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
“안 아픈가?”
비꼰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걱정되어 한 말이었다. 그러나 걱정도 잠시, 저렇게 터질 것처럼 부풀어 오른 주제에 꺼낼 생각을 안 하니 슬슬 자존심이 상했다. 얼마나 거슬리는지 배가 욱신거릴 지경이었다.
시선을 올리자 마침 노마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들끓는 눈동자를 미처 숨기지 못했다.
나는 차분한 동작으로 노마의 손에서 포크를 빼앗았다. 그의 허벅지 위에 놓인 쟁반마저 압수해 협탁에 올려놓은 뒤, 그의 팔을 양손으로 잡았다.
슬쩍 당겼을 뿐인데 그는 아주 송두리째 내게 넘어왔다. 나는 그대로 시트 위에 드러누웠고, 그는 못 이기는 척 내 위에 엎어졌다. 내가 생각해도 방금 건 꽤나 능수능란했다.
그를 향해 씨익 웃자, 노마가 난감하다는 듯 눈썹을 모았다.
“아이사, 그만……. 이러시면 참기가 어렵습니다.”
“참지 마세요.”
“아직 체중이 다 돌아오지 않으셨습니다……!”
“노마.”
“네, 아이사.”
“난 오늘 할 겁니다. 끝까지.”
목까지 새빨개진 그가 한숨인지 신음인지 모를 긴 숨을 내쉬었다.
몇 초간 심각하게 갈등하던 노마는 결국 가볍게 나의 아랫입술을 머금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어차피 넘어올 거면서. 이 내숭쟁이 같으니라고. 맞닿은 입술 새로 흐흐, 변태 같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자연스레 혀를 섞으며 얽혀 들 때였다. 그가 갑작스럽게 몸을 일으키며 내게서 떨어졌다.
“아이사, 잠시만요. 왜…….”
“갑자기 또 왜 그래요? 정말 이러기야?”
설마 이 타이밍에 또 내숭을 떨 작정인가 싶어 살풋 인상을 쓰는데 그의 표정이 자못 심각했다.
“아까부터 이상하게…….”
노마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잠시만이라더니 그의 손은 다급하게 치맛단을 들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노마, 잠시만―.”
조금 민망해 나도 모르게 손을 내려 거침없이 아래를 들추려는 그의 손길을 막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노마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의 시선은 드러난 허벅지에 고정됐다. 이내 그의 얼굴에서 삽시간 핏기가 가셨다.
“아이사, 다리에 피가…….”
“피?”
뜬금없는 소리에 나도 모르게 얼굴을 구기며 되물었다. 내가 미처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치맛단을 꼼꼼히 내린 그가 그대로 나를 번쩍 들어 올렸다.
“얀―!!”
문을 향해 달리며 그가 무시무시한 목소리로 얀을 불렀다.
나는 그가 그렇게 무섭게 소리를 지르는 걸 처음 봤다. 일전에 들었던, 땅이 갈라지는 듯한 그 굉음이 정말 그가 낸 소리가 맞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월경입니다.”
젠장. 몇 년 만의 월경이었다.
얀의 목소리가 오늘따라 낭랑한 것은 기분 탓일 것이다. 그는 곧 고개를 숙이고 훌쩍이기 시작했다.
“……큽. 죄송합니다, 가주님. 주책맞게 눈물이…….”
10년 넘게 보필한 주군의 몸이 드디어 정상적으로 작동한단 사실에 감동의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지만, 별로 고맙진 않았다.
얀은 아무래도 매일 부군이 성력을 나누어 주신 덕인 듯하다며 얼떨떨한 얼굴로 서 있는 노마를 은인 보듯 바라봤다. 그러면서 그동안 피임탕 때문에 호전된 것을 눈치채지 못한 듯하다고 덧붙였다.
“좋은 일입니다, 가주님. 좋은 일이에요.”
