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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데드 엔딩 후에-136화 (136/139)

136.

“저 역시 저주를 다루는 것은 처음이라 가주님께 어떤 부작용, 후유증이 있을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니 당분간 안정을 취하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침대 등받이에 비스듬히 기대앉은 내게 얀이 엄숙한 목소리로 안정을 권고했다. 그는 글렌과 함께 성에 남은 이들 중 하나였다.

“괜찮은 것 같은데.”

“안정은, 제가 이제 되었다고 말씀드릴 때까지입니다.”

저 소리는 무기한 침대 형이라는 말이었다. 단호하게 내 말을 차단한 얀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내 머리부터 발끝을 한 번 더 훑은 뒤, 총총 침실을 빠져나갔다.

모시는 분이 5일이나 일어나지 않았으니 주치의 입장에서 불안하긴 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의 말처럼 단순히 피로가 누적된 탓에 긴 잠을 잤을 뿐이다. 문제아 보는 듯한 시선은 유난이다.

하여튼 얀만 하더라도 내가 상상한 반응과 달랐다. 나는 모두 기뻐할 줄 알았다. 다들 내게 수고했다, 잘했다, 꽃가루를 날리며 환영할 줄 알았단 말이다!

“…….”

“오래 누워만 계셔 불편하실 겁니다. 주물러 드릴게요.”

그런데 이렇게 불편하게들 굴 줄이야.

노마의 반응 또한 내 상상과 딴판이었다. 그는 묘하게 얌전했다. 말도 못 붙이게 처연해 보이는 것이 꼭…… 짝 잃은 기러기도 아니고.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감이 잡히지 않아 그를 빤히 바라봤다. 노마는 뻔히 내 시선을 느꼈을 텐데도 퇴화된 근육을 푸는 일에만 열중했다. 그러다 내가 궁금해할 소식들을 조곤조곤 늘어놓기 시작했다.

“앙투아네트의 행동이 이상하고, 좋지 못한 감이 들어 급히 귀환했습니다.”

과연 여신의 말처럼 앙투아네트가 날 살리는 데 지대한 공을 세운 듯했다.

노마는 이어 닉스의 목과 황태자의 몸을 황도에 보낸 일, 영지민들이 신전과 사원에서 대부분 돌아왔다는 소식을 전해 줬다. 맥포이는 다시 천천히, 일상으로 돌아가고 있다고.

“곧장 사람을 보내긴 했으나 아치가 돌아오려면 또다시 한 달은 걸릴 겁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그 말을 끝으로 그는 다리 주무르는 것에 온전히 집중하기 시작했다.

“……오필리아는?”

그런데, 이상하게 오필리아 이야기가 쏙 빠져 있었다.

노마가 그제야 내 쪽을 돌아봤다. 시선이 얽히고 그의 눈동자가 깊어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보는 눈이 많아 곧장 자리를 피했습니다. 디아시에 돌아간 것으로 압니다. 그 자리에 있던 외부인들이라면 철저히 입을 막았으니 염려 마세요.”

그러곤 이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다는 듯이 다시 고개를 돌려 버리는 것 아닌가.

오필리아가 내게 따로 남긴 말은 없냐고 물으려던 나는 그대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마치 외도를 목격했지만 가슴에 묻겠다는 듯한 저 처연한 반응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설마가 진짜인 모양이다.

‘그때 나와 오필리아의 입술이 닿은 게 맞나 보군.’

평범한 방법은 없었던 것인가. 탄식이 절로 나왔지만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 입술 박치기는 의료 행위일 뿐이었다. 문제가 있다면 눈앞의 남자가 입술 좀 닿는 것에 대단한 의미를 부여하는 디아시라는 점이지.

필사적으로 눈치를 보는데, 문득 그의 옆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살이 내렸는지 유난히 선이 날카로워져 있었다. 수척해진 모습에 속상함이 앞서 나도 모르게 그의 마른 뺨에 손을 뻗었다.

내가 소심하게 노마의 볼을 만지작거리자 그가 드디어 다리를 주무르던 걸 멈췄다. 진중한 얼굴로 다리를 주무르고 있지만 실은 전혀 집중하지 못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는 내 손바닥에 뺨을 한 번 문대곤 상체를 숙여 허벅지에 위에 슬며시 얼굴을 묻었다. 그 모습은 꼭 상처 입은 짐승 같아 보였다.

이상하지. 난 우리가 재회하자마자 내가 당신에게 멋지게 고백을 할 줄 알았는데. 그리고 당신이 내게 기쁘다 속삭이며 뜨거운 입맞춤을 날릴 거라 생각했다.

