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의 데드 엔딩 후에-134화 (134/139)

134.

한바탕 굵은 빗줄기가 내리는 것처럼 쏟아지던 빛이 잦아들었다. 얼굴을 가린 채 죽은 듯 누워 있던 오필리아가 손을 내리고 눈을 떴다.

몸을 일으킨 그녀는 음울한 눈으로 작게 보이는 맥포이 성을 응시했다. 시선을 조금 내리면 그녀의 폭주에 휘말려 정신을 잃고 널브러진 맥과 가노가 보였다.

오랜만에 느끼는 온전한 성력 덕에 모든 감각이 살벌했다. 그녀는 적응이 필요한 듯, 눈을 감아 내렸다.

성력이 돌아왔다는 것은 오필리아에겐 실패를 의미했다. 또다시 간발의 차였다.

지금의 몸이라면 단숨에 맥포이 성에 갈 수 있었다. 그러나 눈으로 결과를 확인할 생각을 하니 두려웠다.

닉스가 자신만 괴롭혔다면 이렇게까지 고통스럽지 않았을 텐데. 불행히 그것은 오필리아를 괴롭히는 방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시간을 돌리기 전에 마지막으로 본 아이사의 모습은 처참했다. 온갖 잔혹한 광경은 다 보았다 자부했지만 아이사의 최후는 손에 꼽을 정도로 비참했다. 그렇기에 더더욱, 발걸음이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오필리아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가노가 쥐여 줬던 아이사의 서신을 떠올리며.

아이사 맥포이가 죽는 순간 네게 성력이 돌아갈 것이다. 폭주를 하더라도 이번엔 정신을 잃어선 안 된다. 네 폭주로 알포의 힘이 소멸된 후엔 곧장 맥포이에 와 주었으면 한다.

과거 오필리아는 폭주하는 와중에 정신을 놓았고 며칠간 일어나지 못했다. 이번에 부득불 정신을 부여잡고 있었던 이유는 단순했다. 아이사의 서신 때문이었다.

네가 직접 힘을 잃은 닉스의 목을 거둬.

아직 ‘오필리아’가 해야 하는 일이 남아 있었다. 그러니 두렵다고 멍청히 서 있을 수 없었다.

한편으론 기회를 놓친 제게 벌을 주고 싶은 마음이 컸다. 오필리아는 아이사가 또다시 제게 휘말려 죽은 모습을 두 눈에 낱낱이 담을 생각이다. 그 모습을 보고 시간을 돌리기 전처럼 다시 정신을 놓으면, 혹시 또 여신이 나타나 소원을 말하라고 하지 않을까.

기회를 다시 얻을 수 있다면, 아이사가 살 수만 있다면 기꺼이 이 짓을 반복할 수 있을 것 같다. 어딘가 조금 미쳐 버린 생각이었지만 미치지 않고서야 버티기 어려웠다.

오필리아는 다소 극단적인 생각을 하며 귀신처럼 계단을 올랐다. 아이사와 닉스가 어디에 있는지는 자연스럽게 알 수 있었다. 모든 것이 선명히 느껴졌다.

계단이 다섯 칸 남았을 때, 성벽 위의 풍경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있었다.

세 칸 남았을 때, 오필리아는 정면에 보이는 대여섯 명의 무리가 성기사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무언갈 둘러싼 채 검을 겨누고 있었다. 그녀는 기사들의 검을 따라 무심코 시선을 내렸다가 누군가의 분리된 목과 몸통을 보고 말았다.

“……아.”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남은 두 칸은 기어서 올라가야 했다. 잘려 나간 머리통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오필리아는 곧 목의 주인이 닉스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이사가 아니라 닉스의 목이 잘렸다.’

그때와 다르다.

오필리아는 그 짧은 순간 막연한 기대와 희망을 품었다. 다급하게 좌우를 두리번댔다. 한편에 주저앉은 노마와 그 옆에 엎드려 울고 있는 글렌 도그만 경이 보였다. 그리고 노마의 품에는.

“……아이사, 아이사.”

오필리아는 바보처럼 중얼거리면서 아이사를 향해 기다시피 달려갔다.

노마는 오필리아가 다가온 것을 모르는지 아이사의 목덜미에 얼굴을 반쯤 묻은 채 미동이 없었다. 오필리아는 그를 붙들고 어떻게 된 것이냐 묻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얼핏 보이는 그의 눈동자는 공허하며 아득했다. 모든 의지를 잃은 사람처럼, 갈 길을 잃은 것처럼. 지금 노마의 모습은 오필리아가 시간을 돌리기 전 결국 정신을 놓았던 그날의 모습과 같았다.

마치 그날로 되돌아간 듯한 기묘한 기분도 잠시, 오필리아의 눈에 타다 남은 재 같은 것들이 들어왔다. 그녀는 그것이 저주를 부린 흔적이란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아챘다.

