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그러나 그날 밤, 나는 카르시안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대신 주먹을 움켜쥐며 외쳤다.
“이건 아니잖아!
나는 씩씩거리며 달이 휘영청 뜬 창문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벌써 새벽이다. 이 새벽이 될 동안, 나는 물 한 모금도 마시지 못했다.
왜냐하면.
“다이어트를 해야 한다고 쫄쫄 굶기는 게 말이나 돼?!”
내게 앙심을 품은 베티가 어머니에게 미주알고주알 일러바쳤기 때문이다. 나는 분을 못 이기지 못하고 발까지 동동 굴렀다.
베티를 내쫓을 때, 솔직히 어떤 형태로든 후폭풍이 휘몰아칠 거라고 짐작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게 점심때부터 내리 굶기는, 이런 치사한 방법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래, 베티는 어머니의 수족였지. 그러니 어머니와 손 잡고 날 괴롭힐 거라 예상했어야 했는데……!”
전생에서 읽은 원작에 대해서만 생각하느라, 정작 회귀 전의 삶을 떠올리지 못 했다. 원작은 우리 가문이 몰살 당한 이후에 시작 되어, 이런 사소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는 걸 간과했다.
“그래. 원작도 원작이지만, 당분간은 원작이 아니고 회귀 전 생을 떠올리는 게 낫겠어.”
그래야 저택이 돌아가는 꼴을 좀 알 것 같았다.
회귀 전, 어머니는 갑자기 나에게 베티를 하녀로 배정해 줬다. 그 땐 멍청하게도 ‘어머니가 나에게 수족 하녀까지 내어 주시다니!’ 하고 기뻐했다.
“나의 감시역으로 보낸 거였어.”
나는 씨근덕거리며 중얼거렸다.
어머니가 어떤 의도로 나를 감시하려 하는 건지는 아직 잘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해졌어.”
바로 이런 식으로 사생아인 나를 괴롭히려고 한다는 것. 베티는 어머니의 의도 대로 제 역할에 충실하여 낱낱이 보고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어머니께서 그렇게 바로 오시지 못했겠지.”
카르시안이 뛰쳐나간 후, 난 수잔과 함께 마주 앉아 쿠키와 우유를 먹고 있었다. 내가 어떻게 해야 카르시안의 화를 풀어 줄 수 있을까 함께 고민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그때 어머니가 느닷없이 찾아왔고,
‘살이 쪘네. 이러면 영식들에게 인기가 없을 텐데.’
갑자기 내 흉을 봤다. 무슨 미친 소린가 싶어 멍하니 바라보니, 어머니는 딱 한 마디만 남기고 나가 버렸다.
‘오늘 하루 동안은 아무것도 먹지 마렴. 살을 빼야지.’
그러니까 나의 마지막 끼니는 낮에 수잔과 나눠 먹은 쿠키 하나와 우유 반 잔이 끝이었단 말이다.
꼬르륵…… 뱃가죽이 등에 달라붙는 소리가 들렸다.
“끙…… 열을 냈더니 배가 더 고프네…….”
난 힘이 하나도 없어 축축 처지는 걸음으로 침대로 향했다.
조금 전, 수잔은 바깥의 눈치를 살피다 먹을 것을 조금 가져오겠다며 나갔다. 물론 별 기대는 하지 않는다.
“어머니가 어떤 분인데…… 아주 작정을 하셨으니 남은 음식도 전부 버렸을걸.”
그렇지 않아도 회귀 전부터 어머니는 내가 먹는 것을 유독 아까워했다. 기본적인 식사는 물론이고 귀한 디저트는 모두 동생, 엘레네의 몫이었다. 그때는 나를 예쁘게 가꿔 주시는 줄로만 알았는데, 웬걸. 그냥 싫었던 거였다.
그뿐만 아니라 내가 입고, 걸치는 옷과 장신구는 모두 엘레네의 것이었다. 보통 언니의 물건을 동생이 물려받지 않나? 나는 그 반대였다.
내가 이것에 대해 물어보자, 어머니는 내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엘레네가 욕심이 많은 걸 알잖니. 동생을 위해야 착한 언니지?’
그때는 그 쓰다듬 한 번이 좋아서, 나를 엘레네의 언니라고 불러 주는 게 좋아서 넘어갔다.
“멍청하게도…….”
나는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그 외에도 황성 파티에 장녀인 내가 아닌 엘레네를 데리고 가거나, 엘레네의 약혼부터 진행시킨 것 등. 좋은 건 무조건 엘레네의 차지였다.
이유가 정말 궁금했는데, 이제는 알겠다.
“다 내가 사생아여서 그랬구나.”
나는 흐리게 웃으며 이불에 얼굴을 묻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사랑받기 위해 노력하던 지난 생이 너무도 비참하고 씁쓸했다.
그쯤, 수잔이 돌아왔다.
“아가씨, 음식을 가져왔어요!”
“어? 정말?”
나는 깜짝 놀라 벌떡 몸을 일으켰다.
수잔은 정말로 빵 두 덩어리와 묽은 수프 한 접시를 들고 있었다.
“어디서 났어? 어머니께서 분명 버렸을 거라 생각했는데……!”
빵은 조금 굳어 있었고 수프는 차가웠지만, 내리 굶은 탓에 아주 먹음직스럽게 보였다.
“요리장이 자신이 먹으려던 야식을 내어 줬어요.”
“야식을?”
“네. 저희가 못 먹은 줄 알았으면 미리 빼놨을 거라며 미안해하기도 했고요.”
그렇다는 말은 만들기는 다 만들었으나, 나중에 빼돌려서 버렸다는 말이다. 혹여나 누군가가 나를 도울까 봐 다른 시종들에겐 말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어서 드세요, 아가씨. 배가 많이 고프시잖아요.”