한동안 작은 숨소리만 오갔다. 은근한 섭섭함을 뒤로한 채 그의 기다란 속눈썹을 손끝으로 쓸어 봤다.

다음으로 반듯한 눈썹을 빗어 보려 움직이는데, 그가 내 손을 잡아다 깍지를 꼈다. 그런 그를 물끄러미 내려 보다 내가 물었다.

“당신은.”

“전…….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당신 옆에서 떨어지지 않고.”

어딘가 그의 결혼 맹세가 떠오르는 말이라 가슴 한쪽이 쿡 찔려 왔다. 그는 그 약속을 착실히 지키고 있었지만 나는 아주 망한 듯하여.

“매번 그대를 속상하게 해서 미안해.”

“……돌아와 주셔서 기뻐요.”

“……그럼 왜 내 눈을 제대로 봐 주지 않아요.”

그 말에 그가 반쯤 내렸던 눈꺼풀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샛노랗게 드러난 금안이 나를 담았다.

“할 말이 있어요.”

그가 돌아오면 가장 먼저 해 주고 싶었던 말이 있었다. 지금이라면 분위기도 타이밍도 모두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사랑해요.”

사랑한다는 말을 들으면 분명 따스한 볕처럼 웃어 줄 것이라 기대했다. 그러나 또다시 상상과 다른 반응이었다.

노마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어딘가 찔린 듯한 저 표정은…… 본 적이 있었다.

“혹시 내가 이미 당신에게 말을, 했습니까?”

“네…….”

그러나 청혼에 이어 고백마저 엉망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보다 충격적인 지점은 따로 있었다.

“……그리고 당신은 내 마음을 믿지 못하는군.”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내가 노마의 마음을 착각이라 치부했을 때 그도 이런 마음이었을까. 대단히 서러웠다. 내 얼굴이 대번에 일그러지자 그가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절…….”

두고 가셨잖아요. 그가 숨이 끊어질 것처럼 중얼거리며 여전히 깍지를 끼고 있던 손에 힘을 주었다.

손. 마주 잡은 손을 노려보다 물었다.

“설마 그때 당신 손을 안 잡았다고 이러는 건가?”

그가 조금 머뭇거린다 싶더니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신없는 통에 일어난 일을 가지고 이러면 어떻게 한담…….”

나는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사람처럼 망연하게 중얼거렸다.

“사랑하신다면서 손을 놓으시니 당신 마음이 저와 다른 듯하여.”

“다르다니. 난 당신 두고 갈 생각으로 손을 잡지 않은 게 아닙니다. 그땐 나도 제정신이 아니라 설명하기 어렵지만, 확실한 건.”

“…….”

“그건 그대가 내게 너무 귀해서 그런 겁니다.”

노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는 혼란스러운 듯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해서, 내 목숨처럼 아껴서 그런 거니까.”

내가 다소 절박하게 속삭이자 눈을 한 번 깜빡인 그가 느리게 침대 위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진심이에요. 당신에게 말을 안 하면 안 했지 거짓말을 한 적은, 없습니다. 이제 말 안 한 것도 없을걸?”

……아마도.

그러는 동안에도 마치 탐색하듯, 내 눈동자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당신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은 내 사랑을 알아봐 달라는 듯, 나 역시 필사적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가 침대 머리에 기대앉은 나를 가뿐히 들어 무릎에 앉혔다. 코가 닿을 거리에서 마주한 금안이 환하게 웃지 않는 것이 어마어마하게 속상했다.

사람을 뚫어져라 보기만 하고, 아직도 내 마음을 몰라주는가 싶어 물었다.

“……무슨 생각해요.”

“음. 당신을 어쩌면 좋을지 계속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상치 못한 대답이 돌아왔다.

“……날 어쩌게?”

내가 되묻자 그가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드디어 보는 그의 미소였으나 어쩐지 서늘했다. 심상치 않은 반응에 나는 급히 선수를 쳤다.

“당신과 오래오래 살아 보려고 한 일이니 이번 한 번만 봐주면 안 될까.”

나름대로 허를 찌른 것이었다. 어떻게 먹히긴 했는지 마침내 그가 하하, 소리 내어 웃었다.

“아이사.”

“네.”

“그렇게 무서웠던 적은 처음입니다.”

그가 손을 뻗어 이마에 흐트러진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 주며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내뱉는 문장과 어조의 괴리가 컸다.

“전 당신과 함께라면 어디든 상관없습니다.”

“…….”

“정말 어디든. 하지만 당신은…….”

