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의 데드 엔딩 후에-135화 (135/139)

135.

“다 끝났어.”

다행히 걱정처럼 목소리가 떨리지는 않았다.

이제 정말 끝났어, 라고 중얼거린 것은 나 자신에게 하는 말에 가까웠다. 오필리아는 대답 없이 굵은 눈물방울을 떨어뜨리기만 했다.

“봐. 이번에는 살았어.”

그나마 자유로운 오른팔을 움직여 오필리아를 향해 뻗었다.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순간 내가 그의 품에서 빠져나간다고 생각했는지 노마의 팔에 더욱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조금이라도 노마를 안심시켜 주기 위해 남은 손으로 그의 팔목을 꽉 움켜쥐었다.

오필리아는 내밀어진 나의 손끝을 홀린 듯 바라보며 무릎걸음으로 한 걸음씩 내게 다가왔다. 그 애는 내가 손가락을 움직이면 볼이 닿을 거리에 멈춰 섰다.

눈앞의 상황이 믿기지 않다는 듯, 오필리아가 어색하게 눈알을 굴려 가며 나를 구석구석 살피기 시작했다. 새파란 눈에선 여전히 눈물이 뚝뚝 흐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다 나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는 이번에도 너를 선택하지 않을 거야.”

대단한 이유는 아니다. 과거 황제의 명에 따라 네게 수배령을 내린 것처럼. 감정을 이기지 못한 사람들에 섞여 널 포기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너는 내 첫 번째가 아닐 뿐이다.

하지만 그때와 조금 달랐다. 이번엔 온전히 아이사 맥포이를 위한 선택이었다. 그러니 어쩌면 오히려 그때보다 더 이기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제 위험도 사라졌겠다, 지긋지긋한 너를 내 인생에서 지워 버리고 새 출발을 할 거라는 말처럼 들렸을 것이다. 그럼에도 오필리아는 알고 있다는 듯 소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숨이 막혔다. 나도 모르게 감정이 벅차올라 지그시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해야 했다.

“나는 아직 시간이 필요해.”

다시 눈을 뜨자 오필리아가 저도 모르게 내게 손을 뻗으려다 그대로 굳어 버린 것이 보였다.

“나는 너를 아직은, 제대로 못 보겠어. 온전히 너로 못 봐. 널 생각하면 아직도 옛 생각이 나. 기분이 이상해져. 자꾸만 과거에 머물게 돼.”

쉽게 잊을 수 없지. 쉽게 잊어선 안 되지. 그렇게 사랑한 것들인데. 그게 내 전부였는데. 나는 지극히 평범하다 못해 부족한 게 많고 못되어 처먹어서 아직도 과거를 전부 붙들고 있다.

“하지만 나아지겠지. 나아질 거야.”

더는, 과거를 모조리 부여잡고 있지 않을 거다. 뒤만 돌아보기엔 내 옆에 사랑하는 것들이 또다시 넘쳐 나는걸. 내 곁에 있는 이 사랑과 오늘을 살아가고 싶다. 그러기로 약속을 했다.

그러니 나는 뭐든 지금보다 나아질 거라고 생각했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오필리아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내 말이라면 끄덕이고 보는 것이 등 뒤의 누구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며 말을 이었다.

“나는 내 생각을 들여다볼 시간이 없었어. 그런데 이젠 여유가 좀 생겼거든.”

나는 내 10년이, 모든 것이 벅찼으니. 네 사정과 네 감정을 이해해 볼 시도는커녕 나를 돌아볼 새도 없었다.

“그러니 지금부터는 너를 헤아려 볼 거야. 그럼 나아지겠지.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나도 모르겠어.”

“……응.”

오필리아가 앓는 소리인지 대답인지 모를 소리를 냈다.

“시간이 걸릴 거야. 어쩌면 오래. 하지만 분명히 나아질 거야. 모든 일이 그렇잖아.”

“응……. 응.”

눈을 질끈 감은 오필리아가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대답했다. 이번에는 확실한 대답이었다.

“나는 살았어. 오래오래 살 거야. 나 좋은 거 하면서 살려고 해. 그러고 싶어. 그러니 나는 이제 괜찮아.”

괜찮은 것 같아. 이걸 잘 달랜다면 말이지. 노마의 팔목을 붙잡은 손에 아까보다 힘이 들어갔다.

완전히 울상이 된 오필리아가 습관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한번 응, 하고 대답했다.

실은 나도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잘 몰랐다. 너한테 하고 싶은 말이 조금 더 많았던 것 같은데.

오필리아가 갑작스럽게 찾아왔던 그 밤처럼 엉망진창, 제멋대로 된 어리광에 가까운 말을 늘어놓고 있다는 것은 확실했다. 문득 힘이 들 때마다 널 붙잡고 내내 이러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필리아.”

모든 것이 실감이 나지 않기도 했다. 스물여섯이 된 너를 이 밝은 대낮에 마주하고 있다든가. 목이 잘린 게 내가 아니라 닉스라든가. 내가 정말 살아 있다든가 말이다.

