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의 데드 엔딩 후에-131화 (131/139)

131.

“……이것 보라지. 지금도 내 목 하나 자르지 못하잖아?”

내 비웃음에 검은 손이 강박적으로 내 목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당장 목이 잘려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기세였다. 하지만 나는 도발을 멈추지 않았다.

“네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여신은 네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아. 이런 같잖은 공격으론 내게 생채기조차 낼 수 없어.”

악랄하게 쏘아붙인 끝에, 승부수를 띄웠다.

“내 말이 믿기지 않나? 그럼 확인해 봐. 어디 네가 부릴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저주를 날려 보라고!”

알포의 저주법 중 가장 강도 높은 저주는 육체와 영혼을 잘게 부숴 상대방을 영원한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노마는 그 저주를 맞고도 살았다. 기가 막힌 순간에 그의 동생 니콜라스가 폭주해 저주가 꼬인 끝에 느리게 사라졌기 때문이다.

나룻배 위에서 노마는 분명 내게 조각난 몸과 영혼이 다시 붙는 동안은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니라고 이야기했다.

산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닌 그 경계에 있는 게 가능하다면. 그런 곳이 정말 존재한다면.

‘내가 잠시만 산 사람이 아니게 된다면 오필리아의 힘이 그 애에게 돌아가지 않을까.’

검증되지 않은 가설에 불과했으나, 성공하기만 하면 아이사 맥포이가 죽어야 끝나는 망할 이야기 안에서 아이사 맥포이는 살 수 있었다.

닉스에게 호언장담했지만 실은 오필리아의 반쪽짜리 힘이 그의 저주를 튕겨 낼 수 있을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과연 그 경계라는 것이 정말 존재할까?

‘그래도 어쩌겠어. 해 봐야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살아야지.’

이야기를 멈추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야기에 따라 아이사 맥포이는 완전히 죽든가, 잠시 죽든가 둘 중 하나의 결말을 맞이할 것이다.

“이 망할 계집애! 왜! 분명 너부터 죽였는데! 왜 아직도 살아 있는 거야!”

“언제까지 깔짝거리기만 할래! 최선을 다해서 날 죽여 봐, 이 쪼다 같은 놈!”

악에 받친 닉스가 내게 계속 소리를 질러 댔다. 나는 오늘 저것에게 한 순간도 져 줄 생각이 없었기에 최선을 다해 되받아쳤다. 그러는 사이 마침내 발걸음이 막다른 길에 막혔다.

“널 죽이고, 내 오필리아를 되찾을 거야.”

“뭐래, 한 순간도 그 애 마음을 가져 본 적 없으면서!”

내 말에 ‘아악!’ 하고 짧은 비명을 지른 닉스가 다가오던 걸음을 멈추고 오른팔을 치켜들었다.

‘제발.’

말로는 놈을 한껏 무시하긴 했지만 알포에게 맥포이를 통으로 바친 닉스의 힘은 신의 모습을 흉내 낼 수 있는 정도였다. 그는 마치 신처럼, 진을 그리지 않아도 세 번째 이름 몰라도 자유자재로 저주를 부렸다.

“영원히! 영원히 죽어 버려, 이 귀신같은 것! 다시는 살아 돌아오지 마!”

닉스의 주변으로 검은 가루 같은 것이 일렁이는 듯했다. 본능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이걸로 저 역겨운 낯짝을 보는 것도 마지막일 듯싶다.

“징글징글한 것! 제발 죽어!”

“싫다, 이 버러지 새끼야!”

지긋지긋한 새끼. 누가 할 소리를. 온 힘을 다해 마지막으로 소리쳤다.

다음 순간, 몸이 약하게 뒤로 밀리는 느낌이 들었다. 한 걸음 뒤면 추락이라는 사실이 기억나 반사적으로 눈을 떴다.

기이하게도 시간이 억겁처럼 느리게 흐르기 시작했다. 비유가 아닌 실제로 말이다. 눈앞의 풍경이 멈췄다. 몸과 영혼을 부순다는 그 저주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본능처럼 알 수 있었다.

“……죽어.”

“……러지 새끼야.”

