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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죽일 남주를 길들여버렸다-10화 (10/186)

10화

나는 수잔을 물리고 카르시안과 마주 앉았다.

그가 거두절미하고 말했다.

“편지지를 한 장만 줄게.”

“알았어. 나를 시험하겠다는 말이지?”

시험이라는 말에 카르시안의 붉은 눈동자가 잠깐 흔들렸다. 내가 이렇게까지 직설적으로 물어볼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카르시안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시험인 걸 들키고 시험을 치르면 안 되는데…….”

근데 그 혼잣말이 제법 크다.

아무리 남주라고 해도 아직 어리숙하네.

나는 문득 그가 정말 아기 고양이처럼 느껴져서 풋,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왜 안 돼? 내가 시험에 통과하기 위해서 네 뜻대로 따를 거니까?”

“……응.”

“그럼 좋은 거 아니야? 매번 나를 시험하면 되잖아. 그럼 난 매번 네 뜻대로 따르지 않을까?”

순간 카르시안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마치 ‘그런 수가 있구나!’ 하듯이. 붉은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나고 늘 경계심 가득히 다물려 있던 입도 조그맣게 벌어졌다.

“아하하!”

그 표정이 너무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맑은 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크게 웃자 카르시안의 표정은 단박에 불퉁해졌다.

‘왜 웃어.’ 하는 눈빛이었다.

어쩜 저렇게 생각을 못 숨길까.

그런데 문득 기묘한 위화감이 들었다.

잠깐만, 어린 카르시안은 둘째치고 나…… 어른인 셀트론의 표정도 전부 읽지 않았나?

그러고 보니 베티는 물론이고 빌, 론, 셀트론을 가로막던 무뚝뚝한 기사들의 생각도 쉽게 읽었다.

어라, 원작에서 라티아가 이렇게 눈치가 좋다는 말은 없었는데……? 아니, 눈치가 없었으니까 회귀 전에도 내가 사생아라는 것도 모르고 산 거 아니야?

나는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불퉁한 표정을 짓고 있던 카르시안이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뭐야……? 왜 그래?”

“어, 어?”

“왜 갑자기 심각해지냐고.”

그는 제가 가져온 편지지와 나를 번갈아 봤다. ‘줘도 되나? 믿어도 돼?’ 하고 망설이고 있었다.

……어, 이것 봐.

지금도 나는 너무도 당연하고 쉽게 카르시안의 표정을, 마음을 읽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나는 대체 어떻게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는 걸까?

무척이나 의아했지만, 일단 지금은 내 목숨 줄을 쥐고 있는 남주를 상대할 때다. 나는 다시 정신을 바짝 차리고 카르시안에게 손을 내밀었다.

“편지지를 줘. 멋지게 시험에 통과해 보일게.”

카르시안은 여전히 내가 미덥지 못하는 듯했지만, 조심스레 편지지를 건넸다. 나는 카르시안의 보물 1호인 편지지를 받아 무릎 위에 올려 뒀다.

그가 돌아가기 전까지 잘 보이는 곳에 두는 게 안심이 될 것 같아서.

카르시안은 내 무릎 위에 있는 편지지에서 한동안 시선을 떼지 못하다가 조용히 물었다.

“그루안 상단주를…… 왜 도왔어?”

“응? 그걸 네가…….”

문득 그가 창밖에 서 있을 때 눈이 마주쳤던 게 떠올랐다.

역시 그날, 밖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던 게 맞았구나.

“네가 어떻게 알아?”

난 시치미를 뚝 떼고 물었는데, 카르시안이 허겁지겁 변명했다.

“기사들을 가로막았을 때를 우, 우연히 봤어. 일부러는 아니야. 절대로!”

뭐, 일부러 봤다고 해도 상관없었는데. 현관은 개방된 곳이고, 딱히 들켜도 문제가 될 일은 아니니까.

