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후작 부인, 레이시나는 하녀에게 손톱을 맡긴 채 책을 읽고 있었다.
똑똑, 누군가가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레이시나는 책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말했다.
“들어오렴, 베티.”
문을 두드린 이는 다름 아닌 레이시나가 부른 베티였다.
베티는 레이시나가 자신을 불렀다는 것에 기쁜 마음과 불안감이 공존하는 얼굴로 조심스레 들어왔다.
“저를 부르셨다고요, 마님.”
“그래. 이리 오렴.”
레이시나는 온화한 목소리로 베티를 불렀고 살갑게 자리도 내어 줬다. 베티가 엉덩이를 붙이자 레이시나가 책장을 넘기며 말했다.
“열흘 전.”
“네, 마님.”
“라티아가 그루안 상단주를 만났다면서.”
레이시나의 말에 베티는 작게 입을 벌렸다가 다물었다.
“네, 맞아요. 중앙문 앞에서 기사들에게 박대당하는 셀트론 상단주를 라티아 아가씨가 방으로 데려갔어요.”
“그래, 알고 있었구나. 그런데.”
책을 보던 레이시나의 눈동자가 바짝 얼어붙은 베티를 향했다. 히끅, 숨을 집어삼킨 베티는 어깨를 뻣뻣하게 굳혔다.
“왜 내게 보고하지 않은 거니?”
“……네?”
“내가 분명.”
레이시나가 다른 하녀가 관리해 준 손톱에 바람을 불며 말했다.
“라티아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하라고 했던 것 같은데. 내 말이 틀리니?”
“아, 아닙, 아니에요.”
“그러면?”
“베티는 그저……”
얼굴이 하얗게 질린 베티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너무 사사로운 일이니까, 마님께서 아실 필요 없는 일이니까, 그러니까……. 라티아 아가씨는 아무 힘도 없고, 그루안 상단은 다 망해 가니까, 특별할 게 없다고 생각했어요.”
“알 필요가 없다라…….”
“…….”
“누가.”
“……네?”
“누가 그렇게 생각했니?”
레이시나는 반대쪽으로 돌아온 하녀에게 손을 맡기며 물었다. 베티가 입을 벙긋거리자 레이시나가 말했다.
“베티. 그건 너의 생각이고, 너의 판단이지 않니?”
“네……. 맞아요.”
“그것참 이상하구나. 나는 베티, 너의 생각과 판단을 말하라고 한 적이 없는데.”
감히 멋대로 굴었다며 힐난하는 말에 베티의 고개가 무겁게 떨어졌다.
“이 후작저의 두 번째 주인인 내가 내부의 일을 열흘이나 모른다는 게 말이나 되니?”
“아니요……. 죄송합니다…….”
까득, 사죄한 베티는 어금니를 물었다. 순간 레이시나의 눈동자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가 다시 여상함을 되찾았다.
“그래, 알았으면 됐다. 그만 나가보렴. 오늘 일은 불문에 부쳐 줄 테니, 앞으로 이런 실수는 없었으면 좋겠구나.”
자신의 자비는 오늘이 마지막일 거라며, 레이시나가 덧붙였다. 베티는 자리에서 일어나 레이시나에게 꾸벅 인사하고 도망치듯 방을 빠져나갔다.
터덜터덜 걷던 걸음에 천천히 힘이 들어갔다. 주먹을 불끈 쥔 베티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은 반성 따위가 아니었다.
“하, 웃겨, 진짜.”
베티는 실소를 터뜨렸다.
‘뭐? 두 번째 주인? 라티아, 그 계집과 그루안 상단주가 만나는 걸 열흘째 몰랐으면서! 나보다 정보량도 부족한 주제에, 웃기는 소리 하네!’
베티는 속으로 레이시나를 신랄하게 욕하며 걸음을 옮겼다.
‘언제까지 두 번째 주인일 수 있는지, 두고 봐.’
씩씩거리던 그녀의 걸음이 멈춘 곳은 다름 아닌 후작, 알버스의 서재였다.
한편, 레이시나의 손톱을 다듬어주던 하녀가 말했다.
“이대로 두시게요, 마님?”
“뭘 말이니?”
레이시나가 시치미를 떼자, 하녀는 잠시 눈치를 보다 입을 열었다.
“베티 말이에요.”
