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의 데드 엔딩 후에-137화 (137/139)

137.

어쩐지 절박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다급한 입맞춤이었다.

하지만 노마는 내가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하는 것을 잊지 않은 모양이었다. 뒤통수와 허리를 감싼 그의 손만큼은 무척이나 조심스러워, 마치 처음 입을 맞췄던 그때처럼 덜덜 떨렸다. 그 사실을 깨닫자 입을 맞추는 중에도 웃음이 새었다.

그래, 나는 이런 걸 상상했다.

노마와 입술이 닿으니 새삼스레 살아 있는 게 실감이 났다. 살아남은 순간엔 언제부터인가 매번 이 별 가루 같은 남자가 있었다.

순식간에 시야가 뒤집혔다. 이번엔 노마가 위에서 나를 덮치듯, 양팔 사이에 가두었다.

오랜만에 그와 닿아서 그런지 몸이 빠르게 달아오르는 듯했다. 노마 역시 마찬가지인지 잔뜩 흥분해 내 위에서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나 그는 막상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않았다.

아하―. ‘절대 안정’ 때문인 듯했다.

그러나 내가 자는 동안 노마가 내내 성력을 들이부어 준 덕에 나는 멀쩡했다. 몸이 조금 둔할 뿐.

그의 목에 팔을 둘러 은근히 재촉했다. 노마가 참기 어렵다는 듯이 살풋 인상을 쓰곤 신음처럼 속삭였다.

“안 됩니다, 아이사.”

당신이 그렇게 나온다면 비장의 수가 있지.

“……사랑해요.”

노마가 눈에 띄게 움찔거렸다. 아까는 몰랐는데 ‘사랑해요’ 효과는 대단했다. 빠르게 달아오르는 그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 공격은 의미가 있었다.

“오늘은 정말 안 돼요. 몸에 힘이 하나도 없으십니다. 다칠 겁니다.”

“……흥. 알았습니다.”

그의 표정이 참기 어려운 것을 넘어 울기 직전이라, 도발을 멈추기로 했다. 대신 그의 목에서 팔을 풀어 내려 활짝 벌렸다.

그의 입꼬리가 천천히 상승했다. 내가 좋아하는, 그의 미소였다. 정말 보고 싶었어.

다음 순간 노마가 온몸으로 내 품에 안겨 들었다. 커다란 덩치를 하고 안긴다는 것은 말이 안 됐으나 볼에 닿는 그의 부드러운 머리칼이, 목덜미에 닿는 그의 숨결이, 온몸으로 느껴지는 그의 무게가 만족스러웠다. 맞닿은 가슴으로 느껴지는 떨림이 내가 살아 있다고 말해 주는 듯하다.

“날 잡아 줘서 고마워요.”

“다신 그러시면 안 됩니다.”

내가 부서지는 걸 멈춘 것은 노마였다. 경계에 흘러 들어가 끝없이 흩어지던 정신을 붙잡은 것도 그였다.

내게 있어 당신이 얼마나 특별한지, 이걸 당신에게 어떻게 말해 주면 좋을지 고민할 때였다.

“아이사.”

노마가 나른하게 나를 불렀다. 아까보다 한결 편안해진 목소리였다.

“알고 계시겠지만 이것과 우리의 약속은 별개입니다.”

“……약속이라면.”

내가 한 번에 알아듣지 못하자 노마가 고개를 들어 나와 눈을 맞췄다.

“약속을 어기고 위험한 일을 하셨으니 혼쭐이 나셔야지요.”

“……어.”

솔직히 이 분위기에서 저 말을 꺼낼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역시 그는 순하지만 매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한동안 침실에서 저만 보셔야 할 겁니다. 마침 절대 안정을 취하셔야 하니 잘되었습니다.”

그가 산뜻하게 웃으며 말했다. 순식간에 여유를 되찾은 그의 금안이 요사스럽게 빛나는 듯했다.

“허락해 주세요.”

혼쭐내는 걸 허락해 달라는 건 또 무슨 변태 같은 소리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은근히 기대가 되는 것은 나도 변태라는 말이겠지.

노마의 벌이 시작됐다.

* * *

공기가 제법 선선했다. 침실 형을 선고받은 지도 벌써 한 달이 되어 가고 있었다.

하루에 두세 건 정도 중요한 일을 처리해야 했지만, 어쨌든 가주가 된 이래 이례적으로 긴 휴가였다. 몸은 편하긴 했으나 누워만 있는 것은 확실히 성미에 맞지 않았다.

결국 몸을 일으켜 침실에 마련된 작은 책상에 앉았다. 서류와 서신 몇 개를 읽던 중, 나도 모르게 인상을 쓰고 말았다.

황태자의 국장과 관련된 소식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극적인 최후를 맞은 빌리넌트를 생각하면 착잡했다.

