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닉스의 목소리가 웅웅 머릿속을 울렸다.
“다시는 살아 돌아오지 마!”
그러나 그 목소리는 내게 조금도 타격을 주지 못했다. 닉스가 내게 죽으라고 소리치면, 나는 기가 죽는 대신 무의식중에도 투지를 불태웠다. 기어코 살아남아 주겠다며.
하지만 깊은 잠에 빠져드는 것처럼 이따금씩 정신이 멀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러다 모든 기억을 잃어, 마침내 내가 아이사 맥포이라는 사실까지 잊어버릴 듯했다.
우스운 점은 그러다가도 닉스가 죽으라고 악을 쓰는 바람에 정신이 번쩍 든다는 거였다. 악의적인 그것의 목소리는 오히려 날 죽지 못하게 했다.
꾸벅꾸벅 졸다 깨길 반복하는 사람처럼 그러기도 한참이었다.
꽝―.
천둥 같은 굉음이 불시에 귀를 때렸다. 땅이 갈라지는 듯한 커다란 소리는 닉스의 목소리보다 효과가 좋았다. 정신이 한층 맑아지며 나는 드디어 느리게나마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여긴 어디지? 몸이 안 움직여.’
꼭 몸이 없는 사람처럼 아무런 감각도 느낄 수 없었지만 머리가 돌아가는 걸로 보아 죽은 것 같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혹시 여기가 경계일까, 계획이 성공한 걸까 하는 생각을 할 때였다.
다시 한번 깡― 하고 굉음이 울려 퍼졌다. 이만 일어나라는 듯 재촉하는 것만 같은 소리에 반사적으로 번쩍 눈을 떴다.
나도 모르게 눈꺼풀을 들어 올리긴 했으나 여전히 보이는 것은 없었다. 그나마 눈꺼풀을 움직인 것으로 몸이 있긴 한가 보다, 하는 정도를 깨달을 수 있었다.
다시 그러길 한참. 내가 지금 눈을 뜬 건지 감은 건지, 살았는지 죽었는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슬며시 안 좋은 생각이 고개를 들고 일어설 때쯤 때마침 또다시 굉음이 들려왔다. 세 번째였다.
“벌써 눈을 뜨네? 정신을 정말 빨리 차리는구나.”
그와 동시에 어떤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들은 적 있는 그 목소리가 신기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얼마나 살고 싶은 거야?”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는 빈정거리는 듯하기도, 약 올리는 듯하기도 했다. 사원에서 내게 기분 나쁜 말을 지껄였던 것과 동일한 목소리가 분명했다.
“아직 못 움직인단다. 부서진 게 덜 붙었거든. 하지만 그 일은 조금만 더 기다리면 돼.”
내가 몸을 일으키려고 기를 쓰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목소리가 속삭였다. 나는 아직도 앞이 보이지 않는데 상대는 나를 낱낱이 꾀고 있다는 사실이 꽤나 초조했다.
“부서지고 다시 붙는 순간은 눈 한 번 깜빡이는 것보다 짧은 시간이지만 영원처럼 느껴질 뿐이지. 자, 이제 목소리 정도는 낼 수 있을걸. 말해 보렴.”
이번에도 목소리가 말한 대로였다. 반발심이 들었으나 나는 일단 꼬리를 내렸다. 목소리는 아마도 여신일 테니.
“……난 살았나?”
평소 여신에게 따지고 싶은 것이 수두룩했다. 그러나 이 순간 다른 건 다 필요 없었다. 나는 내게 지금 가장 중요한 일을 물었다. 질문하는 목소리가 어쩔 수 없이 떨렸다.
“지금은 죽은 것에 가깝지.”
심드렁한 투였지만 어쨌건 내가 원하던 답이었다. 나는 안도감을 느끼며 다급히 되물었다.
“그 말은 일단 내가 정말 죽은 건 아니라는 소리인가?”
“이봐. 나는 네게 어떤 답을 주려고 찾아온 게 아니야.”
이번엔 퍽 짜증스럽다는 말투였다. 역시나 여신은 내게 비협조적이었다. 혹시 내가 지금 살아 있는 게 마음에 안 드는 거 아닐까? 저 태도로 보아 뭐가 되었든 여신이 내게 도움을 주는 일은 없을 듯했다.
“……그럼 더는 말 걸지 마시오. 몸이 붙는 대로 여기서 나가 줄 테니.”
노마의 경우 저주를 퍼붓는 친구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지 못해 결국 스스로 깨어날 수 없었다.
하지만 여신의 혼잣말에 의하면 나는 아마도 무척 빨리 정신을 차린 듯했다. 추측컨대 정체불명의 굉음 덕을 본 듯했다.
