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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죽일 남주를 길들여버렸다-4화 (4/186)

4화

카르시안 라움디셀, 이제 갓 10살이 된 소년은 쥐가 다닌 흔적이 역력한 창고에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그가 살게 된 지 1-2주가량이 지났으므로 이제는 그의 방이었다.

카르시안은 녹슨 의자에 앉아 곰팡이 냄새가 나는 천 밑에 숨겨 둔 뭔가를 꺼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편지지였다.

카르시안은 눅눅한 편지지를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이상해. 분명 이 편지지를 쓰면 언제든지 연락을 할 수 있었는데…….”

그가 쥐고 있는 편지지엔 특별한 액체가 묻어 있었다. 바로 아름다운 노래로 뱃사람을 꾀곤 하는 세이렌을 전서구로 이용할 수 있는 마법약이었다. 그 덕에 세이렌의 편지지만 있으면, 망망대해 어디에 있든 내륙과 소통을 할 수 있었다.

다만, 그 가격은 천문학적이라 아무나 쉬이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은 아니었다. 라움디셀 백작은 자신의 생존을 알릴 겸, 하나뿐인 아들을 안심시킬 겸 거금을 들여 이 편지지를 샀다.

그것을 알기에 카르시안의 보물 제1호는 바로 이 편지지였다. 카르시안은 라움디셀 백작이 보내온 답신을 주욱 훑어봤다.

“3개월 전이 마지막이라…….”

호롱불보다 못한 빛에 의지해 빛나던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잿빛이 됐다. 라움디셀 백작이 항해를 떠난 3개월이 지나자 답신은 더 이상 돌아오지 않았다.

“이게 내 쪽에서 서신이 보내지지 않는 건지, 아니면 아버지 쪽에 정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지…….”

카르시안은 성마른 손으로 어두운 표정을 짓는 얼굴을 쓸어내렸다.

“차라리, 차라리 전자였으면 좋겠는데…….”

지난 6개월간, 백작의 친우이자 지금 그를 맡아 주고 있는 후작은 퉁명했지만 제법 친절했다. 하지만 사람들의 관심이 잦아들자, 그는 손바닥을 뒤집듯이 태도를 바꿨다.

‘사람들의 관심은 줄었다 하더라도, 갑작스럽게 처분할 수는 없어.’

‘애물단지가 따로 없군!’

‘백작 영식은 얼어 죽을 영식! 마구간 일이라도 시키도록 해! 밥값은 해야 하지 않겠어?’

처음엔 크게 앓을 정도로 충격을 받았지만,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더니 이젠 또 익숙해졌다.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익숙해지지 않는 것이 있었으니.

‘멍청한 놈! 아직도 네 아비가 죽었다는 걸 몰라!’

바로 자신의 아버지가 죽었을 거라는 저주였다.

카르시안은 어느새 촉촉해진 눈가를 닦아 냈다.

“아니야. 아버지께선 돌아가시지 않았어. 기필코 돌아오실 거야.”

카르시안은 무서운 마음을 달래듯 이를 까득 물었다. 어서 빨리 아버지를 만나 그동안의 설움을 토로하고 싶었다.

그때, 문득 머릿속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만두려고.’

라티아였다. 동시에 밀빛 머리칼에 차분한 보라색 눈동자가 예쁘장한 얼굴도 선명히 떠올랐다. 카르시안의 머릿속에서, 라티아가 오밀조밀한 입술로 말했다.

‘사실은 너도 눈치채고 있을 거 아니야. 내가 이 가문에 진짜 가족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는 거.’

그녀의 말이 맞았다. 카르시안은 라티아가 처한 상황을 이미 알고 있었다.

“사생아라…….”

하인들은 라티아가 죽은 하녀의 아이이자, 가문의 천덕꾸러기라는 것을 숨길 생각도 없는 듯 보였다.

‘내 앞에서도 곧잘 라티아의 흉을 보곤 했으니까.’

언제였더라? 최근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카르시안은 마구간 청소를 하러 가던 중, 후작 부인이 라티아에게 속살거리는 말을 들었다.