메르케시를 추적하는 데엔 완전히 실패했다. 이번 일로 니콜라스에게 서신을 받아 본 바, 그 역시 그녀를 놓친 모양이었다.

메르케시가 마음먹고 숨기로 한 것이라면 아무도 그녀를 찾지 못할 터였다. 메르케시를 잡아 죽이겠다는 일념으로 눈에 불을 켠 아드리네는 물론이고.

아드리네는 남은 삶을 모조리 복수로 불태우게 될지도 모른다. 그것은 가혹한 운명이 확실했으나, 역설적이게도 그녀는 그것을 동력으로 당장 죽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황제는 메르케시의 딸을, 제 손녀를 지킬 수 있을까.

아마도 적극적으로 나설 수는 없을 것이다. 차라리 헤이롯에게 순방을 명할 게 아니라 손녀 수호를 명하는 것이 어떨까 싶었다. 신전은 불가침의 영역이기도 하니, 어렵게 잡은 헤이롯의 실책을 순방으로 날리기보다는 이편이 나았다.

니콜라스에 의하면 헤이롯의 방관은 심증뿐이지만 확실했다. 겸사겸사 그 미친놈을 엿 먹일 생각으로 곧바로 황제에게 서신을 쓰기 시작했다.

빌리넌트의 죽음이 극적으로 바뀐 것을 생각하니 문득 <오필리아와 밤>과 달라진 부분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예를 들어 영웅이 되지 못한 오필리아라든가.

나를 살리면서 다시 성력을 잃는 바람에 오필리아는 그 기적을 일으킨 장본인이라는 사실을 증명할 길이 사라졌다. 그 애는 여전히 그림자였다.

이 세상은 오필리아의 행복한 결말을 위해 돌아가는 것이 아니었나. 사람마다 행복의 정의는 다르겠지만, 주인공의 ‘행복’이라 하면 조금 더 거창해야 하지 않을까.

영웅은 못 되더라도 모두의 축복과 사랑을 받는다든가 하는.

‘뭔가 조금 더…….’

막연히 뭔가 부족하다, 아쉽다는 생각을 할 때였다. 노크도 없이 침실 문이 불시에 열렸다. 나는 죄를 지은 것처럼 튕기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또 앉아 계셨군요.”

“노마.”

침실의 또 다른 주인인 노마였다.

벌써 그가 돌아오다니. 노마가 또 공주님 안기를 시전할세라 재빠르게 침대로 튀었다.

등 뒤로 그가 푸흐,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긴 다리를 자랑하듯 여유 있는 걸음으로 내 뒤를 성큼성큼 따랐다.

이불 속에 쏙 들어간 나는 원래부터 침대에 누워 있던 사람인 양 뻔뻔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봤다.

“……누워 계셨군요.”

침대 머리맡에 앉은 그가 기꺼이 모른 척해 주었다.

노마는 최근 나 대신 잡다한 정무를 모조리 떠맡았다. 그러나 그는 집무실이 아닌 침실에서 모든 일을 처리했다. 때문에 방금처럼 누군가를 알현할 일이 아니면 나와 함께 침실에 상주했다.

노마는 한동안 내 머리를 손빗으로 빗기만 반복했다. 그러다 문득 입을 열었다.

“아이사.”

실은 나는 그가 가져올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정화 의식까지 모두 끝났다고 합니다.”

드디어.

황도의 대신전에서 고위 신관이 찾아왔다. 닉스의 일을 보고하기 위해서였다.

“이제 다 끝났습니다.”

나는 대답 대신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10년 넘게 나를 괴롭히던 것이 드디어 사라졌다. 그러나 기대한 것처럼 대단한 해방감은 없었다. 어쩐지 허무하기까지 했다.

“통쾌할 거라 생각했는데 그렇지도 않군요. 아직 실감이 나지 않다고 해야 하나.”

게걸스럽게 목숨을 노리던 것이 사라졌다는 사실이 도통 믿기지 않았다.

“괜찮습니다. 천천히 익숙해지시면 돼요.”

“그래요.”

노마의 말엔 묘한 힘이 있다. 그가 그러면 정말 그런 것 같고, 은근히 진정이 되는 그런 힘 말이다.

그의 말이 맞다. 슬슬 이 평화에 익숙해질 차례였다. 이제 나는 시간이 많기도 했으니 하나하나 초조할 이유가 없다.

하나씩 익숙해지려는 것처럼 눈꺼풀을 내리고 머리칼을 빗어 내리는 그의 손길을 가만 느꼈다.

* * *

평생 부릴 여유는 다 부리고 있는 기분이다. 해가 정오에 걸릴 때까지 늘어지게 누워 있다 노마가 식사를 받아 오면 그가 떠 주는 대로 받아먹었다.

