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정원으로 나서기 위해 수잔이 외출용 신발을 가져오며 말했다.
“후후, 아가씨는 정말 신기해요.”
“응?”
“갑자기 엄청 어른스럽게 행동하실 때도 있는데, 지금 같을 때는 또 한없이 귀여우시거든요.”
“어른스럽다라…….”
그건 내가 전생의 기억을 깨닫고 회귀했기 때문이 아닐까?
환생 전엔 성인이었고 회귀 전엔 10살이었다. 그런 걸 다 떠나서 사실은 내가 사생아였다는 것을 알게 되면, 누구나 철이 일찍 들지 않을까 싶다.
“수잔의 일을 덜어 주려고 일찍 철 들었지.”
난 히히 웃으며 화제를 바꿨다. 수잔은 조금 미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지만 그 뒤로 더 말하지는 않았다.
나는 외출용 신발을 신고 수잔과 함께 정원을 한 바퀴 돌았다. 그러나 아쉽게도 우리가 찾는 새는 보이지 않았다.
“음…… 안 보이네요.”
은백색 몸통에 긴 꽁지깃만 타오르는 불꽃처럼 새빨간 색이었다. 무척이나 인상적인 생김새라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나는 아기 새를 담은 바구니를 놓았던 수풀을 헤쳐 봤다.
“있어요?”
“아니, 없어.”
새는 완전히 나은 후에도 이곳에 앉아 삐르르 삐르르 울면서 우리를 불렀다. 일종의 약속 장소인 셈이었다. 그런데 여기에도 없다니.
“멀리 간 걸까요?”
“그래도 좋으니까 또 다치지만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아쉬운 마음을 애써 감추며 치맛자락을 탁탁 털었다. 수잔과 함께 다시 방으로 돌아가려던 때였다.
“아야, 아야야! 아이고! 나 죽네!”
저택의 뒤쪽에서 비명이 들렸다. 그런데 그 소리가 너무 작위적이어서 듣는 사람이 다 어리둥절해질 정도였다.
“카르시안 도련님 때문에 나 죽네! 아이고, 아이고!”
난 수잔에게 떨떠름하게 물었다.
“저 목소리…… 빌 아니야?”
“네, 그런 것 같은데요?”
빌은 차기 집사장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하인들 사이에서 가장 입김이 센 남자였다. 게다가 빌은 회귀 전에도 카르시안을 괴롭히던 악당이었다.
난 수잔이 말릴세라 얼른 저택의 모퉁이 쪽으로 달려갔다.
“앗, 아가씨!”
수잔이 뒤늦게 날 불렀지만, 난 마구간으로 향하는 길목으로 몸을 틀었다. 왠지 그곳에 있을 것 같아서. 아니나 다를까, 빌과 다른 한 명, 론이 그곳에 있었다.
“아이고, 아이고…… 나 죽네…….”
“여억시, 해적들이 바글거리는 바다로 무역을 나간 백작님의 아들다우십니다. 그 기상! 존경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사람을 해치고도 뻔뻔할 수 있겠죠?”
론의 어깨에 기대어 서 있는 빌의 다리에서는 피가 똑똑 떨어지고 있었다. 난 빌과 론의 앞에 가로막힌 카르시안을 바라봤다. 카르시안이 들고 있는 갈퀴가 흉기인지, 그 끝에 빌의 바지 자락이 걸려 있었다.
이게 어찌 된 일인지 몰라 잠시 살피고 있는데, 카르시안이 갈퀴를 꽉 움켜쥐며 말했다.
“너희가 한 짓이잖아. 멋대로 와서 갈퀴를 뺏고…….”
“예에?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요? 설마 우리가 도련님이 지나가고 있는데 갈퀴를 뺏고, 멋대로 다친 다음 다시 그 갈퀴를 돌려줬다고요?”
론이 사람을 모으려는 듯 목소리를 크게 높이며 비아냥거렸다.
카르시안이 주먹을 더 세게 움켜쥐며 말했다.
“사실, ……이잖아.”
“아이고, 아이고! 세상 사람들! 여기! 바다로 무역을 나간 라움디셀 백작님의 아들이 눈 하나 깜빡 안 하고 거짓말하는 것 좀 보십쇼!”