‘내가 아는 넌 죽음을 몰라. 그러니 그 서신은 어딘가 이상해.’

저주를 받은 게 네 의지라면. 그게 네가 사는 방법이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지나친 망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침 오필리아의 눈앞에는 저주를 맞고 죽었다 살아난 사람이 있었다.

‘너도 노마 디아시를 보고 비슷한 생각을 했다면―.’

오필리아가 아이사의 생각을 따라잡았다. 머릿속에 하나의 가정이 자리 잡은 순간 그녀는 망설이지 않았다.

‘넌 아직 죽지 않았어. 아직 여기 있는 거야.’

오필리아는 필사적으로 아이사를 붙들고 있는 노마의 팔을 어마어마한 악력으로 떼어 냈다. 그러곤 아이사의 옷깃을 잡아 제 쪽으로 당겼다.

힘 빠진 노마는 모든 성력을 되찾은 오필리아에게 쉽게 아이사를 빼앗겼다. 난데없는 박탈감에 노마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오필리아의 힘에 의해 미약하게 뒤로 밀렸던 노마가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기함할 속도였으나, 오필리아가 아이사의 멱살을 잡은 채 그대로 입술을 맞댄 것이 먼저였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무슨, 무슨 짓이오……!”

한편 엎드려 오열하던 글렌 역시 오필리아를 뒤늦게 발견했다. 염치 불고하고 그녀에게 아이사를 살려 달라 매달리려고 했던 그는, 막을 새 없이 벌어진 돌발 상황에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팔을 뻗은 모습 그대로 석상처럼 굳어 버린 노마는 이번에야말로 모든 걸 잃은 표정이 되었다. 사랑하는 그녀와 타인이 입술을 맞대는 장면은 순수한 새신랑에게 어마어마한 충격을 준 것이다.

이보다 더한 악몽이 있을까. 소리 없는 비명이 길게 울려 퍼졌다. 노마는 오늘 일어나는 일들을 정말이지 믿을 수 없었다.

* * *

“오필리아가 지금 어디인지 당신은 알고 있지?”

“노마 디아시가 걱정되나.”

그걸 말이라고. 노마라면 충분히 뭔가를 저지르고도 남을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순하게 생겨서는 과감하고 골 때리는 행동을 하곤 하니.

“가노가 오필리아를 만났나?”

그렇다면 오필리아가 이미 맥포이에 도착했을지도 모른다.

“넌 확실히 놀리는 재미가 있긴 하구나.”

“장난칠 시간 없소.”

내가 여유를 잃자 여신은 또다시 천둥처럼 웃었다. 그러곤 갑자기 성큼성큼 내게 다가왔다.

성인이 된 오필리아는 나보다 키가 꽤 컸다. 내 정수리는 그 애 콧등에 닿았다. 방금까지만 해도 서너 발자국 떨어져 있던 여신은, 이제는 그녀가 고개를 숙이면 코끝이 닿을 거리에 있었다.

“……뭐 하는 거야.”

순식간에 좁아 든 거리에 나는 뒷걸음도 치지 못한 채 당황한 티를 내고 말았다.

“더 놀리고 싶지만 어쩔 수 없네.”

여신은 그렇게 말하면서 오필리아처럼 웃었다.

비로소 내가 아는 그 얼굴이었다. 오랜만에 보는 오필리아의 미소에 나도 모르게 그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오필리아가 네게 어떻게 성력을 주었는지 알아?”

또 무슨 꿍꿍이인지 여신이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성력을 사용하는 방법이야 여러 가지였다. 흔히 손에서 손으로 전하지만 굳이 신체가 닿지 않아도 오가는 것을 새삼스럽게 묻다니.

“일어나면 디아시를 달래는 데 고생 좀 할 거야.”

의미심장하게 눈꼬리를 접은 여신은 그러면서 이걸로 끝이야, 하고 속삭였다. 그 말에 나는 본능적으로 내가 곧 눈을 뜰 수 있으리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이상한 점은, 오필리아의 얼굴이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귓속말이라도 하려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이 거리감은 어딘가 익숙했다.

‘……노마가 내게 입을 맞출 때나 이 거리감이지 않나?’

설마, 하는 순간 눈앞이 선명한 금빛으로 타오른 끝에 이내 하얗게 부서졌다.

* * *

“…….”

빛이 사라지고 다시 시야가 선명해졌을 땐, 잠시 상황을 파악할 시간이 필요했다.

눈앞의 풍경은 그다지 바뀐 것이 없었다. 여전히 시야에는 오필리아의 얼굴이 한가득이었다. 코끝이 닿을 거리에 물망초보다 새파란 눈동자가 있었고 거기엔 꽤나 멍청해 보이는 내 얼굴이 담겨 있었다.