이 모든 게 혹시 죽기 직전 나의 간절함이 만들어 낸 환영이라면 정말 우습겠지만, 그래도 네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그러니 너도 네 인생을 살아.”

뻗어진 손을 천천히 거두며 내가 속삭였다. 오필리아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래도 돼.”

다음 순간 오필리아의 커다란 눈이 더욱 커다랗게 뜨였다. 어렸을 때 종종 본 표정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날 뻔했다. 어쩌면 정말 웃었는지도 모르지.

“나도 그리할 테니.”

오필리아는 한참 아무런 대답도 없이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응, 그럴게.”

여전히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 애가 소리 없이 속삭였다. 그 가냘픈 대답에 마음이 편해지는 건 무엇 때문인지 모르겠으나, 곧 눈꺼풀이 빠르게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고맙다는 말은 입 모양으로만 전할 수 있었다. 실은 네가 많이 보고 싶었던 것 같다는 말은 결국 가슴에 묻었다. 시야가 점차 흐려졌다.

이제 노마를 달래 줘야 하는데. 앙투아네트의 상태도 제대로 확인해야 하고, 글렌에게 수고했다고 말을 해 줘야 하는데. 닉스 일도 수습해야 하고 저 성기사들의 입도 막아야 하는데.

처리할 게 산더미였지만 도무지 눈을 뜨고 있기 어려웠다. 나는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 * *

황성에 검은 기와 흰 기가 동시에 올라갔다. 건국제에 맞춰 황도를 방문했던 귀족들은 갑작스럽게 황태자의 죽음을 애도하는 기간을 가지게 되었다.

검은 옷차림을 한 귀족들이 속속들이 대회의장에 도착했다. 대회의가 없는 해엔 대귀족들이 대부분 영지에 틀어박혀 있어서일까. 급한 소집에 역시나 빈자리가 많았다.

황제가 시종들의 부축을 받으며 대회의장에 들어섰다. 슬픔에 잠긴 그는 그사이 풍채가 반으로 줄어 있었다. 모두가 숨을 죽이고 고개를 조아렸다.

간단한 묵념 후 황태자의 국장에 대한 논의가 이어졌다. 별다른 이견 없이 모든 것은 빠르게 결정되었다.

그러나 언성이 높아진 것은 곧이었다. 황태자의 외삼촌, 모르고트의 가주는 외조카를 잃은 슬픔과 분노를 숨기지 않았다.

“성년식 도중에 일어난 사고이니 대신관을 벌해 주십시오, 황제 폐하! 그의 직위를 박탈하고 사형에 처해 본보기를 보여야 할 것입니다. 또한 위험한 이단자를 놓친 디아시 역시 마땅히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

많은 귀족들이 모르고트 가주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옳소,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는 아무 말이 없었다. 머리가 아픈 듯 이마를 짚고 고개를 반쯤 숙인 탓에 표정 또한 보이지 않았다.

그때 디아시 가주 대리 밀란이 입을 열었다.

“대신관 자리는 사람이 정하는 것이 아니며 그는 메헤라께서 정한 사람이오. 또한 신관의 처우는 귀족이 간섭할 수 없는 영역이라는 것을 아실 것이오, 모르고트.”

“황후 폐하께선 아드님의 시신조차 확인하지 못하셨습니다!”

모르고트 가주가 격분해 외쳤다. 아들을 끔찍이 아꼈던 아드리네가 언급되자 회장에 삽시간 정적이 흘렀다. 동시에 황제의 낯이 슬프게 구겨졌다. 한동안 죽음 같은 침묵이 이어졌다.

“대신관에겐 3년간의 대륙 순방을 명할 것이오. 디아시 역시 맡은 바 소임을 다하지 못했으니 책임을 지는 것이 마땅하다. 하나 디아시의 기사가 이단의 목을 벤 공이 있으니 디아시에겐 책임을 묻지도 공로를 치하하지도 않겠소.”

황제가 지친 음색으로 명했다. 아끼던 자식을 전부 잃은 그는 모든 전투력을 상실했으며 동시에 어느 때보다 이성적이었다.

제국은 건국 이래 가장 시끄러웠다. 악귀 같은 광신도가 여신의 피를 진하게 타고난 로덴시를 희생해 강한 힘을 얻고, 맥포이를 습격해 그 가주마저 죽이려 했다는 소식이 빠르게 번져 갔다.

이에 때마침 기적이 일어나 이단의 힘이 사라지고 디아시의 여기사가 광신도의 목을 베었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퍼지고 있었으니.

일순 금빛으로 물들었던 하늘, 소나기처럼 내렸던 빛줄기는 여신이 기적을 내렸다는 말로밖에 설명이 안 됐다. 서부는 여신에게 버림받은 땅에서 순식간에 기적의 땅이, 디아시는 영웅이 되었다.

“폐하!”

모르고트 가주는 황제의 결정에 반발했다. 하지만 황제가 바늘 하나 들어갈 것 같지 않은 얼굴로 그만하라 손을 들어 올린 순간, 그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허면 메르케시 황녀의 처분만큼은 엄하게 내려 주십시오. 그녀가 황태자를 시해한 것이나 다름없지 않습니까! 당장 수배령을 내려 주십시오.”