카르시안은 정말 억울한 듯 그 목소리가 떨렸는데, 빌은 기다렸단 듯이 아픈 척을 하며 쩌렁쩌렁 외쳐 댔다. 그 소리에 카르시안이 더욱 위축되는 게 보였다.
아우, 저 망할 빌, 론!
“이를 어쩌지? 내일 후작님이 친, 히, 부탁하신 일이 있어서 후작저 밖으로 나가야 하는데, 하필이면 발을 다치다니……. 그것도 카르시안 도련님 손에.”
“이 이야기를 후작님께 말씀드리면 후작님이 어떻게 하실 것 같습니까?”
빌과 론은 쿵짝이 아주 잘 맞아떨어졌다. 그 앞에서 카르시안의 낯빛은 하얗게 질려만 갔다. 이 일이 아버지의 귀에 들어가면 카르시안은 분명 엄청나게 혼날 거다. 회귀 전처럼 말이다.
그랬다. 회귀 전에도 빌과 론은 이렇게 자해공갈을 해서 카르시안을 괴롭혔다. 아니나 다를까, 빌의 가슴팍엔 녹화를 할 수 있는 마도구가 있었다. 빨갛게 반짝거리는 걸 보아하니 이미 녹화되고 있는 모양이다.
그럼 슬슬 ‘그 말’을 꺼낼 텐데…….
“아가씨.”
이쯤 수잔이 다가왔고, 난 내 어깨를 감싸 안는 수잔의 손길을 느끼며 빌의 이야기를 들었다.
“사과하세요. 우리한테 무릎 꿇고, 잘못했다고 싹싹 빌면 봐드릴게요.”
역시, 회귀 전과 똑같다. 빌과 론은 카르시안이 머리를 조아리는 영상을 찍어 저들끼리 시시덕거릴 생각이 분명했다. 하지만 카르시안은 이 세계의 남자주인공,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하는 성격이다.
“난 잘못한 게 없어. 너희가 잘못한 거잖아.”
“오호, 그래요? 그럼 뭐. 이대로 후작님께 가고.”
빌은 카르시안이 어디까지 자존심을 부리나 볼 심산인 모양이었다. ‘네까짓 게 그래 봤자지.’ 하는 눈빛이었다. 카르시안은 아버지의 이야기가 나오자 움찔거렸다.
이때였다.
“아니면, 이렇게 합시다. 그래요. 아무리 가난하다 하더라도 백작가의 영식이신데 우리같이 천한 하인들에게 사과를 하긴 싫으시겠죠.”
“난 사과를 하기 싫은 게 아니라, 내가 저지르지 않은 일에 대해……!”
“됐고. 그럼 이거 마시세요. 화해의 물.”
카르시안의 말허리를 자른 론은 마치 기다렸단 듯이 근처의 우물로 향했다. 거기서 굴러다니는 그릇 하나를 챙겨 양동이의 물을 담아 카르시안에게 건넸다.
“어머……!”
수잔이 충격을 받아 입을 가렸다. 난 저게 뭔지 묻지 않았다. 이미 알고 있으니까.
회귀 전과 똑같이 구정물이겠지.
저 우물은 하녀들이 걸레를 빨곤 하는 곳이다. 그러니 론이 물을 퍼 올린 양동이엔 구정물이 담겨 있을 것이다. 양동이에 물을 담아서 여러 번 걸레를 빨아 물을 절약하니까.
“마시라고요. 그냥 물이잖아요. 아니면 하인 따위가 주는 건 뭐, 물이라도 안 마신다?”
걸레 빤 물이 얼굴 앞에 들이밀어 지자, 카르시안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아, 드시라고요. 아니면 머리를 박든가.”
그 모습을 본 빌이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더니 카르시안의 어깨를 콱 움켜쥐고 협박했다.
“이를 어쩌죠? 집사장님을 불러올까요?”
“아니, 어차피 집사장님도 카르시안을 별로 좋아하지 않잖아. 당장은 상황이 나아진다 하더라도 저 빌, 론들은 또다시 카르시안을 괴롭히려 할 거야. 여긴 우리끼리 해결해야 해.”
난 벌벌 떠는 수잔에게 냉철하게 말했다.