마지막으로 들렸던 닉스의 목소리가 기다란 메아리처럼, 지지 않고 소리치던 내 목소리는 그보다 더 길게 이어졌다. 길게 늘어진 소리는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았다.

닉스를 싸고돌던 검은 가루 같은 것이 내게 들러붙는 듯하더니 기묘한 감각이 손끝과 발끝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짙은 안개에 잠기는 듯 서늘하고 축축했다. 또는 감각이 점차 사라지는 듯했다. 따사롭고 산뜻한 메헤라의 힘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마치 수천 년에 걸쳐 늪에 빠지는 기분이었다.

뻗어지다 만 나의 손이 보였다. 언뜻 멀쩡해 보였으나 알 수 있었다. 서서히, 하지만 확실하게 부서지고 있었다.

‘이제 멈춰야 해.’

몸이 부서지는 상황에 기묘한 안도감을 느끼며 나는 다급하게 오필리아를 부르기 시작했다. 오필리아의 힘은 기꺼이 내 부름에 대답했다. 일순 눈앞이 따스한 빛으로 번뜩였다. 늪에 잠기는 듯한 소름 끼치는 감각이 퍼져 나가는 속도가 느려졌다.

살 수 있다.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성공을 반쯤 직감할 때였다.

어째서인지 눈앞을 메웠던 따스한 빛이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마치 힘이 모자란 것처럼. 불씨가 꺼지는 것처럼.

동시에 오필리아의 힘에 밀렸던 서늘한 감각이 기다렸다는 듯이 제 속도를 찾았다.

‘안 돼.’

이 이야기 속에서 아이사 맥포이의 죽음이 정해져 있는 것처럼, 오필리아는 무슨 수를 써도 아이사 맥포이의 죽음을 막을 수 없는 걸까?

그런 순간에도 내 몸은 착실하게 뒤로 넘어가는 중인지 시야는 조금씩 위를 향하고 있었다. 그에 맞춰 흥분으로 가득 찬 닉스의 얼굴이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저 개새끼. 기어이 저게 나를 죽이는구나.’

“―사!”

재수 없는 새끼. 어디 실컷 처웃어라. 너도 곧이니까! 징그럽게 웃는 닉스를 끈질기게 노려보며 속으로 저주를 퍼부을 때였다.

“―아이사!”

믿을 수 없게도 미친 듯이 듣고 싶었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말 노마가 간절했나 봐.’

말도 안 됐지만, 그럴 리가 없지만. 눈을 한 번 깜빡이자 다음 순간 눈앞에 노마가 나타났다. 진짜인 듯 생생한 그는 꼭 내게 달려오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이사!”

처음 보는 표정을 한 그가 한 번 더 내 이름을 부르고,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본능처럼 그의 손을 잡기 위해 팔을 앞으로 뻗었다.

그러나 여전히 모든 순간은 영원한 세월처럼 느껴지고 육체와 영혼은 조각조각 부서지고 있는 탓일까.

나는 지독한 약이라도 한 사람처럼 현실 감각을 잃어 갔다. 사고는 매 순간 끊어지고 직관적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여긴 위험한데. 손을 잡으면 그도 위험할 텐데.’

문득 노마의 손을 잡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든 건 그 탓이었다.

내가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과 눈앞의 그는 간절함이 만든 환영일 것이라는 생각은 잠시 잊혀졌다. 그 대신 노마가 혹시 다치기라도 하면, 혹시라도 세상에서 사라지면 못 견디게 슬플 거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건 안 돼.’

암, 안 되고말고. 뻗었던 손을 다급하게 뒤로 숨겼다. 그러곤 다음으로 환영인지 진짜인지 모를 그를 향해 본능처럼 속삭였다.

“사랑해요.”

아마도 노마를 다시 마주한 순간, 그에게 사랑한다는 말부터 하기로 매 순간 다짐하고 있었기 때문에 튀어 나간 말일 것이다.

분명 입술을 벌리고 목소리를 냈다고 생각했으나 정말로 그에게 전해졌는지는 알 수 없었다. 시각을 제외하고는 더 이상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때 노마의 얼굴이 또다시 처음 보는 모양으로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시야마저 아득해지는 와중에 나는 그 모습을 보고 실망했다. 역시나 전해지지 않은 모양이다.

