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빛 한 점 들지 않는 새까만 머리카락, 나를 쏘아보는 형형한 붉은 눈. 뺨에 상처가 나긴 했지만, 10살치고는 너무도 수려하게 생긴 예쁘장한 얼굴.
이리 보고 저리 봐도, 눈앞의 소년은 내가 환생한 소설의 남자주인공 카르시안 라움디셀이 맞았다.
그것도 내가 된통 괴롭혔던!
나는 고개를 돌려 근처의 아무 거울에 나를 비춰 봤다.
깨끗한 밀빛 금발, 보라색 눈동자, 흉터 하나 없는 복숭아색 뺨…….
오랜 구금 끝에 사형대에 오른 꾀죄죄하고 초췌했던 때와는 확연히 달랐다. 역시 나는 돌아온 게 맞았다.
이게…… 회귀라는 건가? 나는 책 속에 환생해서 죽고, 또 회귀까지 한 거야? 그렇다면 정확히 언제로 돌아온 거지?
“아가씨……?”
수잔이 나를 조심스럽게 불렀다.
그래, 아직 수잔이 있어.
우리 가문 사람들은 카르시안을 맡은 직후엔 그를 괴롭히지 않았다.
아니, 못했던 거지.
워낙 많은 이들이 ‘해적들이 드글거리는 바다로 무모한 무역을 떠난 멍청한 백작의 아들’인 그를 궁금해했으니까.
그 관심은 돈으로 이어졌고, 아버지는 한동안 카르시안을 대우해 줬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사람들의 관심과 함께 돈이 끊기자 카르시안은 애물단지가 됐다.
그게 카르시안이 우리 집으로 오게 된 지 약 6개월 후 전후였던 것 같은데.
수잔은 카르시안이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감싸주다가 혼자 위선을 떨었다는 이유로 쫓겨났다.
그리고 그 이후, 카르시안은 더욱더 괴롭힘을 당하지.
그런데 아직 수잔이 있는 걸로 봐서 카르시안의 괴롭힘에 박차를 가하는 7개월 차엔 접어들지는 않은 모양이다.
어떻게 해야 하지? 아니, 잠깐. 뭘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카르시안한테 싹싹 빌어야지!
때마침 카르시안이 까칠하게 물었다.
“왜 불렀어?”
상황을 보아하니 내가 또 카르시안을 괴롭히려고 방으로 부른 모양이다.
저번 생의 나라면 어머니에게 칭찬을 받기 위해 카르시안을 괴롭혔을 거다. 하지만 나는 모두들 죽을 거라 예상한 카르시안의 아버지가 금의환향을 하는 미래를 알고 있다. 그로 인해 내가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단 말이다.
달리 말하면 내가 카르시안을 괴롭히지 않으면 난 살 수 있다.
난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내가…… 너를 부른 건 다름이 아니고 다쳤다고 들었어.”
“…….”
“그래서 연고를 좀 주려고.”
그런데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수잔의 뒤에 서 있던 하녀가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아니, 아가씨.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응?”
어쩐지 잔뜩 화가 난 듯 들리는 음성에 나는 그녀를 쳐다봤다.
뺨에 콕콕 찍힌 주근깨, 녹색 눈동자, 거무튀튀한 적발을 질끈 묶고 있는 하녀는 다름 아닌 베티였다.
지난 생에서 수잔이 쫓겨난 이후, 나와 베티는 단짝처럼 붙어 다니며 카르시안을 괴롭히곤 했다. 나보다 먼저 참형을 당했기 때문에 막연한 그리움이 솟아오르려던 참이었다.
반갑게 그녀를 부르려고 했는데, 베티가 앙칼진 목소리로 말했다.
“아가씨, 제정신으로 하신 말씀이세요?”
“……뭐?”
“저런 식충이에게 비싼 연고를 주는 게 말이나 돼요? 왜 갑자기 머저리처럼 구시는 거예요?”
뭐라고? 머저리?
나는 충격으로 눈을 크게 떴다. 아니, 생각해 보면 충격받을 만한 일이 아니었다. 함께 카르시안을 괴롭히며 유대 관계를 쌓은 후엔 아니지만, 그 전엔 때때로 베티에게서 이런 폭언을 들었다.
순간 얼음송곳으로 찔리기라도 한 것처럼 뒷골이 짜르르하게 울렸다.
그래, 너도 알고 있었구나.
내가 사생아라는 걸, 그래서 가족들의 틈에 진짜로 섞여들지 못한다는 걸!
