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죽일 남주를 길들여버렸다-9화 (9/186)

9화

원작 여주 이리스는 조국이 멸망했다는 충격과 그리움으로 향수병을 앓는다. 카르시안은 그녀의 힘이 되어 주고 싶어 소문 끝에 이리스의 나라에서만 자라는 꽃을 구한다. 하지만 좀처럼 피어나지 않아 골머리를 앓던 중 카르시안은 그루안 상단을 생각해 낸다.

상단이 망했다고는 해도, 많은 식물들을 키운 노하우는 있으니까.

그 무렵 셀트론의 여동생은 끝내 명을 달리한 상태였다. 셀트론은 여동생의 장례도 치르지 못하는 현실에 낙담하며 폐인이 되어 있었다.

사정을 들은 카르시안은 글라델리스 후작가를 함께 저주해 주며, 죽은 여동생의 장례를 치러 줬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셀트론이 드루이드의 후손이라는 것이 밝혀지지.

그루안 상단의 약초가 유독 우수하고, 품질이 좋았던 이유는 그루안 가문의 선조 중에 드루이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드루이드는 식물을 다루는 데 아주 뛰어난 능력을 가진 이종족이다. 그저 가문에서 전해 내려오는 전설로만 치부했던 이야기가 사실이었던 것이다.

그 뒤로는 뭐 뻔하다.

꽃을 피운 카르시안이 여주에게 선물해서 둘이 사랑이 싹트고…… 감사의 마음으로 그루안 상단에 투자하고 어쩌구…….

아무튼 나는 미래의 카르시안이 하는 일을 내가 할 생각이었다. 드루이드 능력이 있다고 알려 주고 그루안 상단의 재건을 돕는 거 말이다.

“일단 아버지께서 거래할 내역을 미리 알고서 상단주께 알려 줄게요. 그걸 그루안 상단이 가로채서 더 뛰어난 품질의 약초를 납품하세요.”

“하지만 그런다고 다시 거래가 될까요? 어차피 경쟁력이 없어서…….”

내가 산업 스파이를 자처한다 해도 셀트론의 걱정은 끊이지 않았다. 물론 이해는 됐다.

효과가 미미하지만 저렴하고 대량의 약초 VS 효과는 뛰어나나 비싸고 소량의 약초이렇게 겨루면 승자를 알 수 없다. 하지만 여기에 그루안 상단의 상품에 ‘재배자가 드루이드의 후손이다’라는 말이 붙으면 어떨까?

드루이드가 재배하는 약초는 기본 효능 말고 특별한 능력이 더 있다고 전해진다. 셀트론에게도 그러한 기대가 생길 게 분명했다.

나는 씩 웃으며 말했다.

“걱정 마세요. 그것도 제게 다 방법이 있으니까요.”

고객 유치는 내가 할 테니, 너는 재배만 하거라.

상단이 무너지지 않으면 셀트론의 여동생도 죽지 않을 것이다. 또 이리스를 위해 찾아오는 카르시안에게도 이편이 더 좋을 터.

그러는 동안 나는 차명 계좌를 만들어, 그루안 상단에서 받은 월급을 모아 두면? 모두가 행복한 엔딩이지!

이런 깊은 뜻을 모르는 셀트론은 여전히 흔들리는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어린 영애의 진의를 도무지 모르겠다는 눈빛이었다.

나는 슬슬 쐐기를 박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천천히 생각하셔도 좋아요. 제가 정 미심쩍으면……. 좋아요. 맛보기를 해 드릴게요.”

나는 수잔에게 아버지가 주신 자수정 목걸이를 가져오라고 부탁했다.

“이건 그레이엄 주얼리 샵에서 세공한 목걸이예요. 그레이엄의 대표 상품은 자수정이죠. 하지만 이제는 아닐 거예요.”

“아닐, 거라니요?”

“얼마 전 아버지께서 지르올 자수정 광산의 지분을 구매하셨어요. 거기에선 바이컬러 자수정. 즉, 두 가지 색이 섞인 자수정이 채굴되죠. 그리고 저희 가문은 오래전부터 그레이엄 주얼리 샵과 거래를 해 왔답니다.”

“…….”

