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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죽일 남주를 길들여버렸다-8화 (8/186)

8화

그루안 상단의 약초 품질은 무척이나 우수했다. 다만 우수한 만큼 가격이 높았는데, 아버지는 가주가 되자마자 터무니없는 납품 금액을 제시했다. 원 값의 절반을 깎아 버린 것이다.

글라델리스 후작가는 겉으로 굉장히 귀족적이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심을 받고 있다. 우리 가문과 거래가 끊긴 상단에는 문제가 있다는 소문이 퍼질 정도로 말이다. 결국 그루안 상단은 어쩔 수 없이 터무니없는 가격에 납품을 해야만 했다.?

돈을 적게 받으니 고용자들의 월급이 줄어드는 것은 당연했다. 아버지는 이 틈을 파고들어서 그루안 상단의 사람들을 매수하고 묘목과 재배 방법을 빼돌렸다. 해서, 후작저의 후원엔 그루안 상단에서 빼돌린 재배법으로 키운 약초들이 있다.

대대로 거래를 해 왔다는 이유로 우리 가문이 그루안 상단의 비법을 아는 것도 당연해졌다.

‘서로 친하니까 주고받았겠지.’

‘글라델리스 후작가가 얼마나 훌륭한 가문인데, 설마 나쁜 마음을 먹었겠어?’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본인 가문이니, 믿을 수 있지!’

그런 여론이 형성된 것이다.?

게다가 우리 가문은 대량으로 재배한 약초들을 그루안 상단보다 훨씬 싸게 판매했다. 비록 질은 낮았지만, 대신 양으로 승부했다.?

그 결과 그루안 상단은 점차 설 자리를 잃었고, 끝내는 이렇게 잡상인 취급을 받게 됐다.

돌이켜보니 우리 가문 진짜 악덕이네…….?

할아버지가 쌓아 둔 착한 이미지를 가지고 세상 나쁜 짓이란 나쁜 짓은 다 하고 자빠졌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수잔이 안쓰럽다는 듯이 말했다.

“상단주의 여동생 일도 참 딱하죠.”

“아, 응. 약만 꼬박꼬박 먹으면 낫는 병이라며.”

다행히 약값은 그렇게 비싸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 가문의 갑질 때문에 상단은 폭상 망하다 못해 알거지가 됐다. 그 저렴한 약값을 충당할 돈조차 없는 것이다.

그녀의 병은 생 약초만으로는 치료가 어렵다고 했다. 약초 상단의 딸이 약이 없어 죽어 가는 셈이었다.

음…… 솔직히 도와주고 싶기는 한데, 그렇다고 여동생의 병이 다 나을 때까지 지원을 해 줄 수도 없고…….

게다가 나는 지속적인 지원을 해 줄 만한 사재도 없다.?

“다시 약초 상단의 일등 주자로 우뚝 설 수 있으면 좋겠네요. 물건이 무척이나 좋았거든요.”

“그러게. 같은 방법으로 키워도 우리 가문의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며.”

마음 같아서는 그를 돕고 싶었지만 지금은 내 코가 석 자다. 사생아라서 입지도 좁은 데다가, 나는 미래에 죽는다.

나부터 살고 봐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몸을 돌리려고 했는데,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잠깐만, 나…… 그루안 상단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잖아!

게다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나의 최종 목표는 카르시안의 입에서 ‘쟨 나쁜 사람이 아니에요.’ 소리 듣는 게 아니다. 카르시안의 아버지가 돌아올 무렵의 나는 고작 열 살이다.

멸문한 가문의 열 살짜리 영애가 어떻게 자신의 안전을 보장받겠어?

내가 성인이 될 때까지 나를 의탁할 곳을 찾아야만 했다. 그리고 마침 나는 그루안 상단을 재건할 방법을 알고 있었다. 뇌가 빠르게 회전하다가 반짝 빛났다.

“수잔, 따라와!”

나는 얼른 실랑이가 벌어지고 있는 현관 쪽으로 향했다.

나를 발견한 기사들이 얼른 무기를 감췄다. 난 그들을 지나쳐 상단주의 앞으로 갔다.

“안녕하세요?”

그루안 상단주는 의아한 얼굴로 나를 내려 봤다. 그러다 내가 후작 영애라는 걸 알아차렸는지 얼른 정중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글라델리스 영애.”

착잡한 얼굴이었지만 예의가 바르고 진실한 눈빛이었다.

나는 생긋 웃으며 말했다.

“제가 효능이 뛰어난 약초가 좀 필요해서요. 혹시 카탈로그를 좀 보여 주실 수 있을까요?”

“카탈로그를요? 무, 물론이죠!”

“아가씨, 약초라면 저택의 후원에도 있지 않습니까? 굳이 이런 잡상인을 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기사가 상단주의 말을 가로챘다. ‘잡상인’이라는 말에 상단주의 표정이 다시 침울해졌다.?

나는 상단주의 곁으로 가 서며 기사에게 말했다.

“‘효능이 뛰어난 약초’가 필요하다는 말, 못 들었나 봐? 그리고 나는 경에게 발언을 허락한 적이 없는 것 같은데.”

냉랭한 태도의 기사가 잠시 주춤거렸다. ‘이 사생아가 갑자기 왜 이러는 거지?’ 하고 가늠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왜 이러기는, 사생아인 내가 우리 가문의 잘못을 하나 청산하려고 하는 거지. 겸사겸사 나도 좀 살아남고.

나는 기사에게 대답해 주지 않고 다시 상단주를 돌아봤다.

“안으로 들어가서 천천히 이야기를 해 볼까요?”

그루안 상단이 다시 우뚝 일어설 수 있는 방법과 나를 위탁할 방법에 대해서 말이야.