하녀인 베티가 내가 사생아라는 걸 알고 있다는 말은, 공작저의 대부분이 알고 있다는 말이 된다.
난 진짜 아무것도 아니었어.
평생을 내가 진짜라고 생각하며 살았는데, 사실은 모두들 나를 조롱하고 있었다. 그 사실에 갑자기 숨이 턱 막혔다. 죽기 전엔 몰랐던 진실이 지금 나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너무 괴로운 나머지 눈조차 깜빡이지 못하고 베티만 쳐다보고 있는데, 수잔이 외쳤다.
“베티! 아가씨께 그 무슨 무례한 망발이냐! 당장 사죄드리지 못해!”
그녀는 꼭 잡은 손이 덜덜 떨릴 정도로 분노하고 있었다. 베티의 언행과 나를 대하는 태도에 말이다. 아무래도 진짜 내 편이었던 사람은 수잔뿐이었던 모양이다.
나는 수잔이 꼭 잡아 주는 손을 더욱 세게 맞잡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베티를 쏘아봤다. 그리고는 할 수 있는 한 서늘하게 말했다.
“머저리? 머저리라고 했어, 지금. 나한테?”
7살짜리의 목소리라곤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냉랭한 목소리가 나왔다. 그에 수잔도, 베티도 잠시 주춤거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베티는 녹색 눈에 힘을 주고 말했다.
“그렇잖아요. 연고요? 저놈에게 연고를 주라고요? 아가씨, 방에만 계셔서 뭘 모르시나 본데.”
그녀는 마치 나를 가르치기라도 하듯 카랑카랑하게 말했다.
“연고를 만드는 약초들이 얼마나 귀한지 아세요? 아무한테나 줄 수 있는 게 아니라고요!”
팩 쏘아붙인 그녀는 여전히 나를 형형하게 쏘아보았다.
이것 봐라?
나는 수잔의 손을 놓고, 베티 쪽으로 한 걸음 걸어갔다. 그리고 베티의 표독스러운 녹색 눈동자를 똑바로 노려봤다.
사실 베티와 친해지기 전, 그녀는 수잔 몰래 나를 종종 때리곤 했었다. 교육이란 명목으로 말이다. 그 때의 기억 때문에 지금도 나는 베티가 손을 움직일 때마다 몸이 움찔거린다.
하지만 이래서는 안 된다. 난 내 목이 내리쳐지는 감각을 알고, 이대로 있다간 또다시 꼼짝없이 죽는다는 것도 알고 있다.
카르시안의 앞에서, 내가 그의 편이 될 것이라는 걸 명확하게 보여 줘야 한다는 뜻이다.
베티를 따라 그를 괴롭히는 게 아니고, 그를 도울 거란 걸 알려줘야 한다.
“베티.”
나는 베티를 향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약초가 비싼 걸, 내가 몰라서 이러는 줄 아니? 너는 후작가 장녀보다 얼마나 더 많이 알기에 내게 가르치는 거야?”
날카로운 말에 베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버릇 없게.”
“버, 버…… 뭐라고요?!”
베티가 어처구니 없다는 듯 소리쳤지만, 난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난 이 저택의 아가씨야. 당장이라도 너를 끌고 가 승냥이 떼의 밥이 되게 만들어 줄 수도 있어.”
베티의 입꼬리가 꿈틀거렸다.
마치 ‘사생아 주제에, 그럴 힘이나 있고?’ 하며 날 비웃는 모양새였다. 난 기가 찼지만 애써 무표정을 유지하며 말했다.
“베티. 너도 알겠지만 내 화장대에 있는 보석 중 하나만 줘도 후작가의 하녀 한 명 쥐도 새도 모르게 처리해줄 사람은 많아.”
내가 아무리 사생아라 하더라도 난 겉으로 아주 신사적인 후작가문의 장녀. 보석 한두 개는 갖고 있다. 난 베티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
“오래 살고 싶으면 주제를 알고 입을 놀리도록 해. 이런 충고, 두 번은 없을 줄 알아.”
나의 서늘한 경고에 베티는 자신을 도와줄 사람을 찾는 양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주변에는 나와 수잔 그리고 카르시안밖에 없었다. 결국 꼿꼿이 서 있던 베티의 몸이 무너졌다. 식은땀이 잔뜩 난 베티의 얼굴은 혼란스러워 보였다. 업신여기던 사생아 따위에게 무릎을 꿇은 게 치욕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나는 그런 베티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제야 좀 위치가 맞네, 베티.”
“…….”
“앞으로 나를 모실 땐 이렇게 있는 게 네 신상에 이로울 거야, 베티.”