“늦어도 한 달 뒤, 그레이엄 주얼리 샵의 대표 상품이 바뀔 거예요. 확인해 보세요.”

나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그리고 저는 이 목걸이로 오늘 가져오신 약초를 몽땅 살게요.”

“헉…….”

“이거면 앞으로 반년간 여동생분의 약을 구입할 수 있을 거예요. 혹은 새로운 묘목을 구입할 수도 있겠죠. 대신 빨리 처분하세요. 바이컬러 자수정이 나오면 값이 떨어질 테니까요.”

나는 윙크까지 찡긋 해 보였다.

셀트론은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나를 보다가 이내 덜덜 떨리는 손으로 목걸이를 받아 갔다. 하지만 셀트론은 목걸이를 받아 들고도 망설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이걸 받아도 됩니까. 정말로?”

“네?”

“그게…….”

셀트론이 입 모양으로 ‘사생아’라고 벙긋거렸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 입지를 걱정해 주는 걸까?

실제로 주제 파악을 하고 보니 나는 가문 내에서 사생아라는 천덕꾸러기였다. 사재조차 없을 정도이니, 그간 눈치채지 못한 게 이상했다.

아니, 뭐. 회귀 전의 나는 어머니의 사랑을 원한 조금 똑 부러지는 10살이었을 뿐이니까.

각설하고 나는 셀트론에게 괜찮다는 듯 빙긋 웃었다.

“무슨 상관일까요? 저는 세간에서는 글라델리스 후작가의 장녀, 라티아 글라델리스인걸요.”

요컨대 내게 장신구나 드레스가 아예 없는 건 아니란 말이다. 비록 전부 엘레네가 질려서 나에게 버린 것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하지만 셀트론의 착한 심성을 엿볼 수 있어서 기뻤다.

나는 그에게 의젓하게 말했다.

“저를 상단에 취직시키는 거, 긍정적인 쪽으로 잘 생각해 보세요.”

“아…….”

“고용계약 조건은 그때 가서 다시 이야기하도록 해요.”

나를 보던 셀트론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수잔, 셀트론을 배웅해 줘.”

“네, 알겠습니다. 아가씨.”

수잔은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셀트론과 함께 방을 나섰다. 나는 퇴창 밖으로 두 사람이 현관을 지나 정원을 걷는 것을 지켜봤다. 그녀는 지금 열과 성을 다해 셀트론이 나를 고용할 수 있도록 설득하고 있었다.

사실 나는 방으로 오는 동안 수잔에겐 나의 또 다른 계획을 말해 뒀다.

‘상단에 취직하면 카르시안이 아버지와 연락할 방법을 더 다양하게 알아볼 수 있을 거야.’

‘어쩜, 아가씨는 다 계획이 있으시군요!’

수잔은 기쁜 마음으로 나를 돕겠다고 약속했다.

셀트론을 배웅한 수잔이 나를 보며 씩 웃었다. 아무래도 셀트론에게서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겠다는 대답을 들은 모양이다.

나는 생글생글 웃으며 수잔에게 손을 흔들어 주다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따악, 정원 구석에 서 있던 카르시안과 눈이 마주쳤다.

나, 나를 보고 있었나?

깜짝 놀라 심장이 다 벌렁거렸다. 카르시안은 붉은 눈동자로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이내 휙 고개를 돌렸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

그레이엄 주얼리 샵은 세상에 바이컬러 자수정으로 만든 귀걸이, 목걸이 세트를 발표했다. 그리고 나는 셀트론과 만나 고용 계약서를 썼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티아나 아메시스트 님.”

“저야말로 잘 부탁드려요. 상단주님.”

“편하게 셀트론이라고 불러 주세요.”

“그럴 수야 없죠, 제 고용주이신걸요.”

나와 셀트론은 화기애애하게 웃으며 악수를 했다.

티아나 아메시스트는 나의 위조 신분이다. 거래에 번번이 실패할 아버지가 이상하게 생각하여 뒤를 캐낼 때를 대비하여 만들었다.

회귀 전 아버지를 도와 불법 격투장을 운영하며 도박하는 귀족들의 위조 신분을 만들었던 게 이렇게 도움이 됐다.

