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
정신을 잃기 전 마지막으로 봤던 노마의 표정이 떠올랐다.
……내가 그의 손을 뿌리쳤던가? 아니, 뿌리치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기억이 흐릿하긴 했지만, 와중에 사랑한다고 고백도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노마의 표정은 고백을 들은 사람이 아니라 마치 나라를 잃은 사람처럼 온갖 절망과 배신감이 어려 있었다. 거기까지 기억하자 입 안이 탔다.
‘내 순진한 별 가루가 까무러칠 만큼 놀랐겠구나.’
다음으로 노마가 세상 다정한 목소리로 위험한 일은 하지 말라 당부하던 것이 생각났을 땐, 나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당장 여기서 나가야겠어.”
불현듯 그제야 모든 감각이 돌아왔다는 것과 내가 자유롭게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런데 왜 난 아직 여기에 있지? 뭔가 이상했다.
“부서진 게 붙는 건 한순간이라며. 난 왜 아직도 깨어날 수 없지?”
“실제로는 한순간이지만 여기서는 네가 느끼는 대로 시간이 흐른단다.”
뭐 하나 쉽게 납득 가는 일이 없었다. 그래도 내게 순순히 답을 해 주는 게 어딘가. 여세를 몰아 계속 물었다.
“그럼 아직도 붙는 중이라고?”
“정확히는 붙다가 말았는데.”
여신이 이를 드러내며 사납게 웃었다. 오필리아의 얼굴을 하고 사악하게 웃는 것은 도통 적응이 안 됐다.
“……장난하나.”
또한 여신의 말은 이번에도 수수께끼처럼 알쏭달쏭했다. 여신은 퍽 즐겁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보기에만 멀쩡하지 네 몸은 완전히 부서져 흩어지기 직전이었고, 영혼은 정말 한 줌만 남은 상태였어. 노마 디아시가 제때 오지 않았으면 그 한 줌까지도 영원히 사라졌을 거야. 그렇다면 대단한 비극이지?”
“…….”
“좋은 타이밍이었어. 하마터면 이 짓거리를 한 번 더 반복할 뻔했잖아.”
여신이 앙투아네트를 응시하며 칭찬하듯 말했다. 여신의 시선에 앙투아네트가 기겁해 내 품에 파고들었다. 놀란 아기 맹수를 꼭 안아 주는데 여신이 내 몸을 가리키며 말했다.
“문제는 영혼이 아니라, 산산조각 난 그 ‘몸’이 붙는 일인데.”
여신이 내 몸을 운운하는 순간, 나는 어째서 조각난 몸이 붙지 못하는지 알아차리고 말았다.
“네 몸. 이미 죽었었잖아?”
나는 배가 뚫려 죽은 적이 있다. 이미 죽은 이 몸은 오필리아 성력으로 유지되고 있었으니, 그 힘이 빠져나간 순간 한참 전에 죽은 시체에 불과했다.
“오필리아가 다시 성력을 불어넣어 주지 않는 이상…… 난 일어날 수 없다는 건가?”
“동화처럼 낭만적인 부분이지.”
어딜 봐서? 헛소리에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미친 듯이 초조한 동시에 마음 한편엔 오필리아라면 성력이 돌아온 순간 곧장 내게 달려올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내 뜻대로 깨어날 수 없을 뿐이지, 영영 못 일어난다는 말은 아니라 은연중에 안심할 때였다.
“네 남편 숨넘어가겠다는 말은 농담이 아니야. 오필리아의 성력이 없는 네 몸은, 한 번 죽었던 그때로 돌아가. 지금쯤 그때처럼 여기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을 거야.”
빙긋 웃은 여신은 이번엔 내 배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건 상상도 못 한 일이라 순간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기분이 들었다. 노마는 그럼 시체와 다름없는, 심지어 너덜너덜한 내 몸과 함께 있단 말인가?
“다들 네가 정말 죽었다고 생각할지도 몰라. 네 남편이 너 죽었다고 생각하고 콱 따라 죽으면 어찌해?”
“못돼 처먹은 말만 하기는. 노마가 그렇게 어리석은 짓을 할 리가…….”
“여기도 비슷한 전승이 있지 않던가. 사랑에 빠진 젊은 남녀가 밤중에 남몰래 만나기로 했다가, 잠시 엇갈린 틈에 여자가 죽은 줄만 알고 남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리는 비극 말이야.”
“뭐 그런 멍청한 이야기가 다 있담?”
“아무리 성력을 퍼부어도 소용없는 네 몸을 보면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지 않겠어?”
“그는 현명한 사람이오.”
“디아시의 약점은 사랑이야. 그렇게 만들어 놨거든.”