“형편이 어렵다고 들었어. 나의 작은 도움으로 형편이 나아진다면 안 도울 이유가 없잖아. 그리고 상단의 도움을 받고 싶은 일도 있고.”

내 대답에 카르시안은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사람처럼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다가 다물었다.

“정말…… 변했구나.”

“응? 뭐라구?”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카르시안은 잠시 홀로 생각하다가 이내 빈정거리며 말했다.

“그거 알아?”

“응?”

“사람은 죽을 때가 되면 갑자기 바뀐대.”

그는 나를 떠보고 있었다.

‘죽을 때가 된 사람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갑자기 이렇게까지 변해? 무슨 꿍꿍이야? 솔직하게 말해.’ 하는 속내가 표정에서 적나라하게 읽혔다.

사람의 생각을 표정으로 정확하게 읽을 수 있다니, 이 독심술 능력은 대체 뭘까? 회귀 후에 생긴 건 분명한데…….

각설하고 카르시안의 생각은 사실이다.

나는 곧 죽는다.

카르시안의 마음에 들지 못하면 3년 뒤, 그의 아버지가 돌아왔을 때 가문과 함께 내 목숨도 사라진다.

그걸 알기에 난 변한 거다.

곧 죽을 때가 됐으니까 변한 게 맞다는 소리다. 그래서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응.”

“시한부들이 보통, ……뭐?”

그런데 내 대답에 주절주절 떠들던 카르시안의 얼굴이 단번에 굳었다.

응? 왜 저러지?

“죽, …….”

카르시안은 무척이나 충격을 받은 듯이 입술만 간신히 달싹거렸다.

‘죽는다고? 라티아가? 시한부란 말이야?’

덕분에 나는 카르시안이 무엇을 오해하고 있는지 알아차렸다. 사람의 표정만 보고 생각을 읽을 수 있는 독심술 능력은 신기하고도 편리했다.

나는 고민했다.

흠, 지금 뭔가 오해가 있던 모양이라고 부정을 해 둬야 할까?

카르시안의 오해는 터무니없지만, 어쨌든 이대로 있다간 카르시안 때문에 내가 죽는 건 사실이다.

‘죽는다고…… 라티아가…….’

붉은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리는 건 꽤 애처로웠다. 하지만 나는 그에게 진실을 숨기기로 결정했다.

왜냐면 동정심 유발 작전을 할 거니까.

내가 죽을 때가 됐으니 바뀌었다는 말은 나를 의심하는 카르시안의 경계를 누그러트릴 것이다.

카르시안은 죽을 때가 되어 변했다고 순순히 말하는 나를 안쓰럽게 생각하겠지? 그러면 조금 더 빨리, 쉽게 마음을 열어 주지 않을까?

그의 마음을 이용하는 것 같기는 한데, 재차 말하지만 내 코가 석 자다.

나는 죽고 싶지 않아.

사생아라서 내내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았는데, 죽을 때서야 가문의 일원이라며 책임을 함께 하라는 소리 듣는 건 더더욱 사양이다.

아무리 치사한 방법이라 하더라도 나는 살아남고 봐야 해. 그게 설령 사람의 마음을 이용하는 거라고 하더라도.

사형대에서 느꼈던 그 외로움과 공포가 나를 이렇게 독하게 만들었다.

일단 살아남고 “사실은 이랬어.” 하고 진심을 다해 사과하자.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이 무슨 짓이든 못 할까?

이용할 수밖에 없었던 사정을 설명하면 이해해 줄 것이다.

……아마도.

나는 심란한 표정으로 돌아가는 카르시안에게 끝내 진실을 말해 주지 않았다.

미안해, 카르시안. 내가 무사히 살아남고 나면 너에게 꼭 사실대로 말할게.

나는 그가 주고 간 편지지를 창가 근처에 잘 펴 두며 속으로 사과했다.

* * *

3일 후, 셀트론이 찾아왔다.

오늘 나는 그에게 드루이드의 후손이라는 것을 알려 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걸 말로만 하면 안 믿을 것 같아서 사전에 준비를 몇 개 했다.

