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의 데드 엔딩 후에-129화 (129/139)

129.

떠날 수 있는 영지민들은 잠시 영지를 떠났다.

그러나 당장 영지 밖으로 떠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남은 이들은 이디오의 도움을 받아 가까운 신전과 사원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11년 전 참사에서 생존한 사람이 나와 아치 외에 단 한 명도 없던 건 아니었다. 놀랍게도 신전과 사원에서 기도를 하고 있던 몇몇이 살아남았다. 추측하기론 그곳의 기도실만은 검은 손이 닿지 않는 듯했다. 영지민들을 가까운 신전과 사원에 뿔뿔이 흩어 놓은 이유는 이 때문이었다.

서부로 들어오는 외부인의 출입이 차근차근 차단됐다. 롬닥 역시 마찬가지였다. 모든 일은 마치 그림자가 움직이는 것처럼 조용히, 서서히 진행됐다.

남은 것은 아치였다.

침묵이 흐르는 맥포이 가주의 집무실 문이 양쪽으로 열렸다. 시모어 부인이 아치를 데리고 들어오는 게 보였다.

근 이틀 만에 보는 얼굴이던가. 눈치 빠른 아치의 표정은 벌써부터 안 좋았다. 아이는 며칠 새 성의 분위기가 흡사 전시와 같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가볍게 예장을 갖춘 나를 보고 아치가 인상을 쓰더니 조그맣게 한숨을 쉬었다.

“가까이 와라.”

나는 남몰래 헛숨을 들이켜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유독 엄숙한 목소리에 아치가 쭈뼛대며 다가왔다.

“고모…….”

“한쪽 무릎을 꿇어 예를 갖추어라.”

아치가 시모어 부인을 힐끔 바라봤다. 그녀가 괜찮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자 아이는 제법 그럴싸한 동작으로 예를 갖추었다.

“아치 맥포이. 소가주로서 가주 대리의 의무를 다해라.”

“…….”

“지금부터 가주의 의무가 너의 최우선이다. 사사로운 감정에 휩쓸려선 안 된다.”

아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맥포이에 일어났던 참사와 그것이 언젠가 다시 찾아올 수 있다는 사실을 배워 알고 있었다.

“가문이 위태로울 때 소가주는 반드시 살아야 한다. 또한 네겐 널 따르는 사람들을 지킬 의무가 있으며, 그들의 충성을 기꺼이 받아야 한다.”

상황을 눈치챘는지 아이의 입술이 망연하게 벌어졌다. 겁에 질린 듯 보였지만 나는 아치가 진정할 때까지 기다려 주지 않았다. 언뜻 냉정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아치에게 불쑥 손바닥을 내밀었다.

“왼손을 다오.”

“고모, 나는―.”

반사적으로 왼손을 내민 아치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듯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신속한 동작으로 검지에서 가주 반지를 빼내 작달막한 손가락에 맞추었다.

“…….”

그러나 반지는 아치의 검지에 맞지 않았다. 순간 울컥 감정이 치미는 바람에 이를 악물어야 했다.

나는 애써 태연한 척, 검지에서 반지를 빼내 엄지에 끼워 주며 말했다.

“……넌 엄지에 껴야겠구나.”

나의 아버지는 가주 반지를 소지에 꼈었다. 보통은 성인 남성이 가주가 되니, 반지는 성인 남성의 소지 둘레에 맞춰져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검지에 꼈다면 아치는 엄지에 껴야 겨우 맞는 정도였다. 아이의 엄지에 끼워진 익숙한 반지를 보고 있자니 억장이 무너질 것 같았다.

“이만 일어나라. 노턴의 영지에 들어설 때까지 쉬지 말거라. 맥포이 가주 대리로서, 노턴 가주에게 이 서신을 전하는 것이 소가주의 첫 의무야.”

이번엔 둘둘 말린 두루마리를 반지를 낀 그 손에 쥐여 주며 말했다. 두루마리를 꼭 쥔 아치는 가만히 서서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입술을 깨물고 있어 못 한 것에 가까웠다.

“네 고모부에게 서신을 보냈으니 그가 곧, 널 데리러 갈 것이다. 그때까지 언제나 네 자리의 무게를 기억하면서……. 성벽에서 내려다보이는 맥포이의 풍경을 잊지 마. 네가 마지막으로 본 풍경보다 언제나 조금이라도 더 나아야 하니.”