‘사용인이 너를 무시했다니? 어머니로서 두고 볼 수가 없구나.’

‘흑, 그리고 제 드레스에서 시침 핀도 뽑지 않았어요.’

‘세상에, 다치진 않았니? 걱정이 되는구나.’

‘정말요? 저를 정말로 걱정해 주시나요?’

‘그럼, 나는 너의 어머니인걸.’

카르시안은 어딘가 이상한 대화를 엿들으며 의구심을 가졌다.

‘이상하네. 사용인에게 라티아를 더욱 무시하라 했던 사람도, 시침 핀을 빼지 않은 드레스를 입히라고 지시한 사람도 모두 후작 부인이라 들었는데.’

카르시안의 방은 식자재 창고 옆에 있었기 때문에 사용인들의 시시콜콜한 이야기가 곧잘 들려왔다.

레이시나는 라티아에게 사용인에게 당한 분풀이 상대를 주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이가 바로 카르시안이었다. 또 레이시나는 카르시안을 괴롭힐 때마다 어른이 되어 가는 걸 축하한다며 쿠키를 주겠다고도 했다.

어린 카르시안이 듣기에도 말도 안 되는 소리였지만, 그보다 어린 라티아는 이상한 점을 눈치를 채지 못했다.

‘그저 어머니의 칭찬에 기뻐할 뿐이었지.’

라티아는 그녀에 대해 잘 모르는 카르시안이 보기에도 부모의 애정에 목이 말라 있었다.

‘그래서 라티아는 사리 분별을 하지 못하고 후작 부인이 예뻐해 준다는 말에 스스럼없이 나를 괴롭혔지. 거기엔 일말의 죄책감도 없어 보였는데…….’

그랬던 그녀가, 별안간 카르시안을 괴롭히는 것을 멈췄다.

‘수잔이 그랬는데, 그건 사랑이 아니래.’

그리고 죄책감에 흐리게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그때의 표정은 도저히 동일 인물이라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의젓…… 아, 아니야.”

카르시안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다가 빠르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조금 전부터 꼬르륵 소리가 나고 있는 배를 움켜쥐었다.

“봐, 결국엔 이렇게 됐잖아.”

그는 비릿하게 웃으며 하녀가 했던 말을 상기했다.

‘라티아 아가씨께서요. 오늘 하루는 쫄쫄 굶기시라네요.’

언제부터 사생아 라티아의 말을 그렇게 잘 들었던 건지. 하녀는 어쩔 수 없다는 양 말하고는 도망치듯 자리를 떴다.

“내가 변덕대로 따라 주지 않았더니 바로 되돌아간 것 좀 보라지.”

후작 부인 때문에 자신을 괴롭힌다는 건 알고 있어도, 괴롭힘당하는 입장에서 듣기에 그 말은 그저 변명이었다. 카르시안은 여러모로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책상에 엎드렸다.

“아버지, 보고 싶어요.”

습한 목소리가 한숨처럼 나왔다. 그러던 중, 누군가가 노크를 했다. 깜짝 놀란 카르시안은 저도 모르게 펄떡 뛰었다.

‘이 시간에 대체 누구지? 날 찾아올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카르시안이 경계하며 가만히 기다리자 상대가 정체를 밝혔다.

“저기, 나야. 라티아.”

분명 조곤조곤한 목소리인데도 불구하고 카르시안은 아까보다 더 크게 놀랐다.

‘라티아라고? 이 시간에 왜…….’

순간 무슨 꿍꿍이인가 싶어 호기심이 동했지만, 그가 할 말은 하나였다.

“꺼져.”

카르시안은 그녀가 돌아가거나 길길이 날뛰거나, 둘 중 하나의 행동을 보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뜻밖이었다.

“문 좀, 잠깐만 열어 줘.”

“내가 왜.”

“음식을…… 조금 가져왔어.”

눈치를 보듯 뜸을 들이며 하는 말에 카르시안은 문 쪽을 확 돌아봤다. 동그랗게 뜨인 붉은 눈이 잠시 흔들리나 싶었지만, 이내 그는 마음을 다잡듯 다시 고개를 돌렸다.