베티의 어깨를 꽉 잡았다. 워낙 손이 작아서 꼬집듯이 움켜쥐는 게 고작이었지만, 베티의 표정은 사색이 되었다.
“알겠니?”
내 물음에 베티는 입술을 꽉 깨물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라티아 아가씨.”
그러며 이를 뿌득 갈았는데, 베티가 이 일을 얌전히 넘어가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뭐, 그건 나중에 생각하고.
일단 지금은 속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이제 나가.”
나는 그런 베티를 방 밖으로 내쫓기까지 하고 수잔을 올려다봤다.
“그럼 수잔, 어서 카르시안의 상처에 바를 연고를 가져와 줘.”
베티가 방해한 탓에 순서가 뒤로 밀리긴 했지만, 내 1순위는 어디까지나 카르시안이었다.
어차피 내가 사생아인 것도 만연하겠다, 이 가문은 멸문되겠다…….
부득불 여기에서 버티고 있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유모와 함께 도망을 친다고 하더라도 문제가 있다. 바로 우리 가문이 전원 사형을 선고받아 멸문한다는 거다.
아버지는 귀족들의 약점을 수집하곤 했는데, 건드려서는 안 되는 사람마저 건드려 버렸다. 이런 와중에 불법 격투장 운영과 영웅의 아들을 학대한 죄목은 아주 좋은 구실이 되었다.
요컨대 제아무리 꽁꽁 숨어도 나는 죽는다는 거지.
결국 내가 살아남는 방법은 라움디셀 백작이 귀환했을 때, 카르시안의 입으로 ‘쟤는 좀 착했어요.’ 소리를 듣고 면죄받는 것밖에는 없다는 말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일단 카르시안의 상처부터 보살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런데.
“무슨 꿍꿍이야, 너.”
몇 번 괴롭힘을 당한 카르시안의 마음속엔 이미 불신이 자리 잡은 모양이다.
“이번엔 어쩔 작정이냐고.”
하긴, 자신에게 잘 대해 줬던 아버지의 친구가 손바닥을 뒤집듯이 뒤바뀌어 손찌검을 하는 모습에 카르시안은 큰 상처를 받았을 거다.
“왜, 또 자선 파티에라도 데리고 나가야 하나 봐?”
가문 내에서 자신의 상황을 파악한 카르시안은 싸늘하게 뇌까리며 이죽거렸다.
나는 그런 카르시안을 가만히 바라보다 말했다.
“그냥.”
“……뭐?”
“그만두려고.”
“……뭐를.”
카르시안이 잔뜩 경계하는 고양이처럼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나는 어깨만 한 번 으쓱였다.
“사실은 너도 눈치채고 있을 거 아니야.”
“…….”
“내가 이 가문에 진짜 가족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는 거.”
차마 사생아라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하녀인 베티마저 저렇게 구는데, 지난 6개월 동안 같이 지내며 보고 들은 게 아주 없지는 않을 터다. 내 생각이 맞는 건지, 카르시안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지금부터 나는 카르시안의 편에 바짝 붙어 설 거다.
그럼 공통된 적을 두고 있다고 알려두는 게 낫겠지?
“어머니가 시켜서 했던 거야.”
“…….”
“그러면 안 때리고, 나를 예뻐해 주셨으니까. 아니, 그런다고 하셨으니까.”
“…….”
“근데 그냥 그만두려고.”
나는 가능한 한 무해하게 웃어 보였다.
“수잔이 그랬는데, 그건 사랑이 아니래.”
그렇지?
수잔을 올려다보자, 그녀는 뭉클해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나 카르시안은 여전히 무해하게 웃고 있는 내게 냉랭하게 말했다.
“가증스러워.”
“…….”
“어머니가 시켜서 했다고?”
“…….”
“웃기는 소리.”
카르시안은 잇새로 짓씹듯이 말했다.
“헛소리는 집어치워. 너 따위가 주는 연고, 네가 무릎을 꿇어도 안 발라.”
그리고는 내가 붙잡을 틈도 없이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갔다.
역시 쉽게 넘어오지는 않네.
하지만 마냥 절망적이진 않았다. 카르시안이 힌트를 줬다. 무릎 꿇어도 안 바른다니, 그럼 머리를 조아리면 바르겠단 소리 아닌가? 무릎이든 머리든, 몇 번이고 숙일 각오가 되어 있었다.
난 살고 싶으니까.
걱정스레 다가오는 수잔을 바라보며 카르시안에게 어떻게 사죄할지 생각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