가만 보면 그는 뭔가 해 주는 걸 참 좋아한다. 물론 사소한 것이라도 무언갈 받기만 하면 기뻐서 까무러치기도 했다. 그렇다면 주는 것도 받은 것도 좋아하는 건가…….

‘……그냥 날 좋아하는 거군.’

나는 이제 그가 날 사랑한다는 것을 아주 당연한 일로 알고 있었다. 언제 이렇게 뻔뻔해졌는가 하면, 글쎄. 정확히 모르겠다만 노마 디아시가 이렇게 만들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내게 다소 과한 자신감을 심어 준 남자를 바라봤다. 그는 잘게 자른 과일을 콕 집어 해맑은 얼굴로 ‘아’ 하고 소리 내며 내게 입을 벌려 보라고 했다.

“…….”

나는 그 입 모양이 뭔지 모르는 사람처럼, 잠시간 벌어진 그의 입술을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내가 입을 벌리지 않자 금안에 이상하단 기색이 스쳤다.

노마가 또 걱정하기 전에 한 박자 느리게 입을 벌려 작게 조각난 과일을 받아먹었다. 의아함도 잠깐 그가 방긋 웃으며 아이처럼 기뻐했다.

그의 기쁨을 위해 나는 일단 얌전히 과일을 씹었다. 그러나 속으로는.

‘이대로……. 자빠뜨리고 싶다.’

실은 누구보다 음험한 생각을 하는 중이었다.

‘그래서 이 남자는 오늘도.’

뜨뜻미지근한 눈을 하고 있지만 실은 누구보다 뜨겁게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끝까지 갈 생각이 없는가.’

한동안 침실에 갇혀 노마만 보고 사는 것은, 그에게 집무를 대부분 빼앗겼단 점을 제외하곤 상상보다 훨씬 괜찮았다. 아니, 황홀했다. 난 이 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다만 이 완벽에 가까운 생활에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왜 그걸 안 하지.’

떠먹여 주고 씻겨 주고 입혀 주고 벗겨 주고. 물고 빨고 핥고 다른 건 다 하면서 왜 그, 그걸 안 하지.

‘침실에서 당신만 보고’의 다음은 나만 기대한 것인가. 어째서, 왜! 온갖 수발은 다 들고 입도 맞추고 몸도 더듬으면서 정작 왜 끝까지……!

순간 나도 모르게 머릿속의 생각을 입 밖으로 내뱉을 뻔했다,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아이사?”

다른 과일 조각을 집어다 내게 먹여 주려던 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물론 볼 거 다 본 사이이니만큼 그동안 순진하게 손만 잡고 자진 않았지만, 어째서 애무만 살벌하게 하고 정작 본격적인 거사를 안 치르는지 애가 탈 지경이었다.

노마가 이러는 이유는 실은 단순했다.

“안 그래도 가냘픈 가주님께서 이러다 아주 형체도 없어지시겠습니다. 본래 체중으로 돌아오시기 전에 그 흉측한 것을 들이대면 아무리 가주 부군이라도 가주님의 주치의로서 가만있지 않겠습니다. 당분간 피임탕도 금지입니다!”

드물게 언성을 높인 얀의 충고가 쓸데없이 잘 먹힌 탓이었다. 정확힌, ‘아무리 성력이 만능이라지만 그러다 정말 사달이 납니다’라는 말이 먹힌 것이었지만 이건 좀 더 시간이 지난 후 알게 된 이야기였다.

아무튼 나 이제 정말 괜찮다니까. 그는 아무래도 날 건들면 내가 죽는 줄 아는 모양이다.

애가 탄 걸 넘어 애매하게 해소되지 못한 욕구가 날 아주 욕구 불만 변태 상태로 만들었다. 나는 새빨간 머릿속을 감출 생각 없이 노마의 얼굴을 뚫을 기세로 바라봤다.

정말 나만 밝히는 사람인가? 내가 알기로 당신도 만만치 않을 텐데? 정말 오늘도 그럴 건가?

“…….”

다음 순간 순수한 입맞춤이 입술에 떨어졌다. 안타깝게도 불타는 눈빛은 통하지 않은 모양이다. 산뜻한 애정 표현에 끈적한 상상을 하던 나는 망연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와중에 수줍게 볼을 붉힌 노마가 조금 당황한 듯 물었다.

“입 맞추고 싶으셨던 게 아니셨습니까?”

“아니……. 비슷하긴, 한데.”

나만 밝히는 거였구나. 씁쓸하고 민망한 마음에 무심코 시선을 내렸다. 그러곤 두 눈을 의심했다.

“저렇게……. 저러면서……. 도대체 왜?”

내가 그의 아랫도리를 노려보며 중얼거리자 내내 순진한 척하던 그가 멈칫했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