티아나 아메시스트 계좌에는 차곡차곡 나의 미래를 위한 자금이 쌓일 것이다. 더 정확히는 원작에서 벗어날 미래를 위한 자금이! 생각만 해도 가슴이 부풀 정도로 설렜다.

그리고 그날 밤, 드디어 카르시안이 찾아왔다.

* * *

최근 며칠, 카르시안의 머릿속을 장악한 것은 의심할 여지도 없이 라티아 글라델리스뿐이었다. 그는 아침에 눈을 뜰 때부터, 새벽에 눈을 감을 때까지 내내 라티아만 생각했다.

‘제발 그만 좀 떠올라.’

카르시안은 괴로울 지경이었다. 잠깐 틈만 있으면 라티아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메아리쳤다.

‘응, 난 믿어.’

그 목소리 때문에 미쳐 버릴 지경이었다.

저택 사람들이 저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괴롭히고 싶어서 얼마나 혈안이 되어 있는지, 카르시안 본인도 잘 알고 있었다.

‘아무도 날 믿어 주지 않아.’

학대나 방치를 당한다는 사실보다 제 편이 아무도 없다는 게 카르시안을 더욱 외롭게 했다.

사실은 그날도 체념하고 있었다. 빌의 말마따나 카르시안의 말을 믿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까.

그런데 그때, 라티아가 나타났다.

‘난 믿는다고, 카르시안의 말.’

카르시안보다 키도 작으면서,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는 왜 그렇게 단단한지. 라티아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카르시안을 믿어 주고 있었다.

심지어 라티아는 저를 구하기 위해 구정물까지 마셨다.

‘그게 다야? 화해의 물, 그게 다냐고. 그럼 그거 내가 대신 마실게. 그러면 화해 하는 거지. 이 일, 덮는 거지.’

이후 라티아는 빌과 론으로부터 사과까지 듣도록 도와줬다.

‘대체 내가 뭐라고 그렇게까지 해……. 수잔이 말하길, 약을 먹었다고는 했는데 정말 괜찮은 거겠지?’

혹여나 몸이 나빠질까 봐 무척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바람처럼 나타나 도와주고 바람처럼 사라진 후 생색조차 내지 않는 모습은 그야말로 영웅 같았다.

카르시안은 요즘 라티아를 생각할 적마다 귀 끝이 붉게 달아오르는 병에 걸렸다. 심장이 쿵쾅거리고, 숨이 가빠지는 걸 보니 여간 중한 병이 아닐 듯싶다.

게다가 일주일 전에는 라티아가 다른 사람을 구하는 모습도 봤다.

‘‘효능이 뛰어난 약초’가 필요하다는 말, 못 들었나 봐? 그리고 나는 경에게 발언을 허락한 적이 없는 것 같은데.’

그루안 상단주에게 무안을 준 기사들에게 말하는 목소리는 또랑또랑했다. 냉랭한 태도였지만 어디까지나 약자를 보호하기 위함이지, 기사들처럼 무례하지도 않았다.

라티아는 침울한 얼굴을 한 상단주에게 다정하게 말했다.

‘안으로 들어가서 천천히 이야기를 해 볼까요?’

단편적인 장면이었지만, 카르시안은 라티아가 그루안 상단주를 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와 동시에 라티아가 음식을 나눠 주고 이후, 여태 생각하던 고민도 떠올랐다.

‘……라티아가 이상해.’

요즘 그녀를 밉게 보려고 노력하는 카르시안의 눈에도 진심인 게 보일 정도로 라티아는 변했다. 이후 라티아는 상단주를 방으로 데려가며 수잔과 짤막한 대화를 나눴다.

‘훔쳐 들으려고 한 건 아니야.’

때마침 라티아가 지나가던 복도의 창밖에 카르시안이 있었을 뿐이었다.

‘상단에 취직하면 카르시안이 아버지와 연락할 방법을 더 다양하게 알아볼 수 있을 거야.’

‘어쩜, 아가씨는 다 생각이 있으시군요!’

충격의 연속이었다.

상단주의 어려운 상황을 타파해 주는 것은 물론이고, 자신까지 신경을 쓰고 있었다니!

더 이상 라티아를 부정할 구실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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