여신은 사람을 불안하게 하는 데에 일가견이 있었다.
순간 내게 눈을 맞추며 어디든, 하고 싱그럽게 웃던 노마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쩌면 여신의 재수 없는 말이 실제로 일어날 수 있다는 생각에 미치자 눈앞이 아찔했다.
여신의 말처럼 나는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 * *
노마는 말이 지쳐 멈추는 일이 없도록 쉬지 않고 성력을 쏟으며 달렸다. 당장 기절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였지만 그만둘 수 없었다.
맥포이 영지에 들어선 뒤 지나치는 도로와 마을은 하나같이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본성에 가까워질수록 여신의 힘이 아닌 기괴한 기운이 강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불안한 감은 빗겨 가지 않았다.
노마가 바그다트에 갔던 이유는 닉스를 제거할 방법을 찾기 위해서였지만 그 선택은 완전히 잘못된 듯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틀린 것인지, 어쩌다 이렇게 된 것인지 그는 알 수 없었다.
마침내 성에 도착해 아이사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어디선가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으니까.
노마는 그 짧은 순간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녀를 찾았단 사실에 기뻐해야 할까. 아니면 모두가 몸을 숨긴 고요한 성에 그녀가 남아 있다는 것에 절망해야 할까.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아이사의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올려다보았다. 정체불명의 검은 줄기가 파란 하늘을 가르고 있었다.
노마의 심장이 한순간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기괴한 검은 손들은 탄타로스에서 본 적이 있는 것이었다.
노마는 말에서 뛰어내려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성벽 위로 통하는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수천 가지 끔찍한 상상 끝에 드디어 성벽 위에 올라섰을 때, 눈앞에 펼쳐진 장면은 보고도 믿기 어려웠다.
아이사는 어째서 성벽 너머로 떨어질 듯 뒤로 넘어가고 있을까. 왜 재 가루처럼 검은 것들이 그녀를 둘러싸고 있을까.
그녀의 몸을 타고 오르는 검은 가루들은 과거 자신을 덮쳤던 저주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 저주라면 앞뒤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노마는 지체 없이 몸을 날려 중심을 잃어 가는 아이사에게 손을 뻗었다.
당신과 함께할 수 있다면 어디든 좋다는 말은 농담이 아니었다. 그 말엔 한 치의 과장이 없었다.
드디어 아이사와 눈이 마주쳤다. 자신을 발견한 그녀가 제게 손을 뻗으려 했다. 상황은 어느 때보다 절망스러웠지만 노마는 그 순간 안심했다. 이 앞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든 당신과 함께겠구나. 그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러나 노마는 아이사가 언제나 그의 예상을 벗어나곤 한다는 것을 잊어선 안 됐다.
미약한 안도감을 느끼기 무섭게 아이사가 살풋 인상을 찌푸리더니 내밀던 손을 거두어 등 뒤로 숨겼다. 그러곤 그가 미처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입술을 움직여 사랑한다고 말하는 게 아닌가.
노마는 좀처럼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건 아이사가 지금 자신을 두고 갈 생각을 하고 있단 것과, 이대로 그녀를 영영 놓칠지도 모른다는 점이었다.
‘어째서. 왜―.’
내게 사랑을 말하셨으면서 어찌 날 두고 가시지. 디아시의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누구도 가르치지 않았지만 디아시답게 노마의 사전에 ‘당신을 위해 죽겠다’는 없었다. ‘당신과 함께 죽고 함께 살자’만 존재했다.
‘분명 함께하자 약속을 했는데.’
노마는 태어나 가장 충격적인 배신감을 느꼈다. 이고의 배신으로 홀로 십수 년 잠들었을 때 새겨진 두려움은 이 순간의 공포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이내 그녀의 눈꺼풀이 무겁게 닫혔다. 동시에 극심한 공포를 느낀 노마의 손끝에서 폭주하듯 하얀 빛이 터져 나왔다. 앙투아네트가 길게 뻗어진 노마의 팔을 받침대 삼아 아이사를 향해 도약한 것은 그보다 조금 더 빨랐다.
아기 맹수가 무사히 아이사의 품에 도착하고, 노마는 가까스로 그녀의 허리를 낚아채 품 안에 당겨 안았다. 두 사람과 아기 맹수는 그대로 울퉁불퉁한 돌바닥에 곤두박질쳐 몇 바퀴를 굴렀다.
불안정한 노마의 상태를 대변하듯 한동안 새하얀 빛이 그의 주변을 삼킨 채 사납게 솟구쳤다. 그러나 바그다트에서 맥포이까지 지나치게 성력을 사용한 탓인지 그 힘은 빠르게 사그라들었다.
