐로리’가 됐다.

제아무리 신으로 승격을 앞두고 있는 대 수호천사라 하지만, 그가 선택한 아이인 라티아가 삐로리라고 부르면 삐로리인 것이다.

* * *

“안녕, 삐로리.”

깜빡깜빡 정신을 차리는 삐로리에게 다정하게 인사를 건넸다. 삐로리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내가 부르는 목소리에 의아한 눈빛을 보냈다.

‘삐로리? ……나?’

마치 그런 표정이었다.

나는 새삼 감탄했다.

정말 신기하다, 새의 표정도 읽을 수 있어. ……흐음, 도박장이나 가 볼까?

이 독심술 능력이 있으면 노련한 도박꾼들의 포커페이스도 읽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참에 제국 최고의 도박꾼이 되어 봐? 상단을 키워서 조금씩 얻는 돈보다 한탕 크게 하는 게 더 확실할 텐데…….

앞에 삐로리를 두고 그런 생각을 하던 때였다.

“삑!”

멀쩡하게 주변을 살피던 삐로리가, 별안간 고통스러운 신음을 뱉으며 철푸덕 엎드렸다.

“삐로리?”

“삑…… 삐힉, 삑…….”

나는 깜짝 놀라 삐로리의 몸통 위로 손을 올렸다.

“세상에! 열이 나잖아!”

“삑, 삐힉, 삑…….”

삐로리는 눈까지 꼭 감고 헐떡거리면서 내 손을 날개로 감싸 쥐었다. 그리고는 가느다랗게 눈을 뜨고는 나를 쳐다봤다.

‘그러면 안 돼. 나쁜 짓을 해서는 안 돼.’

말도 안 되는 건 아는데, 지금 삐로리의 표정은 꼭 나를 타이르는 어른 같았다.

나쁜 짓을 해서는 안 된다니, 설마……. 내가 도박장 생각을 해서 그런가?

긴가민가해서 작게 중얼거려 봤다.

“나는 세계 제일의 도박꾼이 될 거야.”

“삑……!”

“……나, 나는 도박으로 번 돈으로 아주 나쁜 짓을 할 거야.”

“삐힉!”

경악하던 삐로리의 몸이 이내 뻣뻣하게 굳었다. 그리고는 이내 추욱 쳐졌다.

“삐로리!”

나는 화들짝 놀라서 삐로리를 살폈다. 온몸이 불덩이 같은 삐로리는 기절이라도 한 것처럼 미동도 없었다. 아무래도 내 예상이 맞는 것 같다.

“어떡해……. 미안해. 다시는 그런 생각 안 할게.”

나는 힘 없이 축 처진 삐로리의 위에 손을 얹고 사과했다.

“어머, 삐로리가 깼나요?”

때마침 아침 식사를 가지러 갔던 수잔이 돌아왔다.

“응, 그랬는데 다시 기절했어…….”

“네? 삐로리가요?”

수잔은 얼른 쟁반을 내려 두고 내 쪽으로 다가왔다.

“이런, 열이 심하네요. 갑자기 왜 이럴까요?”

나는 수잔이 삐로리의 부리 틈 사이로 물을 넣어 주는 것을 보며 중얼거렸다.

“내가…… 나쁜 생각을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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