“제깟 게 뭘 어쩌겠니.”
“하지만…….”
“그만.”
레이시나의 일갈에 하녀는 입을 다물었다. 하녀의 침묵을 지켜본 레이시나는 곧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차피 베티는 하녀에 불과해. 후작님과 불륜 관계라는 소문도 그저 추문일 뿐이야. 하지만 만약 사실이라 하더라도 상관없어. 왜냐면 베티는 출신이 천하잖니.”
“…….”
“내 상대는 되지 못해. 내가 있는데 후작님께서 왜 베티 따위를 안겠니?”
레이시나의 말에 하녀는 가만히 고개만 조아렸다. 하녀는 손톱을 마저 다듬었고, 레이시나는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자신만만해 보였지만 하녀의 생각은 좀 달라 보였다.
‘후작님과 추문이 돌기 시작함과 동시에 베티를 라티아 아가씨의 하녀로 좌천시키셨으면서.’
하지만 하녀는 제 목숨이 아까운 줄 알고 있었기에 레이시나에게 솔직히 말하지 않았다.
* * *
이튿날, 나는 카르시안이 맡긴 편지지를 확인했다. 다행히 구겨지지도 않고 바싹 잘 말랐다. 마법도 제대로 걸려 있는지, 햇빛에 비춰 보면 사금 섞인 모래처럼 반짝거렸다. 하지만 아직 문제가 하나 남았다.
“어떻게 잠입해야 아버지의 서재에 들어갔다는 것이 들키지 않을까?”
세이렌에게 편지를 전달하게 하는 마법약은 아버지의 서재에 있다. 수잔이 이불을 한 아름 끌어안고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잠입을 해도 분명 들킬 거예요. 숨어든 사람의 발자취를 쫓는 마법이 걸려 있다고 들었어요.”
“맞아.”
내가 걱정하는 것도 그거다. 아버지는 다른 사람들의 약점을 모아 모두 서재에 뒀다. 그만큼 경호가 단단하단 말이다.
“후작님의 서재에 숨어드는 건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아요, 아가씨.”
“그렇겠지?”
나는 시무룩하게 대답하며 소파에 앉아 웅크린 다리를 끌어안았다. 무릎에 턱을 괴고 허공만 쏘아봤다. 그러고 있으면 무슨 묘수가 떠오르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내 눈만 아플 뿐이다.
내가 뻑뻑한 눈을 내리 감으며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을 때였다.
“아가씨, 손님이 왔어요.”
어느새 새로운 침구류를 들고 온 수잔이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머리 위로 물음표를 띄우며 수잔이 서 있는 문을 쳐다봤다. 그녀의 뒤로 셀트론의 환한 얼굴이 보였다.
“상단주님?”
하루 만에 무슨 일일까?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맞이하자, 셀트론이 한달음에 달려왔다.
“아가씨!”
그리고는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시선을 마주했다.
“어, 어머.”
나는 놀란 마음에 입가를 가리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셀트론은 불과 하루 만에 인상이 확 달라졌다. 음울하고 무기력하던 얼굴은 어디로 가고, 지금은 아주 쌩쌩하게 활기가 넘쳤다.
그가 말했다.
“아가씨의 예상이 맞았어요!”
“네? ……설마.”
나는 셀트론이 대답하기 전, 앞질러서 말했다.
“보들보들초를 살려 내셨군요!”
“네! 그것도 단 하루 만에요!”
“와! 정말요?”
“네! 모두, 모두! 아가씨 덕분이에요. 제게 드루이드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려 주신 덕분에, 저는, 저는……!”
하루 만에 시든 약초가 살아난 걸 보고 셀트론도 깨달았을 것이다. 그가 가진 드루이드 능력이라면 그루안 상단을 다시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나는 무해하게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그를 맞은편 자리로 안내했다.
“수잔, 차를 내어 줘.”
“네, 아가씨.”
수잔도 셀트론의 밝은 표정에 감응한 듯 다정한 얼굴로 차를 우렸다.
셀트론이 쑥스러운 표정으로 뒤늦게 말했다.
“오늘 이렇게 찾아온 이유는 이를 보고 하기 위함 뿐만이 아닙니다. 아가씨께 정식으로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어요.”
“감사 인사는요. 상단주님의 능력으로 해낸 것이잖아요. 상단에 취직시켜 준 것만으로도 고마워요.”
