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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데드 엔딩 후에-128화 (128/139)

128.

“제가 이곳에 온 건 그저 이 기분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고 싶어서, 그뿐입니다.”

허공을 보던 메르케시가 미간을 살풋 구기며 마지막처럼 속삭였다.

메르케시가 가지고 있는 황성에서의 기억은 하나같이 끔찍했다. 칼리페시가 역저주로 쓰러진 후는 더욱 지독했다.

빠르게 썩어 가던 칼리페시. 모두가 그런 칼리페시를 외면하는 걸 메르케시는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봤다. 그녀가 옆에 있던 이유는 단순했다. 이럴 때만 친자매라고, 황제에 의해 칼라페시의 침실에 떠밀렸기 때문이었다.

가까이 있으면 저주가 옮는다는 사람들의 수군거림처럼, 어쩌면 저주가 옮아 칼리페시와 함께 죽으라는 의도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메르케시는 죽지 않았다. 그 대신 자매의 심장을 빼 그 저주를 끝냈다.

메르케시는 제게 잊을 수 없는 충격을 남긴 닉스와 칼리페시, 황제를 원망하며 도망치듯이 황성을 떠났다. 그러나 그 끝에 남은 건 기묘한 죄책감, 두려움, 꺼림칙함이었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유언을 깬 사람은 결국 제 자매가 아니라 자신이었다.

메르케시가 지그시 눈을 감았다.

“메르케시?”

숨을 죽이고 있던 아드리네가 떨리는 목소리로 메르케시를 불렀다. 그러자 눈꺼풀이 올라가고 초점이 없는 듯 흐리멍덩한 눈동자가 아드리네를 향했다.

“황후 폐하께선 그저 괴짜 같은 신관을 빌리넌트에게서 떼어 내, 내친김에 칼리페시에게 붙였을 뿐입니다. 하지만 그게 우연히 이단에 눈을 뜬 닉스였고요. 단지 그뿐입니다.”

메르케시가 마치 사실을 재확인하듯 같은 말을 반복했다.

“……이만 쉬는 편이 좋겠습니다. 거기, 너는 황녀가 머물 처소를 마련하렴.”

“그래서 저도―.”

“…….”

“저도 딱 황후 폐하께서 하신 만큼만 했어요. 딱 그만큼만. 황후 폐하께서 그러신 것처럼, 저도 정말 별거 안 했어요.”

“무얼 하셨다는 건가요?”

아드리네의 얼굴에서 삽시간 핏기가 가셨다. 순간 메르케시가 ‘어제’ 바그다트에 도착했다고 말했던 것이 그녀의 머릿속을 스쳤다.

“황후 폐하께서 칼리페시에게 닉스를 보낸 것처럼. 닉스가 칼리페시에게 낡아 빠진 경전을 쥐여 줬던 것처럼.”

아드리네의 얼굴이 대번에 일그러졌다. 벌어진 그녀의 입술에선 신음조차 나오지 못했다.

“저도 그 경전을 전해 주기만 했어요. 빌리넌트에게.”

“무슨 짓을!”

“복수, 그런 거창한 것이 아니에요. 어디 복수할 데가 있다고요? 모든 건, 우연이 모여 만든 비극이었을 뿐인데.”

“너, 너……!”

“그러니 이건…… 오랫동안 저를 괴롭힌 모든 것들에 대한 사소한 화풀이에요.”

“네가 정말 미쳤구나!”

“이제 그 애의 선택이겠죠. 부디 빌리넌트가 칼리페시를 닮지 않아야 할 텐데.”

“……!”

“칼리페시처럼 욕심이 많으면 그 힘에 관심을 가지고, 결국 죽음을 자초하고 말 테니까요.”

“메르케시―!”

아드리네가 찢어지는 비명을 내지르며 메르케시에게 달려들었다. 메르케시는 그런 그녀를 보고도 피하지 않았다. 머리카락이 쥐어뜯기는 와중에 메르케시가 죄송해요, 라고 영혼 없는 목소리로 속삭였으나 머릿속이 새하얗게 타들어 간 아드리네에게 닿을 수 없었다.

“메르케시! 이 정신 나간 년! 네가 어떻게, 어찌 감히 그런 짓거리를 해―!”

이성을 잃은 듯, 아드리네가 메르케시의 뺨을 몇 차례 쳐올리곤 악귀에 들린 것처럼 소리쳤다. 평소의 고운 목소리는 찾을 수 없었다. 메르케시의 뺨이 빠르게 부르터, 마침내 피가 터질 때였다.

“어머니?”

아드리네의 팔이 허공에서 우뚝 멈춰 섰다. 그녀는 설마 하는 심정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인상을 쓰고 제 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아들이 보였다.

