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쭈뼛거리며 들어선 카르시안의 방은 빈말로도 쾌적하다고 할 수 없었다. 카르시안이 나름대로 청소를 한 모양이지만, 그래도 더러운 게 사실이었다. 애초에 여긴 사람이 사용하는 방이 아니고 창고이지 않은가.
이런 곳에 아이를 내박쳐 두다니……. 정말 내 가문이지만 못된 가문이야.
물론 후작가는 카르시안에게 했던 모든 잘못들은 나중에 죽음으로 청산하게 된다. 독자들에게는 사이다를 주는 장면이었지만, 나에게는 절대 아니다.
왜냐면 그때 나도 함께 죽으니까.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그를 돌아봤다. 카르시안은 수잔에게 받은 음식을 들고 식탁 겸 책상으로 가다 나를 봤다.
“뭐.”
여전히 경계심이 잔뜩 배인 목소리에 나는 가능한 한 무해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그냥…….”
그런데 할 말이 떠오르질 않았다.
이 방에서 생활하기 불편하지?
……이건 당연하고.
내가 방을 옮겨 달라고 부탁해 볼까?
……당장 나부터가 사생아인데 무슨 힘으로?
나는 조용히 한숨을 삼켰다.
분명 나는 후작 영애인데, 카르시안 한 명조차 책임지지 못한다는 사실에 무력감이 들었다. 결국 할 말을 찾지 못한 채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 카르시안은 그런 나를 싱겁다는 듯 보고는 마저 걸음을 옮겼다.
나는 그가 앉는 책상을 힐끔거리다가 의외의 물건을 발견했다.
“어? 이건 세이렌 편지지잖아?”
“만지지 마!”
별생각 없이 물은 건데, 카르시안이 갑자기 목소리를 높이며 그 편지지를 와락 끌어안았다.
“어, 어?”
나는 아직 손조차도 뻗지 않은 터라 조금 얼떨떨했지만, 그 순간 원작의 내용이 떠올랐다.
저 편지지는 카르시안의 아버지가 떠나기 전에 사 준 선물이었다.
‘이 편지지만 있으면 망망대해 그 어디에서도 연락을 할 수 있다. 우리는 비록 한동안은 떨어져 있겠지만, 그 마음만큼은 결코 멀리 있지 않을 것이다.’
사실 카르시안은 저도 아버지를 따라 무역을 가겠다고 떼를 썼었다. 그러나 해적과 미지의 생물들이 득실거리는 바다는 어린아이에게 무척이나 위험했기에, 백작은 완강히 거부했다.
그 대신 혼자 남는 것을 두려워할 아들을 위해서 사별한 아내의 브로치까지 저당을 잡고 저 편지지를 사 줬다. 이러한 사정은 카르시안도 알기에 그의 유년 시절, 저 편지지는 무척 소중한 보물이었다.
하지만 저건…….
나는 편지지가 뺏길까 봐 잔뜩 긴장하고 있는 카르시안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거, 써 봤어?”
“……뭐?”
“최근에 편지 보내 봤어? 너, 그걸로 아버지랑 연락하고 있잖아.”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카르시안이 의아하면서도 수상쩍다는 시선을 보냈다.
아차.
나는 황급히 머리를 굴렸다.
“상단이 들고 다니는 카탈로그를 읽었어. 세이렌 편지지가 있으면 바다 한가운데에 있는 사람과도 아무 때나 연락을 할 수 있다고 말이야.”
바다를 건너가는 사절단이나 황족이 순방을 할 때 쓰는 물건이어서 무척이나 비싸다는 것도 말했다. 카르시안은 그토록 귀한 물건을 제게 사 준 아버지에게 새삼 감동한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답장이 오지 않아.”
그는 잔뜩 날이 선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마치 ‘너희 가족이 중간에서 가로채고 있는 건 아니야?’ 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음, 계속 보니까 어째 아기 길고양이가 떠오르네. 특히 표정에 생각이 그대로 드러난다는 점이 말이다.
“……중간에서 빼돌렸고 있는 거 아냐?”
카르시안의 말에 잠깐 다른 생각으로 빠졌던 나는 얼른 현실로 돌아왔다. 그에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중간에서 빼돌린 게 아니고, 도착하지 못한 거야.”
“도착하지 못했다고?”
“응. 카탈로그에서 읽었는데, 사실 이 편지지엔 세이렌을 다스리는 마법약이 발라져 있대.”
“그건 알아.”
“그럼 수신인란에는 그 사람을 찾는 마법이 걸려 있다는 것도 알아?”