나는 최대한 무해하게 웃어 보였다.

* * *

수잔이 따듯한 차를 내어 줬다.

“아, 감사합니다.”

내 방에 들어온 그루안의 젊은 상단주, 셀트론은 얼떨떨한 얼굴로 나의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수잔은 그에게 빙긋 웃어 주고 나의 뒤로 가서 섰다. 셀트론은 이런 친절이 낯선 모양인지 어리벙벙한 표정으로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나는 그에게 거두절미하고 말했다.

“저를 그루안 상단에 취직시켜 주세요.”

“푸으읍!”

내 말에 셀트론은 호록 마신 차를 그대로 뿜었다.

“허, 헉! 죄, 죄송합니다!”

셀트론은 어쩔 줄을 몰라 하며 허둥거렸지만, 다행히 거리가 멀어 나에게 튀지는 않았다.?

나는 최대한 순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제가 그루안 상단에 도움이 될 거예요.”

셀트론은 손등으로 입가를 훔치면서 얼떨떨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이 어린 아가씨가 뭐라고 하시는 거지?’ 하고 의아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이내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카탈로그를 보여 달라고 데리고 와서 한다는 소리가 취직이라니, 기운이 빠질 만도 했다.

그가 실망한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합니다만, 저희 상단은 지금 직원을 늘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상단이 많이 힘들기 때문이죠? 우리 글라델리스 후작가가 보유한 상단에서 그루안 상단에서 취급하는 약초를 저렴하게 많이 팔고 있으니까요.”

내 말에 셀트론의 몸이 설핏 굳었다. 내가 이렇게나 어른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는 줄 몰랐다는 듯이. 그래서일까? 순간적으로 셀트론의 표정에 ‘다 알고 있으면서.’ 하는 원망 아닌 원망이 어렸다.?

나는 그의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말했다.

“그러니까 더더욱 저를 취직시켜야 해요.”

“아가씨…….”

“저의 아버지, 글라델리스 후작님은 그루안 상단의 사람들을 매수해서 정보를 빼돌렸어요.”

순간 셀트론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어떻게 그런 것까지 알고 계시는 거지?’ 하는 표정이었다. 그와 동시에 글라델리스를 향한 분노가 피어올랐다. 그 분노 덕분에 내가 고작 7살짜리라는 건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우리 가문이 겉으로는 무척 신사적인 이미지를 가진 가문이라서 다행이야. 대대로 학구열이 엄청나서 아이들이 다 어른스럽다는 말이 도니까.

그래서 셀트론도 글라델리스 가문을 익히 알아, ‘이 아가씨는 대체 뭐지?’ 같은 의문을 품지 않았다. 회귀 후, 비웃기만 하던 가문이 이렇게 도움이 된다.

나는 그의 마음을 부추기듯 속살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당하고만 계실 수는 없잖아요? 저를 취직시켜 주세요.”

“아가씨, 그러니까 지금 아가씨께서는 글라델리스 후작 가문을 배신…….”

셀트론이 내 눈치를 봤다. 나는 찻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깊은 이야기를 하기엔 이르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나는 잠시 뒤에 서 있는 수잔을 힐끔거렸다.?

수잔은 지난 생에서도, 이번 생에서도 멸시당하는 나에게 있어 유일한 친구다. 그러니 그녀만큼은 믿을 수 있다.

나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조용히 이야기했다.

“전 사실 사생아거든요.”

“……!”

셀트론의 눈동자가 크게 뜨이는 것과 동시에 수잔이 나를 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오로지 셀트론만 보며 말했다.

“이만하면 충분히 알아들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좀처럼 믿기지 않는 모양이다.

그도 그럴 게, 세상에 나는 ‘글라델리스 후작가의 장녀’라고 알려져 있다. 사생아라는 소문은 조금도 없다. 아버지가 하인들의 입단속을 단단히 시키고 있으니까. 그러니 셀트론은 이런 이야기를 처음 들을 터.

나는 생각에 잠긴 셀트론에게 말했다.

“저를 그루안 상단에 취직시켜 주세요. 저는 당신에게 직간접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어요.”

“…….”

“왜냐면 곧 아버지를 도와 아버지께서 운영하시는 상단의 일을 도울 예정이거든요.”

일순간 셀트론의 눈이 빛났다.

나는 셀트론의 눈동자가 계산 속으로 인해 빛나는 걸 모른 체하며 말했다.

“그러니 아버지께서 어느 상단과 어떤 거래를 하는지, 전 즉각적으로 알 수 있어요.”

내가 찻잔을 내려 두는 소리가 조용히 퍼졌다.

나는 저번 생에서 이맘때쯤부터 아버지의 사업에 함께했다. 사형 선고를 받은 결정적인 계기인 격투장 운영 말이다.

나는 유독 산수 능력이 뛰어났고 상단 운영에 전체적인 재능이 있었다. 나중에는 나를 데리고 거래도 나갔고, 내 덕분에 성사된 큰 거래도 꽤 많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대로 부모님은 날 사랑해 주지 않으셨지.

씁쓸한 기억에 혀끝이 썼지만, 청승 떨지 않으려 얼른 입을 열었다.

“그리고 저는 그루안 상단이 다시 일어날 수 있는 방법을 알아요.”

“그, 그게 정말입니까?”

“네.”

난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원작을 생각했다.

원작에서 그루안 상단은 훗날 황성에까지 약초를 대는 대상단으로 번창한다. 정확히는 남주인 카르시안이 그렇게 만들어 준다.

우리 가문에 복수를 하고 몇 년 뒤, 카르시안은 아버지와 떠난 무역에서 망국의 공주를 구출해서 돌아온다. 그리고 그녀가 바로 이 책의 여주인공, 이리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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