하지만 어떻게 해결하지?
나로서도 뚜렷한 방법이 있는 건 아니었다. 순간 빌의 가슴팍에서 붉은빛을 반짝거리고 있는 마도구가 눈에 들어왔다.
아, 그래. 저거야!
“수잔, 여기에 있어.”
“네?”
난 수잔에게 대답해 주지 않고 곧장 튀어나갔다.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야!”
그리고는 주먹을 꽉 움켜쥐고 카랑카랑하게 말했다. 순간 빌과 론, 카르시안의 시선이 내게로 확 꽂혔다. 난 카르시안 쪽으로 다가가며 말했다.
“이야기 다 들었어. 뭐 하는 짓이야?”
“하~ 나, 진짜.”
내 말에 카르시안의 어깨를 잡고 있던 빌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두 사람의 눈빛에서 ‘이건 또 뭐야?’ 하는 불손한 마음이 읽혔다.
“이야기를 다 들었으면 알 거 아니에요. 카르시안 도련님이 저를 다치게 했다니까요? 내일 나가야 하는 저를?”
“그래 놓고 사과도 안 하고, 화해의 술…… 아니. 물 한 잔도 안 마시려고 하지 뭡니까. 그래서 우리가 아무리 하인이라고는 해도 어른이니, 버르장머리를 고쳐 주려고 하는 중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사생, ……아니지. 아가씨는 알아서 갈 길 가세요. 아시겠죠?”
날 뒤에서 얼마나 ‘사생아’라고 불렀으면 당사자를 앞에 두고 말실수를 할까?
빌이 킬킬거리며 손을 내저었지만, 난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하지만 카르시안이 자신이 한 짓이 아니라고 했잖아.”
“허?”
“카르시안의 말대로 너희가 한 짓이잖아. 카르시안을 이렇게 괴롭히려고.”
난 빌의 다친 다리와 론이 들고 있는 구정물을 손가락으로 번갈아 가리켰다. 그러자 론이 불현듯 웃음을 터뜨렸다.
“푸하하하! 아니, 아가씨. 카르시안 도련님의 말을 믿으세요, 머저리같이? 저 도련님의 아비는 해적들이 득실거리는 바다를 뚫고 무역을 성공시키겠다는 허풍쟁이예요. 그 아들이라고 다를 게 뭐가…….”
“응, 난 믿어.”
난 론의 말허리를 싹둑 자르고 말했다. 카르시안이 놀란 표정으로 날 확 돌아봤다.
난 그런 카르시안을 보는 대신, 빌과 론의 눈만 또렷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난 믿는다고, 카르시안의 말.”
내가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말하자, 빌과 론이 주춤거렸다.
저들은 강약약강이다. 강한 자에게 약하고, 약한 자에게 강하다. 그러니 내가 약한 자가 아니라, 강한 자라고 알려야 한다.
“뭐가 이상하지? 이 저택의 주인인 아버지는 라움디셀 백작의 말을 ‘믿어서’ 카르시안을 맡아 준 거나 다름없어. 라움디셀 백작은 살아서 돌아올 테니까. 그런데 이런 망발이라니, 설마 너희는 우리 아버지 ‘머저리’ 취급 하고 있는 거니?”
“그, 그런 뜻이 아니라……!”
“그게 아니면, 뭐.”
내가 아버지를 들먹이며 세게 나가자 아니나 다를까, 두 사람은 바보같이 입만 벙긋거렸다. 하지만 자존심 센 빌은 이대로 물러나지 않으려는 듯했다.
“그, 그래요. 아가씨는 카르시안 도련님의 말을 믿는다고 쳐요. 그런데 과연, 다른 사람들도 믿을까요?”
“봐요. 지금 카르시안 도련님이 들고 있는 갈퀴에 빌의 옷자락이 걸려 있잖아요! 이보다 확실한 증거가 어디에 있다고요?”
론도 얼른 빌을 두둔했다.
“그러니까 그건 내게 억지로 갈퀴를 들려 준 거잖아!”
“아니었으면 놨어야죠. 왜 여태 들고 있어요?”
카르시안이 항변했지만 론이 얄밉게 대답했다. 뿌득, 카르시안의 입에서 이가 갈리는 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