“애초에 내게 밥을 주지 말라 한 건 너면서, 이제 와서 무슨 변덕이지?”

카르시안은 다 알고 있으니 넘어가지 않겠단 뜻으로 말했지만, 상대는 이번에야말로 펄쩍 뛰었다.

“아니야! 난 그러지 않았어! 그건 다 거짓말이야. 내가…… 내가 너를 괴롭히지 않아서 어머니가 벌을 준 거야.”

“벌?”

“그래. 나에게도, 너에게도.”

우물쭈물하며 말하는 내용에 카르시안의 얼굴이 의아함으로 가득 찼다.

“나도…… 하루 종일 굶었거든. 그래서 저기, 수잔이 밤에 몰래 음식을 가져와 줬어. 그런데 수잔이 너도 굶었다지 뭐야.”

그래서 나눠 먹으려고 가져온 거라며, 라티아는 웅얼거렸다.

카르시안은 믿기지 않았다.

‘대체 무슨 꿍꿍이지?’

그 예쁜 얼굴로 무슨 생각을 했기에 하루아침에 이렇게 바뀐 걸까?

라티아는 일주일 전만 해도 어머니의 사랑을 바라며 카르시안을 괴롭혔다. 그랬는데 지금은 그 어머니의 벌에도 굴하지 않고 음식을 나눠 주러 왔단다.

‘하, 손바닥 뒤집듯 태도가 쉬이 변하는 건 이 집안사람들 특징인가?’

카르시안은 일부러 모진 생각을 했지만, 그는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결코 라티아의 시무룩한 목소리 때문은 아니야.’

계속 꼬르륵거리다 못해 쓰라린 속 때문이라고, 카르시안은 재차 생각했다.

‘뭐…… 적어도 독은 들어 있지 않겠지.’

아무리 세간의 관심이 식었다 하더라도, 후작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여 카르시안을 내다 버리지도 못했다. 또 후작은 바깥에선 정중하고 교양 넘치는 귀족을 연기하고 있었다.

‘그러니 내가 갑작스럽게 죽는 불상사로 부정적인 시선이 생기는 것은 원치 않을 터.’

그런 생각을 하며, 카르시안은 천천히 문을 열어 줬다.

* * *

나는 솔직히 속으로 조금 놀랐다. 카르시안이 이렇게 쉽게 문을 열어 줄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이미 그가 욕을 한바탕 퍼붓고, “독을 넣은 건 아니겠지?” 하는 의심까지 받을 각오를 마쳤다. 하지만 카르시안은 빼꼼 문을 열고는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내가 들고 있는 음식을 살폈다. 고작 가져온 것이 이거냐는 듯 한숨을 내쉬긴 했지만, 다른 말은 없었다.

그것에 안도하며 카르시안에게 빵과 수프를 건네던 때였다.

“하암, 졸려 죽겠네. 이렇게 조용한데, 순찰은 무슨 순찰…….”

모퉁이 너머에서 순찰을 도는 하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헉.”

나도 모르게 헛숨을 들이켜며 하인의 발걸음이 가까워지고 있는 복도를 돌아봤다. 나는 지금 카르시안을 괴롭히지 않았다는 이유로 쫄쫄 굶는 벌을 받고 있었다. 그런 내가 음식을 들고 있는 걸 들키면 내일 더 큰 벌을 받을 게 뻔했다.

게다가 나는 지금 카르시안에게 음식도 나눠 주고 있는 상황!

“아가씨, 숨어야 해요!”

수잔이 조급한 목소리로 속삭인 그 때, 카르시안이 문을 열며 비켜섰다.

“들어와.”

“……어?”

난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음식만 주고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들어오라니?

“벌을 받고 있다며? 들키면 곤란한 거 아니야?”

아니면 그건 거짓말이었느냐며, 카르시안의 얼굴이 순식간에 흉악해졌다.

“아니야! 진짜야!”

나는 얼른 고개를 가로젓고는 수잔과 함께 헛간 같은 방으로 숨어들었다. 카르시안은 하인이 모퉁이를 돌기 전에 얼른 문을 닫아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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