나는 결국 무릎을 꿇고 아치를 올려다봤다. 혹시나 정말 이게 마지막이면 어찌하나. 그 생각에 더는 뻣뻣한 맥포이 가주로 있을 수가 없었다.

“기억해. 지금의 넌 열다섯 살의 나보다 나아. 넌 나보다 더 잘할 수 있다.”

나도 모르게 아이의 양팔을 꽉 움켜쥐고 절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치의 보라색 눈동자가 마구 흔들렸다.

“왜, 왜 그렇게 말하는 거야. 못됐어. 더는 못 볼 것처럼 말하지 마.”

이런 널 두고 책 속의 아이사 맥포이는 어떻게 죽을 수 있었을까. 내가 정말 너를 두고 눈을 감았다고? 새삼스레 믿기지 않았다.

“약속해. 절대로, 절대로 안 죽는다고 맹세해.”

고모의 가르침대로 아랫사람 보는 앞에서 울지 않으려 눈을 부릅뜬 아치가 울분 가득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약속을 한 순간 기대를 하게 된다. 나는 보답받지 못한 기대가 얼마나 상처가 되는지 잘 알았다. 또한 세상에 확신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이번엔 특히나 도박에 가까웠으니, 나는 함부로 맹세를 할 수 없었다.

눈물이 가득 들어찬 아치의 눈동자를 홀린 듯이 바라봤다. 나와 같은 보라색 눈동자. 내가 10년에 걸쳐 지켜 온 아이였다. 10년, 나를 죽지 못해 살게 한 대단한 존재이기도 했다.

“최선을 다하마.”

그러니 나는 더더욱 아치에게 막연한 희망을 심어 줄 수가 없었다. 당장 내가 아치에게 할 수 있는 말은 각오를 다지는 정도였다.

내 입에서 ‘절대로 죽지 않으마’를 듣지 못한 아치는 결국 울기 시작했다. 하지만 떠나지 않겠다며 생떼를 쓰거나 시간을 지체하진 않았다. 아치는 이 상황을 누구보다 잘 이해했다.

아이는 눈물 콧물을 쏟는 주제에도 꼿꼿하게 허리를 펴려고 기를 쓰면서 시모어 부인을 따라갔다. 정신없이 우는 아치의 손을 잡고 이끌면서, 시모어 부인이라고 멀쩡하진 못했다. 그녀는 내내 창백하게 질려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아치와 시모어 부인, 가주 대리를 보좌할 에리카, 가주 대리의 직속 호위를 맡는 2기사단이 마침내 성을 빠져나갔다.

나는 도개교까지 나가지 않았다. 대신 성벽에 올라 아치의 행렬이 완전히 눈에 보이지 않을 때까지 우두커니 서 있었다.

보내는 심정은 참담했다. 문득 노마가 맥포이에 없어 차라리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 *

시간은 여느 때처럼 잘도 흘렀다. 나는 평소와 같은 시간에 일어나 같은 시간에 식사를 하고, 같은 시간에 침실에 들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낮 동안 집무실에 틀어박히는 대신 성벽에 올라 하염없이 동쪽을 바라본다는 것이었다.

내 곁엔 글렌이 남았다. 또한 사원에서 납치하듯이 데려온 이디오가 있었다. 그는 비록 도망가고 싶어 죽겠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내 명에 따라 맥포이에 남아 영지민을 지켜야 했다.

그는 드디어 제대로 된 밥값을 하고 있었다. 서부 신전에 고위 신관 몇몇과 성기사단을 요청해 빠르게 영지 곳곳에 배치한 것은 이디오의 연줄 덕이었다. 혹시 모를 상황에서 그들은 최소한 그 기괴한 검은 손을 막아 낼 수 있으리라.

이로써 한시름을 놓을 수 있었다. 적어도 11년 전과 같이 맥없이 당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다만 닉스가 언제 올지는 알 수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강박적으로 성벽에 올라 동쪽을 바라보는 게 고작이었다. 그저 ‘이야기’대로면 또다시 건국제에 나를 찾아오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감이 있을 뿐이었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다가오는 날짜를 셌다. 조용히 하루가 지나갈 때마다 오히려 피가 마르는 기분이 들었다. 말려 죽이려는 것처럼 시간이 느리게 가다가도 다음 날이 오는 건 또 순식간이었다.