어쨌건 나는 정신을 차렸고 살 생각이 만만하니, 이대로 부서진 몸과 영혼이 붙기만 하면 분명 깨어날 수 있을 것이다.
혹시라도 여신이 딴소리를 하며 나를 방해할까 서둘러 눈과 입을 닫아 버렸다. 맹수 앞에서 죽은 척을 하는 초식 동물의 심정이었다. 깔깔 웃는 소리가 들렸으나 무시했다.
“계속 그렇게 죽은 듯이 있을 거야?”
내게 아무런 관심이 없는 주제에, 무슨 생각인지 여신은 나를 건드는 것을 그만두지 않았다. 묵묵히 무시로 일관했으나 여신은 개의치 않고 조잘댔다.
“네 새끼 맹수가 아까부터 어쩔 줄 몰라 하는데. 네가 입을 다물어 버리니까 정말 죽은 줄 알잖아. 봐, 잔뜩 겁을 먹어선.”
“……뭐?”
무시는 오래가지 못했다. 여신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턱 아래에서 끙끙 앓는 소리가 들리더니, 무언가 얼굴을 열심히 핥는 게 느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설마. 다급하게 눈꺼풀을 올렸다. 어느새 주위는 일전의 사원에서 여신의 목소리를 들었던 풍경처럼 새하얬지만 나는 눈앞의 존재 때문에 미처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놀랍게도 앙투아네트가 내 뺨을 밟고 서서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끙끙 앓던 아기 맹수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갸르릉, 기분 좋은 소리를 내고 기쁘다는 듯이 바쁘게 꼬리를 흔들었다.
“세상에. 아가.”
나는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앙투아네트를 잡아 품에 안고, 그대로 벌떡 몸을 일으켜 품 안의 생명체를 바라봤다. 다시 봐도 내 집에 사는 아기 맹수가 맞았다.
어느새 모든 감각이 돌아와 자유롭게 몸을 움직이고 있었지만 앙투아네트를 발견한 순간 그런 사실은 모조리 뒷전이었다.
“네가 여기에 왜 있어.”
“너랑 같이 들어왔잖아. 조그마해도 맹수라고 네 남편보다 재빠르던데. 기억 안 나?”
앙투아네트에게 물었거늘 재수 없는 목소리가 대답했다. 이상하게 목소리가 아까보다 가까운 듯해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으나, 어느새 오필리아의 모습을 한 여신이 코앞에 서 있었다. 사납게 웃는 오필리아는 여전히 적응이 되지 않아 미간이 절로 구겨졌다.
“나와 같이 들어왔다니.”
그보다 이건 또 무슨 소리인지. 노마와 앙투아네트는 바그다트에 있을 텐데. 중간에 이탈하지 않는 이상 맥포이에 있을 리가……. 때마침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몇몇 장면에 나는 경악에 찬 얼굴로 아기 맹수의 눈동자를 바라봤다.
그럼 그게 환영이 아니라 진짜 노마였단 말인가? 그 순간에 그가 내 앞에 있었다고?
“혼자 오진 않았을 테고. 정말 노마와 왔나?”
진실을 추궁하듯이 앙투아네트를 들어 올려 눈높이를 맞춰 봤다. 하지만 아기 맹수는 그저 내가 일어났단 사실이 기쁘다는 듯 정신 사납게 꼬리를 돌릴 뿐이었다.
“……설마 그 짐승이 정말 네 말을 알아듣는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여신이 또다시 끼어들었다. 누가 봐도 바보 취급하는 말투에 나도 모르게 움찔 어깨를 떨었다. 조그마한 동물을 진지하게 취조하는 모습이 남들 눈에 썩 똑똑해 보이진 않다는 것쯤은 나도 알았다.
……하지만 앙투아네트는 정말 사람 말을 대부분 알아듣고, 가끔은 대답 비슷한 것도 척척 해내는걸.
물론 나는 이러한 사실을 여신에게 늘어놓을 정도로 태평하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침묵한 것으로 내 생각을 눈치챘는지, 여신이 골 때린다는 듯이 웃기 시작했다.
“인간은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믿고 싶은 대로 믿는 경향이 있다니까. 짐승은 짐승일 뿐. 그것은 그냥 기억이 있을 따름이란다.”
“기억?”
“그래, 그 맹수는 지난 기억이 있을 뿐이야.”
“그게 무슨 말이지?”
“정말 아는 게 없다니까. 넌 이 삶이 처음인 줄 알지?”
“……뭐?”