“알아. 그래서 그 마법이 안내하는 대로 훈련된 세이렌이 날아가는 거잖아. 날 바보 취급하는 거야?”
카르시안이 으르렁거렸다.
“그런 뜻은 아니었는데…….”
내가 나직하게 중얼거리며 눈을 내리깔자, 카르시안이 움찔거렸다. 그는 잠시 뜸을 들이다 물었다.
“……근데 왜, 편지가 도착하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건데?”
나는 그에게 조금 다가가 편지지를 손가락질했다.
“습한 곳에 있으면 마법약의 냄새가 사라진대. 그래서 항상 뽀송한 곳에 보관해야 한다고 했어.”
순간 카르시안의 숨이 잠깐 멈췄다. 그리고는 멍한 얼굴로 아직 많이 남은 편지지들을 내려다봤다.
“습한 곳…….”
카르시안이 애처로울 만큼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탁한 한숨을 뱉었다. 식자재 창고를 개량한 탓에 이 방은 습한데다가 눅눅하기까지 했다. 편지지가 변색되는 것도 당연했다.
그 순간 내 머릿속에 제법 괜찮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난 지금 그에게 점수를 따야 하는 상황이다.
점수를 따려면 일단 경계부터 풀고, 그가 나를 조금은 신뢰를 하게 만들어야겠지?
그리고 사실 저 편지지를 습한 곳에 보관하게 만든 이는 우리 후작가다. 난 그가 이러한 사실을 깨닫고 자신에게 화를 내기 전에 얼른 말했다.
“내가 도와줄게.”
“……뭐?”
“그 편지지, 아주 못 쓰는 건 아니야. 습한 편지지를 뽀송하게 말리고 새로 약을 바르면 되는 거니까.”
“하지만 그게…….”
카르시안은 탁한 공기가 내려앉은 방을 둘러봤다. 확실히 이런 방에서는 무리였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그거 나한테 좀 줄래?”
“뭐라고?”
“음, 아까 봐서 알겠지만 내 방엔 햇빛이 들어. 놀리려는 게 아니고.”
나는 그가 반박할세라 얼른 말을 이었다.
“내 방에서 편지지를 말리면 어떨까? 그리고 그 마법약, 아버지의 서재에 있는 걸 봤어.”
“그게 정말이야?”
“응.”
지난 생에서 아버지를 도와 장부를 정리하다가 봐서 알고 있다. 바다라면 질색하는 아버지의 서재에 이런 게 왜 있나 싶었는데, 알고 보니 그것도 백작이 사 주고 간 것이었다.
원작에서 백작이 카르시안더러 왜 연락을 하지 않았냐고, 마법약도 사 주고 가지 않았냐고 하는 장면이 있었다. 다만 마법약이라 아이에게 장기간 노출되면 위험해서, 어른이 보관하고 있었다는 서술과 함께.
나는 카르시안에게 조심스럽게 제안해 봤다.
“그러니까 내 방에서 편지지를 뽀송하게 말리고 마법약을 발라서 너한테 줄게. 어때?”
내 말을 들은 카르시안은 잠시 망설였다. 그러다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널 어떻게 믿어?”
날카롭게 말하는 목소리는 신경질적이었다. 나는 잠시 입을 벌렸다가 다물었다.
하긴 나 같아도 저런 반응을 보였을 것 같긴 해. 여태 나를 괴롭히던 애가 갑자기 잘해 준다고 해서 어떻게 바로 믿을 수 있겠어?
나는 백번 이해한다는 얼굴로 카르시안에게 조심스레 말했다.
“하지만 이 방법이 아니면 그 편지지는 못 쓸 거야.”
“…….”
“나를 못 믿겠으면 수잔을 믿는 건 어때?”
수잔은 그래도 좀 우호적이잖아.
난 여기에 조금 기대를 걸었지만.
“싫어.”
카르시안은 딱 잘라 거절했다.
‘그녀도 결국 네 수족이잖아.’
그런 표정이었다. 그는 이미 내린 결정을 번복할 생각일랑은 조금도 없어 보였다.
사실 회귀 전의 나였다면 편지지를 들고 얼른 어머니에게 달려갔을 거다. 카르시안도 내가 그러리라 예상하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완강하게 버티는 것일 터. 이 모든 것을 알고 있기에, 나는 어쩔 수 없이 알겠다며 뒤로 물러났다.
여기서 내가 더 밀어붙이다간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게 분명해!” 하고 더 반감을 살 수도 있다. 차라리 잘못을 저지르기 전이면 모를까, 이미 잘못을 한 후라서 수습하기가 까다롭다.