건국제가 가까워짐에 따라 막연했던 감은 점차 확신이 되었다. 그것은 또다시 건국제에 나를 찾아올 것이라고.

건국제 당일. 해가 아직 뜨지도 않은 시간에 느릿한 걸음으로 성벽에 올랐다. 글렌이 소리 없이 내 뒤를 따랐다.

아직 어둑한 새벽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자니 비슷한 풍경 속에서 우연히 노마를 발견했던 날이 떠올랐다. 나도 모르게 하얗게 빛나는 형체를 찾기 위해 눈동자를 움직였다.

지금이라면 그에게 몇 번이고 말해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내 마음을 백번은 알려 주고 싶은데.

보이는 풍경과 내 기분은 그때와 비슷했지만, 아무리 열심히 눈을 굴려도 그날과 같은 우연은 벌어지지 않았다.

아직 그를 찾지 못했는데 마치 기다려 줄 수 없다는 듯, 태양이 가차 없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물론 정말 눈앞에 그가 나타나는 기적을 기대한 건 아니라 나는 여전히 꼿꼿한 자세로 서 있을 수 있었다.

사방이 푸르스름한 빛을 띠며 환해지기 시작했다. 그에 맞춰 쥐 죽은 듯 고요한 맥포이의 모습이 드러났다. 성에서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라곤 나뿐인 것만 같은 숨 막히는 고요였다.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다 잠시간 뻑뻑한 눈을 감았다.

‘아치는 지금쯤 북부에 들어섰을까. 노마는 내가 보낸 서신을 받고 노턴으로 향하고 있을까. 가노는 오필리아를 만났을까.’

닉스는 어디까지 왔을까.

제법 오랜 시간 눈을 감았다 뜰 때였다.

“가주님…….”

글렌이 먼 곳을 응시하며 탄식처럼 중얼거렸다. 그 목소리로 떨림이 전해졌다.

“아. 보이네.”

몇 겹의 능선 너머로 회색빛 연기가 한 줄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눈을 찌푸려야 간신히 보일 정도였지만 분명히 신호였다.

회색 연기가 마침내 시커메지기 시작했을 때, 아까보다 더 가까운 거리에서 새로운 연기가 한 줄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이로써 두 개. 다가오는 속도는 예상대로 어떤 짐승보다 빨랐다.

“……왔구나.”

마침내 세 개. 그것이 지척에 다가왔다.

“도그만 경. 지금부터 무얼 보든 자네 자리를 지키게.”

나는 산등성이 한 겹 뒤로 피어오른 회색 선을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 * *

말 한 마리가 겨우 달릴 수 있는 좁은 숲길이 말발굽 소리로 소란했다. 혼비백산한 들짐승들이 바쁘게 몸을 피했다. 그때 숲길을 헤치던 말 두 마리가 불시에 멈춰 섰다.

“잭.”

앞서가던 오필리아가 뒤를 돌며 작은 목소리로 잭을 불렀다. 그가 알고 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미리 짠 것처럼 길에서 벗어나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잭은 말 두 마리를 우거진 숲에 끌고 들어가 숨기고, 오필리아는 나무 위에 올라 망을 봤다.

얼마 안 가 말발굽 소리가 점점 가까이 들리기 시작했다. 어찌나 거세게 달리는지 말발굽 소리가 천둥처럼 커짐에 따라 지면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오필리아는 허리춤에 있는 검 손잡이를 쥔 채, 날카로운 눈빛으로 지름길에 들어선 자를 기다렸다. 중앙을 가로질러 동부로 직행하는 은밀한 숲길은 아무나 알 수 있는 길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가 검을 빼 들 일은 없었다. 지름길을 달리는 자는 수상한 인물이 아니었다.

‘……아이사가 부리는 해적이 아닌가?’

눈 깜빡할 새에 지나갔지만 오필리아는 단박에 그를 알아봤다. 구릿빛 피부에 붉은 머리칼을 가진 남자는 분명 아이사의 사람이었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