수잔은 미안한 얼굴로 나에게 빵 두 덩어리와 수프를 모두 내밀었다. 가져온 게 겨우 이런 거여서 면목이 없다는 듯이.
나는 그런 수잔에게 빵 한 덩이를 집어 건넸다.
“같이 먹자.”
“네?”
“수잔도 나 때문에 계속 갇혀 있느라 아무것도 못 먹었잖아.”
“하지만…….”
“그리고 이 수프도.”
난 수잔이 밀었던 수프를 다시 그녀 쪽으로 밀었다.
“같이 먹자. 빵만 먹으면 퍽퍽해.”
“아가씨이…….”
수잔은 빵을 쥔 채 찡하게 감동받은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험험, 뭐 이런 일 가지고 그렇게까지 감동을 받고 그래…… 라고 하기엔 내가 상당히 나쁘게 굴었지. 하지만 이번 생에선 절대로 그러지 않을 거야.
난 굳게 다짐하며 수잔에게 말했다.
“어서 먹자.”
“네, 아가씨.”
수잔은 나직하게 훌쩍거리다가 수프를 다른 그릇에 덜어 한 모금 떠먹었다. 나는 수프도 안 먹고 허겁지겁 빵부터 해치웠다. 그런데 수잔은 수프만 조금 먹을 뿐, 좀처럼 빵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수잔, 빵이 딱딱해서 그래?”
“네? 아, 아니요.”
수잔은 손으로 조그맣게 떼어 먹은 빵을 내려다보며 멋쩍게 웃었다.
“사실은요.”
“응?”
“카르시안 도련님도 굶으셨다고…… 들어서요.”
“……뭐?”
걔는 왜?
나는 입가에 묻은 빵가루를 털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게…… 아가씨가 갑자기 착한 척을 하고 있다고 했어요.”
“착한 척?”
“네. 도련님을 괴롭히지 않은 거요. 다른 이들이 그걸 그렇게 이야기하더라고요.”
수잔이 음울하게 말했다.
“그게 다 위선이라고…… 그게 더 못된 거니까 벌을 줘야 하는데, 피해를 본 사람이 있어야 반성을 할 거라고 했다네요.”
“그러니까…… 내가 카르시안을 괴롭히지 않아서 지금 그 아이가 굶고 있다는 말이야?”
“저도 음식을 숨겨서 가지고 오기에 급급해서 자세히는 몰라요. 다만, 마님의 하녀들이 지나가며 그렇게 말했어요.”
“하…….”
“그래서 좀…… 신경이 쓰여서요.”
수잔의 말에 나는 입을 딱 다물었다.
내가 괴롭히지 않으면 카르시안에게 ‘나’로 인한 피해는 가지 않을 줄 알았다. 그런데 이렇게 ‘내’가 잘못했기 때문에 부당한 대우를 받게 하다니! 이러면 내가 카르시안을 직접적으로 괴롭히지 않아도, 간접적으로 괴롭히게 된 꼴이 된다.
나는 손도 대지 않은 수프 그릇을 바라보다 말했다.
“그럼 이걸 주자.”
“……네?”
“내 몫의 빵은 다 먹어서 없지만, 아직 수프는 먹지 않았어.”
그에 비해 수잔은 수프를 다 먹고 빵을 남겨 카르시안에게 줄 예정이다.
“그러니 반반씩 해서 카르시안에게 주자.”
“아가씨…….”
수잔은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감동을 받은 얼굴로 입가를 가렸다.
“그렇죠. 우리 아가씨께선 이렇게 다정하고 따듯한 분이셨죠…….”
순간 감격한 듯 내리 감은 수잔의 눈꼬리에 눈물이 살짝 비쳤다.
아, 아니. 뭐어……. 애초에 카르시안이 굶은 건 내 탓인데.
나는 멋쩍은 기분에 손만 꼼지락거리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서 가자. 벌써 잠들었을지도 모르지만…….”
“아직 주무시지는 않을 거예요. 불이 켜져 있는 걸 얼핏 봤거든요.”
수잔이 얼른 수프 그릇을 집어 들며 말했다. 나는 그런 수잔의 뒤를 따르려다가 문득 생각난 것이 있어 탁상 쪽으로 달려갔다. 수잔이 궁금한 얼굴로 나를 지켜봤고, 나는 탁상에서 그녀가 가져왔던 연고를 꺼내 들었다.
“카르시안이 뛰쳐나간 후로 발이 묶여 결국 못 줬잖아. 겸사겸사 주고 오면 어떨까 싶어서.”
밥이랑 같이 주면 조금은 덜 경계하지 않을까, 하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그에 수잔은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몰래 나가 볼까요?”
우리는 그렇게 모두가 잠든 틈을 타서 조용히 카르시안의 방으로 향했다.
원래 그의 방은 내 방과 같은 층의 구석진 곳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의 관심이 식자 그는 곧장 식재료 창고 옆의 헛간 같은 방으로 내몰렸다.
수잔의 말대로 문틈 사이로 불빛이 새어 나왔다.
“다행이다, 아직 안 자나 봐.”
작게 속삭이자, 그녀는 어서 문을 두드려 보라는 듯 시선을 건넸다. 나는 연고를 쥔 채 똑똑, 작게 노크를 했다. 곧이어 안에서 작은 인기척이 들렸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카르시안은 우리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있으니 만사를 경계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나는 목을 가다듬고 먼저 말했다.
“저기, 나야. 라티아.”
잠깐 침묵이 흘렀다. 이후로도 아무런 대답이 없어, 나는 문 쪽으로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때마침 대답이 돌아왔다.
“꺼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