나는 카르시안의 눈치를 보다 말했다.
“그럼 난 이만 가 볼게. 하인도 지나간 것 같고, 또 베티가 불시에 감시하러 오면 곤란하니까.”
카르시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나와 수잔은 복도에 인기척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그의 방에서 나왔다.
수잔이 조심스레 물었다.
“저대로 두어도 괜찮은 걸까요?”
“편지지 말이야?”
“그것도 그렇지만, 카르시안 도련님이요.”
수잔은 영 걱정된다는 듯 눈썹 사이를 오므렸다. 나는 그런 수잔을 보다 슬쩍 뒤를 돌아봤다.
빼꼼 열린 문틈 사이로, 카르시안의 붉은 눈동자와 마주쳤다. 그는 깜짝 놀라 움찔거리고는 이내 문을 닫아버렸다.
정말 아기 고양이가 어설프게 경계하는 것 같아.
슬쩍 웃으며 수잔에게 대답했다.
“내가 봤을 때는 괜찮을 것 같아. 그리고 조만간 나한테 올 거야.”
“네? 정말요?”
“응. 왜냐면 내가 무릎을 꿇어도 안 바른다던 연고를 되돌려주지 않았잖아.”
“어머! 정말요!”
수잔이 생각지도 못했다며 웃었다.
“연고 덕분에 상처가 나으면 아가씨의 진심이 통할 거예요.”
“응. 맞아.”
그러면 카르시안의 닫힌 마음이 아주 조금이라도 열릴 게 분명했다.
* * *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났다.
“오늘도 안 오는데요?”
나는 수잔의 말에 읽고 있던 책에 책갈피를 끼웠다. 수잔은 걱정 어린 표정으로 문 쪽을 돌아보고 있었다.
카르시안은 결국 내게 찾아올 거라고 자신만만하게 말했던 게 일주일 전.
장장 일주일이 지나도록, 카르시안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러한 것쯤은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다.
“괜찮아. 카르시안은 원래부터 조심성이 많잖아.”
그런 아이가 아버지의 친구인 후작이 손바닥 뒤집듯이 태도를 바꾸는 모습을 봤다. 그리고 후작가의 사람들도, 나도, 모두 그를 괴롭히는 데에 앞장섰다.
“카르시안의 마음은 평소보다 더 단단히 닫혀 있을 거야.”
그러니 분명 일주일, 아니, 그 이상의 시간을 들이며 천천히 나를 가늠하려 할 터.
“더 기다리면 돼. 사람을 믿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은 모두 다른 법이라고, 저번에 수잔이 그랬잖아.”
언제였더라, 내가 6살쯤이었던 것 같다.
나는 수잔과 함께 정원을 거닐다가 날개를 다친 새를 발견했다. 우리는 그 새를 정성껏 치료해 줬지만, 아기 새는 좀처럼 마음을 열지 않았다.
‘내가 이렇게 잘해 주는데, 저 새는 왜 나를 믿어 주지 않아?’
속상한 마음에 투정을 부리듯 말하자, 수잔은 다독이듯 말했다.
‘필요한 시간이 달라서 그래요.’
‘필요한 시간?’
‘네. 아가씨는 워낙 순해서 누군가를 믿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짧지만, 경계심이 많은 이들은 아주 오랫동안 상대를 살펴봐야 믿거든요.’
수잔의 말을 듣고 나는 아기 새가 나를 믿을 수 있도록 충분한 시간을 내어 줬다. 그러자 아기 새는 언제 손가락을 쪼며 경계했냐는 듯이, 우리를 무척이나 잘 따르게 됐다.
“카르시안도 그 아기 새랑 마찬가지겠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하자, 수잔도 아기 새를 떠올렸는지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맞아요. 이번엔 제가 성급했네요.”
수잔은 부끄럽다며 제 뺨에 손등을 대며 말했다.
“그런데 요즘 그 새가 통 보이지 않네요?”
“음…….”
새장에 갇혀 사는 것보다는 자유롭게 사는 게 행복할 거라는 수잔의 말을 듣고 풀어 줬다.
“그러게. 예전엔 가끔 놀러 오기도 했던 것 같은데.”
회귀 전에도 카르시안을 괴롭히기 시작한 무렵부터 안 보였던 것 같다.
“찾으러 가 볼까요?”
“음…… 좋아. 정원에 안 나간 지도 꽤 됐으니까.”
난 책갈피를 끼운 책을 내려 두고 의자에서 폴짝 뛰어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