얀이 손가락으로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그는 얌전한 편이었지만 한 번 감정이 복받치면 스탕 부인만큼 귀찮았다.
“그만. 너무 창피하구나.”
“이 기쁜 소식을 어서 시모어 부인에게 알려 드려야 하는데. 어디쯤 오셨을지…….”
내가 썩은 낯으로 그만하라 손을 들어 올렸지만 간만에 주접을 터뜨린 얀은 쉽게 멈추지 않았다. 그는 내가 배가 아프다고 하고 나서야 당장 약을 지어 오겠다며 허겁지겁 침실을 빠져나갔다.
“아이사, 많이 아프십니까.”
창백하게 질린 노마가 침대 옆에 바짝 다가와 무릎을 꿇고 앉아 물었다. 그는 내가 조금만 아픈 소리를 해도 견디지 못하는 모양이다. 아무래도 과보호가 더욱 심해질 듯했다.
그런 노마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이불을 반쯤 들춰 옆자리를 팡팡 두드렸다. 그가 평소보다 배는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내 옆을 꿰찼다. 그러는 중에도 그의 눈동자는 바쁘게 나를 살피고 있었다.
“사실 많이 아프지 않습니다.”
실은 아까 그와 짧은 실랑이를 할 때 배가 욱신거리긴 했다. 설마 월경 때문일 거라곤 생각도 못 했지만.
묵직한 바위가 층층이 얹어지는 듯한 묘한 통증은 무척 오랜만이었다. 장기가 제 기능을 하는 것이야 좋은 일이지만 다양한 불편함을 떠올리면 마냥 반갑지만은 않았다.
무엇보다 당장, 근 두 달 만에 거사를 치르기 직전이었거늘. 날벼락이 따로 없었다. 의도치 않게 금욕 기간이 강제로 늘어난 셈이었다.
“아이사. 불편하지 않으시면, 제가 뒤에서 안아 드려도 되겠습니까?”
나도 모르는 새 인상을 쓰고 말았는지 노마가 퍽 걱정스러운 얼굴로 속삭였다.
“몸이 따듯하면 좋다고 들었습니다.”
솔깃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곤 슬쩍 등을 돌리자 노마가 작게 웃으며 몸을 붙여 왔다.
커다란 몸은 나 하나 쏙 들어가기 안성맞춤이었다. 그의 품에 기대 느슨하게 몸을 늘어뜨렸다. 아랫배를 느릿하게 쓰다듬어 주는 손길이 좋았다. 따스한 기운이 느껴지는 것으로 보아 성력을 쓰고 있는 듯했다.
“이것도 책에서 배운 지식인가요?”
“음, 아니요. 이건 아버지께서 어머니께 하시는 걸 봐서.”
아하. 그 무뚝뚝하신 분이 이런 다정한 행동을 한다는 게 상상이 가지 않으면서도 뭔가 당연하게 느껴졌다.
막을 새 없이 잇새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다소 무례한 행동이었지만 아버님의 엄숙한 표정을 떠올린 순간 어쩔 수 없었다. 내가 피식피식 웃음을 터뜨리자, 노마도 나를 따라 웃기 시작했다. 내가 웃으면 그저 행복한 사람처럼 말이다.
별것도 아닌 일로 실컷 웃은 끝에 내가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이러고 있으니까 하나도 안 아픈 것 같습니다.”
“다행입니다. 당신만 괜찮으시면 계속 이렇게 안고 다니고 싶은데.”
“그건 좀…….”
그와 장난스럽게 말을 주고받을 때였다.
“아이사.”
노마가 아까보다 조금 더 들뜬 목소리로 속삭였다.
“왔나 봅니다.”
무슨 말이냐고 묻기 전, 내 귀에도 우다다 발소리와 시끌벅적 요란스러운 소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가고 눈이 크게 뜨였다. 다급하게 뒤를 돌아 노마와 눈을 맞췄다. 지금 내가 생각하는 것이 맞느냐고. 정답이라고 말하는 듯, 그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올라갔다.