눈을 몇 번 깜빡인 노마는 비척비척 상체를 일으켜 제 품 안의 아이사를 살폈다. 힘없이 늘어진 아이사, 그리고 그녀의 가슴팍 위에 쓰러진 앙투아네트의 모습이 보였다.
언뜻 보기엔 어느 날 잔디 위에 누워 낮잠을 자던 모습과 비슷했다. 그녀는 원래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고요히 주무시니.
하지만 허리를 굽혀 그녀의 가슴에 귀를 대어 봐도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아이사…….”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렸다.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옆에 다가온 글렌이 무어라 소리를 쳤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노마에게 전혀 닿지 않았다.
아이사에게 또 한 번, 이상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몸에서 빛이 한두 줄기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절로 눈이 감기는 찬란한 금빛이었다. 노마는 서둘러 앙투아네트를 바닥에 내려놓고 이제는 그녀의 몸을 뚫을 것처럼 터져 나오는 빛줄기를 손바닥으로나마 막아 보았다. 그러나 속수무책이었다.
오필리아의 성력이 주인에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죽은 몸을 되살린 힘은 과연 어마어마했다. 마치 승천이라도 하는 것처럼, 하늘을 향해 요란하게 솟구쳐 오른 오필리아의 성력은 잠시간 공중에 거대한 금색 기둥을 만들었고 이내 하늘을 가득 채워 나갔다.
금빛으로 물든 세상을 바라보다 노마는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그제야 무릎을 꿇고 주저앉은 글렌과, 성기사 대여섯 명이 스무 발자국 거리에서 닉스를 포위하고 있는 것, 그리고 하늘을 향해 미친 사람처럼 환호하는 닉스가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그것은 오래 기쁨을 느끼지 못했다.
하늘을 메웠던 오필리아의 성력이 소나기처럼 우수수 쏟아지기 시작했다. 금빛 소나기가 땅에 닿는 순간, 닉스는 한순간 힘을 잃었다. 남의 몸을 훔쳐다 제 목을 가져다 붙인 것이 크나큰 실수였다. 사술로 연결되었던 닉스의 목과 빌리넌트의 몸통이 분리됐다.
다음 순간, 닉스의 목이 데구르르 돌바닥을 구른 뒤에 피에 절은 빌리넌트의 몸통이 맥없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분리된 목은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하고 입술만 뻐끔거렸다.
알포의 힘을 잃은 그것은 너무나 간단히 무너졌다. 긴 세월 수많은 사람을 애먹인 것이 우스울 정도였다.
노마는 어이가 없을 정도로 맥없이 죽어 가는 닉스를 응시하다 다시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아까부터 아이사의 복부를 감싸고 있던 손바닥이 이상하게 축축했다.
“…….”
금빛 비가 내리고 알포의 힘이 모조리 사라지는 광경은 무척 비현실적이었다. 하지만 제 품 안의 광경보다 말도 안 되는 것은 없는 듯했다.
원래부터 그랬던 것처럼 그녀의 자그마한 몸에, 옷 아래로 커다란 구멍이 나 있었다. 노마의 입술이 어딘가 찔린 사람처럼 벌어졌다.
노마는 남은 성력을 끌어모아 아이사에게 부어 넣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는 마치 한참 전에 죽은 사람처럼 성력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의 힘은 그녀의 상처를 치유하지 못하고 애꿎은 땅으로 흘러 들어갔다.
“아이사. 왜…….”
그는 아이사의 상태가 자신이 저주에 걸렸던 때와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고의 저주가 실패로 끝난 뒤 그는 긴 잠에 빠졌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아이사는 잠에 든 게 아니라 꼭, 숨이 끊어진 사람처럼 보였다.
그렇다고 닉스의 저주가 성공한 것도 아니었다. 이 저주는 종국엔 형체도 없이 사라지는 저주였다. 그러나 그녀는 이렇게 제 품에 있지 않나. 여전히 손에 잡히지 않나.
시간이 흐를수록 노마는 아이사의 상태를 확신할 수 없었다. 그의 눈동자에서 눈물이 한가득 찼다 뚝뚝 떨어지길 반복했다.
“아이사.”
이럴 줄 알았다면 정말 당신을 훔쳐다가 달아나는 게 나았을 거 같다.
“아이사.”
당신은 지금 어디에 있는 걸까. 연거푸 이름을 불렀으나 그녀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나를 두고 어디에 가 버린 거야. 노마는 천천히 팔을 움직여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휘어 감고 맥없이 늘어진 머리를 제 어깨에 기대게 했다. 빈틈없이 껴안고 있는데도 손 틈새로 그녀가 줄줄이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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