“……메르케시라니.”

빌리넌트가 망연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놀란 아드리네의 손아귀에서 힘이 빠지고 메르케시가 얼굴을 치켜들었다.

13년 만에 마주한 이복동생이었다. 그와 눈이 마주치고, 피 터진 메르케시의 입술 사이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빌리넌트는 친자매인 자신보다도 칼리페시와 똑 닮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룻밤을 꼴딱 새워 남몰래 금지된 경전을 읽은 빌리넌트가 지레 겁에 질려 제 어머니를 찾은 것은, 때마침 침실을 이탈한 것은, 메르케시의 의도가 아니었다. 그녀는 빌리넌트에게 제 모습을 보일 생각까진 없었다.

모든 비극의 시작이 그렇듯 또다시, 우연이었다.

‘아, 너는 칼리페시를 참 많이도 닮았구나.’

우연이 모여 비극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며 메르케시가 빙그레 웃었다.

“많이 컸구나, 빌리넌트. 오랜만이다.”

“메르케시? 말도 안 돼. 너, 이 미친 계집이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메르케시의 태연한 인사에 그녀를 알아본 빌리넌트의 얼굴이 쉽게 일그러졌다. 그가 사람들을 밀치며 한데 엉겨 있는 메르케시와 어머니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실로 애매한 대치 상황이었다. 황후와 황태자의 기사들은 눈빛을 교환하며 메르케시를 제압하기 위해 소리 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같은 순간 빌리넌트가 아드리네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 손을 높이 치켜들었다. 그러나 메르케시는 마냥 넋을 놓고 있던 게 아니었다. 빌리넌트의 손바닥이 누이의 피 터진 뺨에 닿기 직전, 메르케시가 그의 손목을 낚아챘다.

“네가 못된 아이라 다행이야.”

그나마. 그 속삭임을 끝으로 이기오 섬에서 그랬던 것처럼 메르케시를 중심으로 강렬한 빛이 일었다. 이내 거대한 돌풍이 기다란 중정을 한차례 쓸고 지나갔다.

“…….”

메르케시의 머리칼을 붙잡고 있던 아드리네가 맥없이 돌바닥에 풀썩 쓰러졌다. 황후와 황태자를 모시는 시종과 신관, 기사들이라고 예외는 없었다. 거대한 충격에 의해 하나둘씩 끈 떨어진 인형처럼 쓰러지는 모습은 기이해 보였다.

오래된 중정엔 메르케시와, 그녀의 손아귀에 손목이 잡힌 빌리넌트만이 우뚝 서 있었다.

“놀랐니, 빌리넌트?”

창백하게 질려 덜덜 몸을 떠는 빌리넌트를 내려다보며 메르케시가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가 손아귀에 힘을 풀자 빌리넌트는 돌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꼴이 됐다.

퍽 다정한 미소를 지은 메르케시가 반쯤 정신이 나간 동생을 내려다본 끝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러곤 그의 귓가에 대고 나직하게 속삭였다.

“나는 칼리페시보다 강하단다.”

메르케시가 마치 뱀처럼 소곤거림과 동시에 빌리넌트의 눈동자에 또 한 번 경악이 스쳤다. 그는 난생처음 느끼는 새로운 공포심에 사로잡혔다.

“너는 어떻지?”

빌리넌트는 그 물음에 답하지 못했다. 절대로 이길 수 없는 상대를 마주한 충격적인 감각에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아버지께서 이 미친 여자를 황위에 앉힐 생각이야.’

분에 못 이겨 그렇게 소리를 치곤 했지만, 빌리넌트는 메르케시가 자신을 제치고 황위에 오를 수 있다곤 진심으로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것은 단지 투정과 같은 말이었다. 어머니에게 하는 약한 소리에 불과했다.

‘이러다가 정말 저 정신 나간 계집애가 황제가 되는 것 아닌가?’

호적수 없던 인생에 날벼락이 떨어졌다. 안 그래도 불안정했던 빌리넌트의 정신 줄은 빠르게 마모되어 그 자리에서 끊어졌다. 그는 곧장 극심한 공황 상태에 빠져 돌바닥을 허우적댔다.

“…….”

메르케시는 가쁘게 숨을 들이켜는 동생을 무표정하게 바라보다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기분은 여전히 나아지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죽을 때까지 조금도 그날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을 직감하며 초토화된 중정을 터덜터덜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안 돼, 이러고 어딜 가는 거야. 이대론…….’

빌리넌트가 핏발 선 눈알을 굴려 멀어지는 메르케시를 바라봤다. 그는 호흡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위태롭게 헐떡였다. 눈앞이 점차 흐려지는 듯했다.