“하지만 아가씨께서 어제 저를 깨우쳐 주지 않으셨잖습니까. 전 정말…… 생각지도 못하던 가능성이었습니다. 확인을 할 생각도 없었고요.”
셀트론은 무척이나 감사하다며 재차 고개를 숙였다.
음, 이렇게까지 큰 인사를 받을만한 일은 아닌데…….
멋쩍게 웃기만 하자, 셀트론이 말했다.
“사실 빈손으로 오고 싶지는 않았습니다만, 아직은 제가 아가씨께 필요한 것이 뭔지 몰라서요.”
‘아가씨는 제게 필요한 건지 뭔지 아시는데, 저는 모르니 부끄럽기 그지없습니다.’ 셀트론은 그런 표정으로 잠시 눈을 내리깔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나에게 말했다.
“그러니 필요한 것이 있으시다면 뭐든지, 편하게 말씀해 주세요!”
“뭐든지요?”
“네! 하하, 그게…….”
셀트론이 부끄러운 듯 어깨를 움츠리며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오늘 아침 예리엘 만물 상단과 정식으로 계약을 맺었거든요!”
“예리엘 만물 상단이랑요?!”
익숙한 이름에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예리엘 만물 상단은 이 제국에서 가장 많은 물건을 취급하는 상단이다. 합법적인 물건부터 불법적인 물건까지, 구해 달라고 의뢰만 하면 못 구하는 것이 없는 의뭉스러운 상단이기도 했다.
원작에서 말하길, 예리엘 만물 상단의 상단주는 소위 말하는 ‘능구렁이’로 돈 냄새를 기가 막히게 맡는다고 했다.
그런 예리엘 상단이 그루안 상단과 손을 잡다니!
“아니, 대체 어떻게요? 그루안 상단은 이제 막 다시 일어나는 단계잖아요!”
나는 너무도 의아한 나머지 솔직하게 물었다. 이에 셀트론이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수줍게 말했다.
“그게, 사실은…….”
새벽에 시든 보들보들초가 살아난 게 너무 기뻐서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그리고 때마침 밖에 예리엘 만물 상단의 사람이 지나가고 있었고 흥미가 돌아 자초지종을 물었단다.
셀트론은 기뻐서 설명했는데, 알고 보니 그가 예리엘 만물 상단주였다. 그는 곧장 자신이 상단주임을 밝히고 동시에 셀트론이 드루이드의 후손이라는 걸 확신했다고 했다.
“예리엘 만물 상단주와의 거래도 결국 아가씨 덕분이에요.”
셀트론이 무한한 신뢰를 담은 눈동자로 나를 바라봤다.
“예리엘 만물 상단주가 그러는데, 제휴 계약을 맺으면 서로간의 신뢰를 확실히 하기 위해 무료로 상단을 이용할 기회를 준다고 하더군요.”
예리엘 만물 상단은 좀 의뭉스러운 구석이 있으니까, 초반에 신뢰를 잡아 놔야 하겠지.
셀트론이 ‘제가 직접 드리는 선물은 아니지만…….’ 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저는 예리엘 만물 상단을 이용할 기회를 아가씨께 드리고 싶습니다.”
“……네? 제게요?”
“네. 제가 이렇게 예리엘 만물 상단과 계약을 하게 된 것도 모두 아가씨 덕분이니까요.”
셀트론은 내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그에 나는 눈을 깜빡거리다가 이내 씨익 웃었다.
“좋아요!”
나는 선뜻 셀트론의 호의를 받아들였다.
겸손의 미덕이라는 말이 있기는 한데, 지금은 내게 굴러들어온 것들은 모조리 쥐어야 했다. 점잔을 떨고 있을 때가 아니란 말이다.
내 말에 셀트론은 한시름 덜었다는 표정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필요하신 게 있으시다면 언제든지 서신을 보내 주세요.”
셀트론은 내가 말만 하면 바로 예리엘 만물 상단에 의뢰하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뭐. 굳이 서신까지 보낼 필요 있나? 내 대답은 정해져 있는데.
문득 수잔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가 싱긋 웃었고, 나도 눈웃음을 지었다.
내가 말했다.
“상단주님, 그렇지 않아도 잘됐어요. 마침 필요한 게 있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