“자요, 상단주님. 이걸 키워 보세요.”

“이건…… 보들보들초이지 않습니까? 그것도 다 시들었군요.”

셀트론이 울적한 얼굴로 잎이 노랗게 삭은 보들보들초를 살폈다.

보들보들초. 그것은 상처가 덧나는 것을 막아 주는 연고의 재료로 사용된다.

내가 일전에 카르시안에게 연고를 주겠다고 했다가 베티에게 ‘얼마나 비싼 연고인지 아세요?!’ 소리를 들은 그 연고 말이다.

“보들보들초로 만든 연고는 참 비싸죠?”

“네. 보들보들초를 굉장히 많이 갈아 넣어야 하니까요.”

“게다가 보들보들초는 재배하기도 무척 까다롭다고 들었어요.”

심지어 효능도 그렇게까지 뛰어나지 않다. 다만 대체재가 없어 어쩔 수 없이 계속해서 보들보들초로 연고를 만들어야 했다. 하지만 그건 우리 글라델리스 후작가에서 재배한 약초로 만들 경우다.

요컨대.

“상단주님이라면 아시고 계시죠. 사실 연고에 들어가는 보들보들초는 세 뿌리 정도면 된다는 걸요.”

그루안 상단에서 팔던 보들보들초로는 단 세 뿌리만 넣어도 스무 뿌리를 넣은 연고의 효능과 맞먹었다.

셀트론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그에게 미리 준비한 책을 하나 권했다. 이건 수잔이 저택 밖 국립 도서관에서 대여해 온 책이다.

“드루이드의…… 역사요?”

“네. 그리고 제가 가져오라고 한 거, 가져오셨나요?”

“아, 네.”

셀트론이 가방에서 역대 그루안 상단주들의 명록을 꺼냈다. 나는 씩 웃으면서 책과 명록을 동시에 펼쳐 보였다.

드루이드의 역사라는 책에서는 ‘마지막 드루이드의 행보’ 페이지를, 그루안 상단주 명록에서는 ‘초대 상단주의 이름’ 페이지를 말이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두 이름은 같았다.

“그루안 상단주는 부계 계승이죠?”

“네, 맞습니다. 저희 그루안 가문이 대대로 이어온 가업입니다. 그러니 이 명록은 저희 족보와 같은…… 잠깐.”

셀트론의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루안 가문의 선조는 마지막 드루이드와 동명이인이다.

“그루안 가문은 예로부터 선조가 드루이드라는 전설이 있었죠? 주요 가문에 대해 공부할 때 배웠어요.”

“아, 네. 맞습니다. 그렇다면…… 설마.”

셀트론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렸다.

“상단주님도 이미 느끼고 계시지 않으셨나요? 상단주님 손만 닿으면 다 죽어 가던 식물이 살아나거나, 더욱 탐스럽게 자란다는 걸요. 실제로 그 어떤 식물도 죽이지 않으시잖아요.”

내가 일부러 시든 보들보들초를 구한 이유는 이것이었다.

“저는…… 오랜 시간 내려온 노하우 덕분인 줄로만……. 맙소사.”

셀트론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렸다.

“이 시든 보들보들초로 시험해 보세요.”

셀트론이 만약 정말 드루이드의 후손이라면 다 시든, 이 재배하기 까다로운 약초를 살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약초는 후작가에서 어화둥둥 키우는 보들보들초보다 뛰어난 효능을 갖고 있을 것이다.

셀트론의 표정이 사뭇 달라졌다.

“……네.”

그는 단단히 다짐한 얼굴로 시든 보들보들초를 챙겨 돌아갔다.

“아가씨, 정말 상단주님께서 드루이드의 후손일까요?”

“글쎄. 두고 보면 알겠지.”

나는 수잔에게 다시 한번 고생해 달라고 부탁하며 ‘드루이드의 역사’를 건넸다.

수잔은 이내 도서관으로 나갈 채비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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