같은 순간, 침실 문이 꽝! 소리를 내며 양쪽으로 열렸다.
감히 성주의 침실 문을 허락도 없이 열다니!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이 성에서 한 명뿐이었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고모!”
아치는 성을 떠날 때와 같이 눈물범벅이 돼서 돌아왔다. 오는 길에도 또 얼마나 울었는지 한 달 반 만에 보는 아이는 말도 못 하게 부어 있었다.
정신을 차려 보면, 나는 이미 침대를 빠져나와 맨발로 달리고 있었다. 체면이고 품위고 그 순간 다른 건 필요 없었다.
다시 눈을 뜰 수 있다면 노마에겐 사랑한다고 말하기로 마음먹었다. 아치는 다른 거 필요 없이 이번엔 꽉 안아 주기로, 그렇게 다짐했었다. 탄타로스에서 살아 돌아왔을 때 겁쟁이처럼 아이에게 언성을 높였던 일이 두고두고 마음에 걸렸던 탓이었다.
‘너를 다시 안아 줄 수 있어서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내 목을 껴안고 오열하는 아치를 꽉 안아 주며 생각했다.
한참 후에야, 내가 침실에서 감금 아닌 감금 생활을 하는 동안 가노가 노마와의 기 싸움에 패배해 날 알현하지 못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놀란 눈으로 노마를 바라보면, ‘왜 그러십니까?’ 하고 묻는 듯한 순진무구한 표정만 돌아왔다. 한 성질 하는 가노를 간단히 이겨 먹다니……. 탄신연 때도 느낀 거지만 그의 질투와 견제는 예사롭지 않았다.
어쩌면 지난날 노마가 손님으로 맥포이에 왔을 때 가노가 그를 훼방을 놓았던 일을 그대로 갚아 준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나저나 언제 이렇게 다 자기 편으로 만들어 놓은 건지.’
무엇보다 오래된 가신인 가노의 출입을 통제하다니, 성 안에 세력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요사스러운 솜씨가 따로 없어 남몰래 혀를 내둘렀다.
가련한 가노. 아무래도 그는 노마 몰래 따로 불러다 생존 신고 및 감사 인사를 전해야 할 듯했다.
* * *
에리카의 비서가 초조한 얼굴로 다시 한번 똑똑, 가주 부부의 침실 문을 두드렸다. 이미 하녀 두 명이 가주 부부를 깨우는 데 실패했고, 벌써 그녀가 세 번째였다.
‘아이참, 왜 아무 소리도 없으시지. 더 늦으면 안 되는데. 오늘은…….’
비서가 심호흡 끝에 재차 문을 두드리려 할 때였다.
인기척도 없이 침실 문이 빼꼼 열렸다. 놀란 그녀는 가까스로 손바닥으로 입을 틀어막아 비명을 삼켰다.
문틈으로 불쑥 나타난 인물은 이른 아침부터 아름다운 미모를 자랑하는 가주 부군이었다. 불시에 얼굴 공격을 당한 에리카의 비서는 손바닥으로 입을 막은 채 그대로 굳어 버렸다.
“쉿. 가주님 아직 주무셔. 내가 깨울 테니, 여기서 조금만 기다리게.”
빙그레 미소를 띤 노마가 몹시 나른한 목소리로 그렇게 중얼거린 뒤, 두꺼운 커튼 덕에 아직 어슴푸레한 방 안으로 사라졌다.
여전히 손으로 입을 막은 에리카의 비서는 닫힌 문에 대고 뒤늦게나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몇 초 후에야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 이럴 때가 아닌데. 정말 더 늦으시면 안 되는데!”
오늘은 맥포이 가주의 수석 보좌관 에리카 시모어와 맥포이 제2기사단장 해리 폴른의 성혼식이 있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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