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
“시모어 보좌관도 참, 의외로 부끄러움이 많네요.”
스탕 부인, 엑트라가 부채를 파닥이며 재밌어 죽겠다는 목소리로 떠들었다.
“신부가 식전에 얼굴 보여 주기 싫다고 문을 걸어 잠그는 건 또 처음 봅니다. 호호! 정말 재미있는 성혼식이에요!”
엑트라는 10년 만에 에리카의 귀여운 구석을 발견했다며 들떴다. 물론 에리카는 부끄러운 게 아니라 엑트라처럼 나이 지긋한 가신들이 찾아와 넉살을 떨어 대는 게 싫었을 뿐이다.
어쨌건 치장이 끝나고 식이 시작되기 전까지 문을 걸어 잠근 것은 현명했다. 오늘 성혼식에 참석한 손님들은 하나같이 오늘의 신부, ‘서부의 귀축’ 에리카 시모어를 구경하러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신부가 방문을 걸어 잠그고 누구든 들어오면 가만 안 두겠다고 으름장을 놓은 덕분인지, 자연스레 오늘의 신랑 해리 폴른이 대기하는 방에 손님이 몰려들었다.
“저런. 폴른 경! 우리 새신랑도 긴장을 많이 했군요. 긴장도 풀 겸 제가 가져온 선물을 미리 구경하시겠습니까? 제가 뭘 가져왔냐 하면, 오늘 밤에 꼭 필요한……!”
“스탕 부인, 잠깐 조용히 해 보게. 누가 폴른 경 가르마를 가운데 타 놓았는가? 그는 오른쪽 가마를 타야 인물이 산다. 거기 너. 이리 와서 머리 좀 고쳐 봐라.”
“고모, 머리가 문제가 아니야. 해리 표정 좀 봐. 고모 결혼할 때보다 더 웃겨. 누가 보면 억지로 하는 줄 알 거야. 앙투아네트, 네가 보기에도 그렇지?”
아치의 품에 안긴 아기 맹수가 가르릉 기분 좋은 소리를 냈다.
“도련님. 말씀을 조심하셔야지요.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습니다.”
“네가, 네가 어느새 이렇게 커서……. 내가 네 성혼식을 보게 될 줄은……. 큽.”
도련님의 신랄한 말솜씨에 시모어 부인이 깜짝 놀랐고, 글렌 도그만 경은 오늘도 눈물샘이 터졌다.
안 그래도 잔뜩 긴장하고 있던 새신랑은, 주변이 시끄러운 탓에 곧 토가 나올 것만 같았다. 그는 결국 더 이상 서 있지 못했다. 기가 죄다 빨린 해리가 의자에 앉아 고개를 숙였다.
그 꼴을 한 발짝 떨어져서 지켜보던 폰 바인스가 슬며시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바그다트에서 단신으로 맥포이에 돌아온 노마 덕에 한 달 근신을 받고 잡일꾼으로 강등되다시피 했다가, 노마의 호위로 복귀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아이사와 아치, 그리고 해리의 장모 되는 시모어 부인과 그의 의부 되는 글렌 도그만 경까지. 제삼자인 폰의 입장에선 멀리서 봐도 가까이서 봐도 숫기 없는 그를 둘러싸고 괴롭히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폰이 슬쩍 고개를 옆으로 기울여 노마의 귀에 대고 소곤거렸다.
“저, 경. 이만 맥포이 가주님이라도 모시고 나오시지요. 저러다 식 치르기 전에 폴른 경이 말라 죽겠습니다.”
“그래……. 이만 그러는 편이 좋겠다.”
아이사가 해리 폴른의 가르마 방향을 고민하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던 노마가 서늘하게 중얼거렸다. 낮게 깔린 목소리에 폰이 멈칫했다.
‘불쌍한 폴른 경, 힘내시오. 도와주지 못해 미안하오.’
폰은 그제야 노마가 어느 순간부터 전혀 웃지 않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노마가 해리의 가르마 방향을 두고 스탕 부인과 열띤 논쟁을 벌이기 시작한 아이사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아이사.”
노마가 특유의 햇살 같은 미소를 지으며 아이사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만 나가셔서 손님들과 인사를 나누셔야지요. 당신을 기다리는 손님들도 많습니다.”
그는 오늘 성혼식의 주인공이 아니었지만, 왠지 모르게 전투적으로 꾸민 느낌이 났다.
아이사는 그런 노마를 새삼스러울 정도로 빤히 쳐다보다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그녀가 씨익 웃으며 손을 맞잡자 그가 습관처럼 볼을 붉혔다.
바로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엑트라가 ‘어머머!’ 하고 호들갑을 떨며 즐거워했다.
“참, 해리 폴른 경. 오늘 아주 인물이 좋군 그래.”