그러나 모르고트 가주는 오늘 결판을 낼 작정으로 이 자리에 온 참이었다. 그의 입에서 결국 메르케시가 나오자 또다시 회장엔 정적이 흘렀다.

“부디 아드리네 황후를 가엽게 여겨 주십시오, 폐하.”

아드리네는 빌리넌트의 죽음에 충격을 받아 며칠째 그녀의 궁에 칩거 중이었다. 그녀가 모르고트에서 데리고 온 시녀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아드리네를 만날 수 없었다.

황제의 감은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그가 시종장, 아이반에게 가까이 다가오라 손짓했다. 더 이상 목소리를 내는 것도 힘겨운 탓이었다.

“이 시간부터 메르케시는 폐황녀다. 그녀의 처분은 모르고트의 뜻대로 하라.”

아이반이 황제의 뜻을 전했다. 메르케시를 죽이든 살리든 상관 않겠다는 말이었다.

황제는 침음을 삼켰다. 이로써 아드리네는 한동안 복수와 증오로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모르고트가 만족하며 고개를 조아렸다. 그때 황제가 재차 아이반에게 손짓했다.

“메르케시의 딸이 무사히 성년이 되면 짐의 후계자가 될 것이다.”

아이반이 다시 한번 황제의 뜻을 전한 순간, 모르고트 가주와 몇몇 대귀족이 즉시 자리에 일어나 득달같이 반발했다.

그러나 황제는 그들을 무시한 채 도망치듯 회장을 떠나 버렸다. 황위에 오른 순간부터 물밑으로 형제자매를 모조리 암살한 그에겐 메르케시의 딸 말고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천장 높은 회장이 격분과 혼란, 걱정으로 가득 찼다. 소란함 속에 누군가 물었다.

“그래서, 그 난리에 휘말린 맥포이 가주는 결국 살았다는 것이오, 죽었다는 것이오?”

한편 맥포이 가주가 천운으로 간신히 목숨을 건졌지만 사경을 헤매고 있다는 소문이 안개처럼 퍼져 나가고 있었다.

* * *

ㅎㅂㄹㄱ

긴 꿈을 헤매다 문득 눈을 떴을 땐 익숙한 침대 위였다. 느리게 눈을 깜빡이면 비스듬히 누운 채 나를 바라보고 있는 반짝이는 금안이 있었다. 마찬가지로 내게 익숙한 풍경이었다.

초점이 흐렸으나 눈앞의 장면에 순식간에 시선이 뺏겨 꿈의 내용은 더 이상 기억나지 않았다. 나는 그저 잠에 취한 채 나를 응시하는 예쁜 얼굴을 구경했다.

그러나 잠결에도 의아했다. 지금 즈음이면 백번 정도 내게 웃어 줘야 하는데 그가 도통 웃지 않았다. 그는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그저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몽롱한 와중에도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어째서 그런 표정을 하고 있어. 누가 당신을 슬프게 한 거야. 내 가만두지 않겠어…….

이런 말을 하고 싶었지만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목 안이 건조하다 못해 타들어 간 것처럼 버석했다.

미동 없던 노마는 내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리고 나서야 입술을 움직였다. 그가 뭔가 말하려는 것처럼 입술을 달싹이다 도로 입을 닫아 버렸다.

그 모습에 숨이 넘어갈 뻔했다. 다행히 내 인내심이 바닥나기 전에 노마가 자그맣게 속삭였다.

“3일을 일어나지 않으셨습니다.”

오랜만에 듣는 그의 목소리만큼은 평소처럼 상냥해 불안감이 빠르게 날아갔다.

“얀이 말하길 한동안 잠을 거의 주무시지 않아 그렇다 하더군요.”

“…….”

“또 그 저주를 받으셨으니…….”

노마는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실은 잠에 취한 탓에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눈앞에 있어도 그리운 노마가 슬프고 불안해 보여서, 그의 감정에 전염된 나는 그저 마음이 아팠다.

그가 흔들리는 내 눈동자를 응시하다 느릿하게 다가왔다. 습관처럼 눈을 감았더니 눈꺼풀에 그의 입술이 닿았다. 입술을 댄 채 그가 작게 소곤거렸다.

“얀을 데려오겠습니다. 무리하지 마시고 더 주무세요. 계속 곁에 있겠습니다.”

계속 곁에 있겠다는 말은 그 순간 어떤 말보다 특별하게 느껴졌다. 눈꺼풀 아래로 눈물이 핑 도는 느낌이 들었다. 이내 나도 모르게 다시 잠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완전히 잠에 들기 전 나는 무의식적으로 사랑해요, 사랑해요, 하고 중얼거렸다. 물론 목이 잠긴 탓에 소리는 내지 못하고 입술만 겨우 달싹인 정도였지만. 다음에 그를 보면 일단 고백을 뱉고 보자는 다짐은 무엇보다 굳건했던 모양이다.

그리고 다음에 눈을 떴을 땐 이틀이 더 지난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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