그도 그럴 게 노마가 나를 보고 저런 얼굴을 할 리가 없지 않나. 그는 내가 사랑한다고 말하면 꽃보다 붉어진 볼을 하고 누구보다 행복하게 웃을 인물이다.

‘아. 뭐 하나 제대로 해 준 게 없네.’

눈앞의 노마는 아마도 환영이겠지만 이 원통함은 속이 상하다는 말로는 다 표현이 안 됐다.

이내 새하얀 빛이 시야를 덮었다. 반짝반짝 예쁘고 다정한 것이 꼭 노마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나는 마침내 모든 감각을 잃었다.

* * *

ㅎㅂㄹㄱ.공금

오필리아의 손아귀에서 아이사의 쪽지가 형편없이 구겨졌다.

“무슨 내용이지?”

그 반응에 쪽지 내용을 모르는 가노가 험악하게 얼굴을 구기며 물었다. 오필리아가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공포에 질린 듯 그녀의 낯이 창백했다.

“이 쪽지는 언제 쓴 건가?”

“오늘이 지나면 일주일 전. 다시 묻지, 뭐가 써 있길래…….”

가노의 입에서 일주일이 나온 순간 오필리아의 얼굴이 완전히 일그러졌다. 불길한 그녀의 반응에 가노가 말끝을 흐리고 말았다.

“당장 맥포이로 가야 해. 이럴 시간이 없어. 잭! 말!”

오필리아가 강박적으로 중얼거리다 숲속을 향해 외쳤다.

가노가 오필리아에게서 쪽지를 뺏어 들었다. 곧 그는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 아이사가 분명 오필리아를 찾으면 자신이 살 수 있다고 하지 않았나? 그러나 쪽지엔 헛소리가 적혀 있었다.

“아이사 맥포이가 죽는 순간이라니. 이게 무슨 개소리야.”

완벽한 헛소리가.

가노는 쪽지를 보지 말라던 아이사에게 첫 만남 때보다 더한 배신감을 느꼈다.

말 세 마리가 서쪽을 향해 숲길을 내달리기 시작했다. 세 사람은 맥포이를 향해 쉬지 않고 달렸다. 거침없이 말을 모는 중에도 오필리아는 내내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오필리아가 별안간 벼락을 맞은 사람처럼 순식간에 말고삐를 놓치고, 그대로 말에서 굴러떨어진 것은, 맥포이를 정말 코앞에 두었을 때였다.

“오필리아!”

가까이서 달리던 잭이 재빠르게 오필리아를 낚아채며 그녀와 함께 잔디를 데굴데굴 굴렀다.

“아…….”

잔디에 쓰러진 오필리아가 옅은 신음을 뱉었다. 그 눈동자에 시퍼런 하늘이 비쳤다. 오늘의 하늘은 그녀의 눈동자만큼 푸르렀다.

잔혹할 정도로 아름다운 풍경에 오필리아의 눈에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낙마의 충격 때문이 아니었다.

“안 돼, 안 돼, 아이사……. 제발.”

일전에 한 번 겪은 적 있는 끔찍한 감각이 시작되었기 때문이었다.

“아아악―!”

오필리아가 비명을 지름과 동시에, 멀지 않은 곳에서 푸른 하늘을 가르듯 금빛을 띤 빛줄기가 솟구쳤다. 드넓은 하늘이 금빛으로 빠르게 차오른 끝에 그녀를 향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오필리아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 힘없이 눈꺼풀을 내렸다. 그녀의 얼굴을 타고 후드득 굵은 물방울이 떨어졌다.

곧 끝을 알 수 없는 힘이, 익숙한 듯 어색한 제 힘이, 배꼽부터 끝없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충만한 힘 속에 파묻혀 오필리아는 여신에게 소원을 빌었던 날을 떠올렸다.

“아이사 맥포이가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으면 좋겠어.”

결국 또다시 이렇게 될 거면 도대체 왜.

오필리아는 더 이상 시간을 돌린 의미를 찾을 수 없었다. 모든 게 무너지는 듯했다. 어느 때보다 충만한 생명력을 느끼며 오필리아는 끝없이 가라앉는 기분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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