여기는 지금 경계인가 현실인가.

그러나 미처 상황을 파악할 새 없이 오필리아의 커다란 눈에 빠르게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건 눈 달린 사람이라면 누구나 시선이 빼앗길 만한 장면이라, 나는 잠시 모든 사고가 정지되어 굳어 버리고 말았다.

“헉―.”

그때 정신 차리라는 듯 단단하고 커다란 손이 허리를 옭아매더니 강한 힘으로 나를 잡아당겼다. 순식간에 오필리아의 얼굴과 멀어지고 등 뒤로 누군가의 거대한 몸이 전신을 덮치는 것이 느껴졌다.

등이 무겁게 짓눌리는 느낌에 반사적으로 몸이 굳었으나, 나는 빠르게 경계를 누그러뜨렸다. 절박하게 나를 잡아당긴 사람이 누구인지 굳이 묻지 않아도 알았다.

‘정말 그게 노마였구나.’

현실이었다. 내가 돌아왔구나. 나 정말 살았나 봐.

눈물이 핑 돌았다. 순간 노마에게 온 신경이 쏠려 다른 건 더 이상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두 눈에 그를 담아야 비로소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실감할 것 같았다.

“노마. 얼굴을, 나 좀 봐요. 괜찮습니까?”

나는 그나마 자유로운 손을 움직여 내 허리를 붙들고 있는 그의 팔을 더듬었다. 하지만 노마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도 잠시였다. 그의 몸은 말도 안 되게 떨리고 있었다.

“노마…….”

노마는 완전히 겁에 질려 있었다. 나는 곧 내 죄를 기억해 냈다.

“얼굴 좀 봐요. 난 이러려고 한 게…….”

맞긴 했다. 하지만 맹세코 당신한테 이렇게 험한 꼴을 보여 줄 생각은 없었다. 험한 일을 겪은 그에겐 언제나 예쁘고 좋은 것만 보여 주고 싶은 게 내 마음이었다.

그렇게 그를 평생 행복하게 해 줄 생각이었는데. 이것으로 완전히 망해 버린 듯했다.

“노마, 놀라게 해서 미안합니다. 하지만 설명할 수 있어요. 이게 다 생각이 있었는데, 어떻게 된 일이냐면…….”

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급기야 어깨가 축축하게 젖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세상에. 아이사 맥포이가 또다시 노마 디아시를 울리고 말았다. 기적의 생존자에서 순식간에 죄인이 된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때 털썩 엉덩방아를 찧는 소리가 들렸다. 무심코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쳐다봤다가, 돌바닥에 주저앉은 채 멍하니 나를 올려다보던 오필리아와 눈이 마주쳤다.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그 애는 나를 찾아왔던 그 밤처럼 소리 없이 뚝뚝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맙소사.’

앞뒤가 눈물 바다였다. 나는 엄청난 위기감을 느끼고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그제야 주변이 눈에 들어왔다. 오필리아의 머리부터 발끝이라든가. 상당히 궁상맞은 꼴이었다.

그 애의 뒤로 닉스의 머리와 황태자의 몸통이 분리된 것이 보였다. 어떻게 된 일인지 몰라도 정황상 오필리아가 폭주하며 닉스가 죽음을 맞이하는 이야기는 실현된 모양이다.

찝찝함을 느낄 새도 없이 시야 한편에서 앙투아네트가 폴짝폴짝 뛰어오르며 시선을 붙잡았다. 나와 함께 무사히 돌아온 아기 맹수는 다행히 별다른 이상이 없어 보였다.

그 옆으론 ‘가주님, 가주님’ 하고 입술을 달싹이는 글렌이 있었다. 눈물로 범벅된 그는 곧 기절해도 이상하지 않은 몰골이었다.

“난장판이군…….”

난감하게도 죄다 눈물을 흘리는 사람뿐이었다. 도대체 뭐부터 수습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마침 이디오의 도움으로 맥포이에 파견된 성기사들이 이쪽을 쳐다보고 있는 게 느껴졌다. 그들은 혼란스러움을 숨기지 못했다. 갑자기 나타난 오필리아에겐 특히 수상하다는 듯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그래. 일단 너부터.’

결단을 내린 나는 오필리아와 이야기하기 위해 허리를 굽히려 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노마. 그, 잠시만 이것 좀…….”

그는 절대로 놓아 줄 생각이 없는 듯 오히려 더 필사적으로 날 껴안은 팔에 힘을 줬다.

빈틈을 찾을 수 없이 꼭 맞붙은 꼴이 우스워 보일 테지만, 노마가 여전히 불안한 모양인지 몸을 떠니 별수가 없는 듯했다.

나는 그에게 파묻힌 엉거주춤한 자세 그대로 목만 쭈욱 빼내 오필리아와 시선을 맞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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