그때였다.

“저 여자보다 강한 힘을 원하는구나.”

마치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빌리넌트에게 누군가의 속삭임이 닿기 시작했다. 그건 노인의 목소리 같기도, 젊은 청년의 목소리 같기도 했다. 쉬이 목소리에 홀린 빌리넌트가 잘게 경련하는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죽여 버릴 거야. 당장, 당장 저 미친 여자를 죽여 버릴 거야. 힘이, 힘이 필요해. 그렇지 않으면―.”

저게 나를 죽이고 내 자리를 빼앗을 거야.

인생 최고의 위협을 느낀 그의 사고가 극단적인 방향으로 튀었다. 정신을 잃은 어머니와 저를 감시하던 이들을 등지고, 달콤한 속삭임을 따라 빌리넌트가 절박하게 달리기 시작했다.

기이한 섬광이 아직 해가 지지 않아 훤한 사위를 대낮처럼 밝혔다. 헤이롯을 찾아 그의 거처로 바쁘게 향하던 니콜라스가 섬광이 번뜩인 방향을 향해 반사적으로 고개를 틈과 동시에, 선명한 파동과 압력이 그를 할퀴고 지나갔다.

니콜라스의 미간이 좁아 들었다. 황태자의 거처가 있는 방향이었다.

그 시각 헤이롯 역시 이상을 목격했다. 그는 자신의 거처에 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닉스를 봉인하기 위해 동굴에 갈 준비를 하던 것도 아니었다. 그는 신전 전체가 내려다보이는 바그다트의 가장 높은 탑에 올라 있었다.

“이제 그만 지지부진한 것을 끝내야지.”

맥포이 가주에게 딱히 유감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 헤이롯은 그저 흘러가는 대로, 지긋지긋한 굴레를 끊을 실마리를 찾았을 뿐이었다.

소란에 빠진 바그다트를 내려다보며 그가 상쾌한 미소를 지었다.

* * *

급히 올라갔던 도개교가 내려가고 그 사이로 말 한 마리가 다급히 빠져나왔다.

다그닥 다그닥. 힘찬 말발굽 소리가 울려 퍼지길 한참,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리던 말이 거세게 고삐를 당기는 힘에 의해 불시에 멈춰 섰다.

가노가 능숙하게 고삐를 틀어 뒤를 돌았다. 다시 도개교가 올라가 굳게 닫힌 맥포이 성이 한눈에 담겼다.

맥포이 성은 견고한 요새를 닮았다.

“도망치는 건 좋은 수가 아니야. 또한 성주는 성을 버리지 않지. 성을 버리라는 건 내게 죽으라는 소리야.”

가노는 성주가 성을 닮은 것인지, 성이 성주를 닮은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가주의 의무는 열다섯 아이사 맥포이를 부득불 살게 했지만 가노의 눈에 그 의무라는 것은 이제 그저 족쇄처럼 보였다.

“고귀한 희생을 하겠다는 말이 아니야. 이래 봬도 살아 보겠다고 남은 것이니 그런 표정 마. 나는 안 죽을 거야. 혹, 일이 잘못되더라도 쉽게 죽어 주진 않을 거다.”

아이사는 누군가를 안심시켜 주기 위해 섣부른 말을 하지 않는다. 그녀는 언제나 여러 가능성을 이야기하곤 했다. 특히 자신의 일이라면 유독 회의적이었는데, 이는 가노가 질색하는 부분이었다.

“그대에게 다시 의뢰를 하지. 오필리아를 찾아. 절대로 죽여서는 안 되며, 산 채로 잡아 올 필요도 없다. 이 서신만 쥐여 주면 돼.”

아이사는 이미 모든 것이 정해져 있는 사람처럼 행동했다.

남편을 사랑한다고 당당하게 이야기하길래 이번엔 조금 다를 줄 알았더니. 눈빛이 흔들렸던 것도 잠시, 그녀는 이미 모든 결정을 끝낸 지 오래였다. 한 고집 하는 그녀는 일단 결정을 내리면 완고했다.

“자네는 이번엔 반드시 오필리아를 찾아서 그 애에게 이 서신을 넘겨야 해. 내가 무사히 살아남길 바란다면 말이야.”

또한 자신의 뜻을 관철하기 위해 치사한 말도 서슴지 않았다. 서신을 받아 드는 가노는 손끝을 달달 떨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도 잘 부탁해. 자네에겐 언제나 고마워.”

난생처음 맹목적인 사랑을 느끼게 해 준 사람이 그렇게 말하며 웃는데 어떻게 그 뜻을 저버릴 수가 있을까. 가노가 이를 악물고 다시 고삐를 틀어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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