노마의 손을 잡은 아이사가 방문을 나서기 전, 주군으로서 해리에게 좋은 말을 남겨 주었다. 그녀가 외모를 칭찬하는 것은 극히 드문 일로 최고의 찬사였다.
그러나 그것으로 해리의 낯은 더욱 희게 질렸다. 아이사 뒤에 서 있던 노마의 얼굴이 너무나 싸늘했기 때문이다.
* * *
ㅎㅂㄹㄱ.공금
에리카와 해리의 성혼식엔 뜻밖의 거물이 참석했다.
‘정말 왔잖아?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군.’
아버님, 밀란은 무려 두 달 전부터 맥포이에 있었는데, 목적은 내 병문안이었다.
그렇다. 어마어마한 뒷북이었다. 약재와 식재료를 가득 싣고 온 그는 최근 나를 살찌우고 있는 주범 중 하나였다.
한 번은 대놓고 어찌 이리 살이 안 붙는지 모르겠다며 심각한 얼굴로 이야기한 적도 있었다. 어쩌면 병문안이 아니라 날 살찌우기 위해 방문한 게 아닌가 하는 합리적 의심이 들었다.
여하튼 맥포이에서 내 밥 담당을 자처한 일 외엔 딱히 할 게 없는 아버님이 오늘 성혼식에 참석하는 것이야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뒤에 의외의 인물이 있었다.
오늘 아침 갑자기 참석하겠다며 서신을 날린 니콜라스 디아시였다. 황도에 있던 그가 아버지를 디아시로 직접 모시고 돌아가겠다며 굳이 맥포이에 온 것이다.
서신을 받고도 설마 했는데 정말 올 줄이야. 오랜만에 보는 니콜라스는 달라진 게 없었다. 즉, 나를 향한 무감한 시선도 여전했다.
“몹시 오랜만이오. 니콜라스―.”
나는 평소 니콜라스를 저 새끼, 이 새끼, 저 자식, 이 자식, 니콜라스 놈 등으로 불렀다.
“―디아시 가주.”
옆에 있는 노마와 아버님을 의식해 간신히 호칭을 수정했다.
“오랜만이오. 맥포이, 가주.”
니콜라스는 딱히 나를 부른 적이 없다. 필요할 때면 이봐, 너, 맥포이 정도로 불렀다. 그도 눈치껏 호칭에 신경을 썼다.
“……그래서. 혼자 오셨소?”
“보시다시피 호위와 왔소.”
표정을 갈무리하기 무섭게 구기게 만든다. 내가 지금 네가 바인스 형제를 데리고 온 걸 물었을까. 니콜라스와 대화하는 것은 언제나처럼 답답했다.
그리고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아직도 네놈과 오필리아의 결혼 소식이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지.’
물론 오필리아와 결혼하려면 위조 신분도 필요할 테고, 이래저래 시간이 걸릴 수 있다는 사실을 안다. 하지만 그래도 그렇지, 너무 조용하지 않나?
……결정했다. 이 자리를 빌려 네놈도 나처럼 초고속 결혼을 하게 만들어 줄 테다.
“자네 성혼식은 언제라 했지?”
“……내 성혼식이라니.”
“모른 척하기는. 자네와 입을 맞춘 아가씨가 있잖아. 내가 아는 것만 세 번인데.”
니콜라스가 처음으로 한 방 먹은 얼굴이 되었다. 이제 와서 세세한 내용이 기억나진 않지만, 내가 기억하기로 두 사람은 <오필리아와 밤>에서만 세 번은 더 입을 맞췄다.
그런데 아직도 결혼을 안 해? 나도 모르는 사이 디아시의 괴랄한 가칙에 전염된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은 채 쐐기를 박았다.
“입을 맞췄으면, 응당 결혼을 해야지. 안 그렇습니까, 밀란 공? 아니, 아버님!”
니콜라스가 부정하지 못하자, 밀란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잠시 나를 좀 보자.”
잠시간 정적이 흐르고 밀란이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가 곧장 등을 돌려 앞장서고, 니콜라스는 군말 없이 제 아버지를 따랐다.
다소 놀란 노마가 멀어지는 밀란과 니콜라스의 등을 바라본 끝에 입을 열었다.
“어쩌면 아버지와 니콜라스는 식에 참석하지 못하겠습니다. 아버지께선 설교를 길게 하시는 편이거든요.”
노마의 경우 나와 입을 맞추고 내 저택에서 일주일 외박을 한 것으로 잠도 자지 못하고 설교를 들었었다. 니콜라스는 얼마나 걸릴지, 성혼식은 또 얼마나 속전속결일지 아주 기대됐다.
“우린 이만 자리로 갑시다.”
전투에서 이긴 나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노마를 돌아봤다. 어느새 날 보고 있었는지 그와 곧장 눈이 마주쳤다.