“하나둘 비튼 것으론, 이야기를 아무리 반복해도 네가 사는 경우를 좀처럼 찾을 수가 없더구나. 넌 어떻게 해도 죽더군.”
여신의 입에서 상상도 못 한 말이 나왔다. 그녀가 기분 나쁜 소리를 이어 나갔다.
“그 애도 참. 어려운 소원이나 빌고 말이야. 아무리 나라도 정해진 이야기를 바꿀 순 없어. 모든 세상엔 반드시 일어나야 하는 필연이라는 것들이 있거든. 이야기의 끝에서 아이사 맥포이가 반드시 죽어야 하는 것처럼.”
마지막 말은 유독 즐겁게 들려 반사적으로 눈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내 품에 안긴 앙투아네트가 오필리아의 모습을 한 여신을 향해 으르렁거렸다.
“그래서 그런지 넌 아무리 이야기를 비틀어도 죽더구나. 남의 기억을 훔쳐다 알려 주기 전까진.”
“……<오필리아와 밤>을 말하는 건가?”
“참. 이건 비밀이야. ‘이 세상’에 없는 내용을 알려 주는 일은 금기거든.”
“그 괴상한 책을 읽은 기억은 역시 내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군.”
여신은 별다른 대답 없이 흐흥, 하고 웃기만 하다 어깨를 으쓱였다.
“‘아이사 맥포이’의 기억은 아니지. 더는 알려 줄 수 없어. 중요한 건, 아이사 맥포이는 그 책을 알고 난 후에야 비로소 살 가능성이 생겼다는 거지.”
확실히. 그 내용을 몰랐다면 오필리아의 성력이 내게 있다는 사실도, 노마를 찾아볼 생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제야 비틀기도 효과를 보기 시작했단다.”
가만 보면 여신은 질문에 대한 답은 절대로 안 해 주는 주제에 생색을 내고 싶을 때만 수다스러웠다.
“어디 보자. 예를 들어 탄타로스에서 닉스에게 아이사 맥포이를 죽이면 오필리아를 볼 수 있다고 속삭인 것이 그중 하나고…….”
“탄타로스에서 닉스가 뜬금없이 날 죽이면 된다며 달려들었던 게 그럼…….”
“표정이 왜 그러니? 덕분에 노마 디아시를 무사히 깨웠잖아.”
“거의 죽을 뻔했다고.”
“살았잖아.”
“…….”
“어쨌건. 아무리 내가 짠 세상이라 해도, 네가 사는 경우를 찾을 때까지 비슷비슷한 내용을 수천수만 번 보는 건 지루한 일이었단다. 저 가련한 짐승은 불행히 그 모든 삶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는 것이지.”
이 조그만 생명체가 혼자 그 기억들을 다 품고 있다니. 앙투아네트를 안은 팔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그러니 크질 않지!”
“……그 짐승이 자그마한 건 정말 돌연변이인 탓이란다.”
진위를 파악하기 위해 앙투아네트를 내려 보자 아기 맹수는 관심 없다는 듯이 하품이나 했다.
“너무 화내지 말렴. 저 짐승에게 기억이 있다는 것도 ‘아이사 맥포이가 사는 경우’의 조건 중 하나였으니까.”
모르긴 몰라도 아이사 맥포이가 죽지 않으려면 더럽게 많은 우연과 대단한 기적이 필요하다는 정도는 알 것 같았다.
“이전 기억을 가지게 된 건 어쨌건 내 실수가 맞긴 해. 그러니 저 조그마한 짐승이 원하면 자비를 베풀어 가지고 있는 기억의 무게를 줄여 주마.”
여신이 그렇게 말하며 앙투아네트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앙투아네트가 송곳니를 드러내며 그 손길을 거부했다. 아기 맹수의 맹랑함에 여신이 괘씸하다는 듯 인상을 쓸 때였다.
깡―.
귀를 찢는 굉음이 다시 시작됐다. 아까보다 더욱 맹렬해진 듯했다.
“이거……. 잘하면 경계도 부수겠는걸.”
눈을 가늘게 뜬 여신이 새하얀 공간을 빙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그러곤 무척 재미있다는 듯이 입꼬리를 길게 늘어뜨린 채 나를 응시했다.
“너, 이러고 있을 시간이 별로 없는 것 같은데? 네 남편 너 부르다 곧 숨넘어가겠다.”
여신의 말을 이해하는 데 한참이 걸렸다. 그도 그럴 것이 내 남편 노마 디아시는 세상에서 가장 순하고 상냥하고 자상하고 또 귀엽기까지 한, 별 가루 같은 남자인데.
“……저 소리가 노마가 나를 부르는 소리라고?”
저렇게 무시무시한 소리를 낸다니.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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