아니니까. 그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밀려드는 욕심이 당신께 해가 될까 두렵습니다. 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시면 절 꺼려 하실지도 모릅니다. 지금도―.”

“……무슨 생각을 하길래요. 납치보다 더한 것이 있습니까?”

그는 일전에 납치를 소망한다는 해괴한 고백을 한 적이 있었다.

“……아닙니다.”

그가 다시 묘하게 서늘한 미소를 지으며 얼버무렸다. 모르긴 몰라도 더한 상상을 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내 상상력으론 다음이 그려지지 않아 그가 주장하는 음습함은 내게 별 위협이 되지 않았다. 눈앞의 남자가 여전히 사랑스럽고 어여쁠 뿐이었다.

이러니 당신이 속으로 이해 못 할 생각 좀 한다고 한들, 어떻게 당신을 꺼려 할까.

“……그럼,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건 이제 좀 알겠나?”

노마가 눈을 몇 번 깜빡이더니 고개를 끄덕이고 봤다. 맹숭맹숭한 반응을 보아하니 아직 부족한 모양이었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의심이 많은지. 그의 마음을 착각이라 무시했던 세월이 업보가 되어 돌아온 기분이었다.

그러나 죄 많은 아이사 맥포이는 노마 디아시만큼 참을성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또한 나는 슬슬 급했다. 노마 디아시가 한참 부족했단 말이다. 이러고 있을 새가 없었다. 당장 백번 천번 사랑을 나눠도 모자랄 판에 이러고 있기엔 시간이 아까웠다.

“못 믿겠다면 내 마음을 알아줄 때까지 말해 주지. 어차피 당신은 평생 나와 살 텐데, 필요하다면 평생에 걸쳐 증명해 주겠습니다.”

마음이 급해진 내가 박력 넘치는 목소리로 그에게 선언했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 나를 숨겨 놓고 싶다고 했나? 당신이라면 몇 번은 봐주겠습니다.”

탄신연 때 난데없이 호수 한가운데로 납치했던 것 정도라면, 얼마든지.

그러곤 노마의 어깨를 덥석 잡아 시트로 밀었다. 물론 내 힘에 밀쳐질 노마가 아니었으나, 그는 기꺼이 내가 원하는 대로 넘어가 주었다.

나는 그대로 과감하게 노마의 몸을 타고 올라 그를 덮치듯 내려다봤다. 그가 열심히 주물러 준 덕분인지 움직이는 것이 생각보다 수월했다.

“이 정도면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감이 오지 않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내 목소리엔 자신감이 있었다. 맥포이 가주가 기꺼이 납치까지 당해 준다는데 그럼, 대단한 일이지.

나를 올려다보던 노마의 눈이 크게 뜨였다.

“날 사랑한다면서요. 눈 딱 감고 한 번만 더 믿어 봐. 이번엔 정말 어쩔 수 없었대도. 닉스를 피하지 않은 건 전부 당신과 오래 살아 보려고 그런 겁니다.”

나는 당장 당신과 사랑을 나누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으므로 매우 뻔뻔하고, 급했다.

“사랑해요.”

한 번이 어렵지, 아이사 맥포이가 노마 디아시를 사랑한다는 이 당연한 말은 숨 쉬듯이 쉽게 나왔다.

“……아이사.”

그리고 노마는 내게 한없이 약한 것이 맞았다. 달래는 데 고생깨나 할 것이란 누구의 충고가 무색하게.

곧 그의 얼굴이 터질 듯이 붉어졌다. 그 모습에 나는 회심의 미소를 띠었다. 붉어진 그의 얼굴이 말 못 하게 만족스럽다. 이제 좀 내 말을 알아들은 모양이지.

“나는 당신이 많이 보고 싶었는데.”

“치사하십니다.”

무자비한 나의 사랑 공격에 그가 서러운 목소리로 항의했다.

“당신은 이러고 있을 여유가 있나 봐.”

그런 그가 그저 귀엽게 보여 부러 심술궂게 말했다.

“여유…… 없습니다.”

있을 리가. 그가 빨갛다 못해 터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표정은 여전히 서러웠으니, 속성으로 마음을 퍼부은 것이 조금은 미안했다.

“그러면 이제 내 마음을 알아주는 건가?”

그럼에도 나는 어서 내 마음을 받아 달라며 그를 재촉했다.

우리는 더 이상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어. 한 달 만에 재회한 신혼부부라면 할 게 있지 않을까?

“……그럼, 우리 이제 입 안 맞추나……?”

다음 순간 노마가 갈급하게 손을 뻗어 뒤통수를 감싸 쥐었다. 나는 기꺼이 그에게 이끌려 입을 맞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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