“오늘 정말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
“……그래요?”
“네. 물론 최근엔 언제나 그러셨지만. 오늘은 유독…….”
말끝을 흐린 그가 주변을 한번 빙 둘러본 뒤, 내 입술에 쪼듯이 입을 맞췄다. 갑작스러운 입맞춤에 놀라 입이 절로 벌어졌다.
“멋지세요.”
노마가 싱긋 웃으며 귓가에 속삭였다. 언제 들어도 절로 우쭐해지는 ‘노마표 치켜세워 주기’였다. 그가 ‘귀여워요’를 대신해 ‘멋져요’라고 말한다는 걸 알게 된 건 몇 년 후였다.
“그럼 정말 가 볼까요.”
그가 내 손을 잡고 앞장서기 시작했다. 앞장선 뒷모습이, 귓불이 오늘도 발그레했다. 여전한 모습에 뒤늦게 하하,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새싹이 돋아나고 어린 봉오리가 푸릇푸릇하게 피어난 계절을 맞아 두 사람은 야외에서 성혼식을 치렀다. 신관 앞에 선 에리카와 해리는 퍽 잘 어울렸다.
성혼식이란 엄숙한 행사였으나, 등 뒤로 글렌이 우는 소리가 들려 몇 번 웃음을 참아야 했다. 눈물은 전염성이 있으니. 울 것 같은 낌새조차 없던 시모어 부인도 결국 기다란 눈물을 한 줄 흘렸다. 나는 말없이 옆자리에 앉은 그녀의 손을 잡아 주었다.
익숙한 관례를 지나 신랑 신부가 맹세를 할 차례였다.
에리카의 맹세가 무엇인지 모르나 해리가 우는 걸 보니 꽤나 감동스러운 맹세인 듯했다. 글렌은 그때쯤 거의 오열을 했다.
마침내 입을 맞추라는 신관의 주문에 따라 두 사람이 입을 맞출 때였다. 미지근한 미풍이 불어와 볼을 간지럽힌 동시에, 보랏빛 꽃잎 하나가 나비처럼 팔랑이며 나를 스쳐 지나갔다.
‘테렛사?’
꽃잎의 정체를 눈치챈 순간이었다. 벚나무 꽃잎들이 일제히 떨어지듯, 연보랏빛부터 맥포이를 닮아 진한 보랏빛까지 각기 다른 보랏빛을 머금은 꽃잎들이 봄바람을 타고 날아와 우수수 쏟아져 내렸다.
“……아.”
아름다운 장면에 사람들의 입에서 저마다 탄성이 터져 나왔다. 아마 죽을 때까지 잊히지 않는 장면일 것이다.
나 역시 넋을 잃고 그 장면을 바라보다, 반사적으로 손바닥을 내밀어 봤다. 때마침 팔랑팔랑 떨어지던 꽃잎 하나가 손바닥에 폴싹 내려앉았다.
하여간 너는 예전부터 이렇게 낭만 떠는 걸 좋아했단 말이야.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그럼 그렇지. 니콜라스 디아시가 그냥 맥포이에 왔을 리가 없지. 누굴 따라온 게 아니고서야…….’
“하하.”
꽃잎에 시선을 빼앗겼던 노마가 내 웃음소리에 반사적으로 나를 돌아봤다. 퍽 사랑스러운 걸 보는 듯한 그의 눈빛은, 내게 뭐가 그렇게 즐거웠냐 묻는 것 같았다.
“아닙니다. 그저…….”
행복. 실은 아직도 남들이 말하는 행복이 뭔지 모르겠다. 하지만 세상이 말하는 행복 같은 건 생각할 필요 없이, 지금 내가 느끼는 기분이 행복과 비슷하지 않을까.
“그저 기분이 좋아서.”
그러자 그가 더없이 행복하다는 듯 웃었다. 보랏빛 꽃잎이 휘날리는 봄 풍경 속에서 말도 안 되게 아름답게 웃고 있는 남자를 보고 있자니, 이 기분에 더욱 확신이 들었다.
고개를 돌리면 사랑하는 사람들이 보이고, 그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웃다 보면 가끔은 기분이 안 좋다가도 좋아지는 게. 매일 특별한 사건이 없이 평범한 일상들이 지나가는 게.
그게 행복과 가장 비슷하지 않을까.
‘나는 지금 행복해. 너는 어때.’
흩날리는 테렛사 꽃잎을 보며 물었다.
그리고 지금은, 당신에게 입을 맞추는 게 내 행복인 거 같군.
다음 순간 나는 그의 옷깃을 잡아당겨 입을 맞췄다. 입맞춤은 평소처럼 길게 이어졌다.
―<나의 데드 엔딩 후에>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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