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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데드 엔딩 후에-127화 (127/139)

127.

“어제 닉스가 스스로 반쯤 봉인을 깼을 때, 맥포이를 죽여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맥포이가 도둑이기 때문이라고 했어요, 라고 클로이가 덧붙이자 노마가 홀린 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시에 니콜라스의 미간이 반사적으로 좁아 들었다. 니콜라스가 다소 성급하게 물었다.

“대신관이 들었나?”

“……예, 디아시 가주님. 저로서는 그 말의 진의를 파악할 수 없었지만, 대신관님의 반응이 이상했습니다. 그것이……. 꼭 즐거운 듯, 보여서.”

그 대답에 결국 니콜라스마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노마와 니콜라스의 반응을 본 클로이는 일이 잘못된 게 맞다는 것을 확신했다. 제대로 찾아왔다는 것을 알아차린 그녀가 급하게 말을 이었다.

“어제 곧바로 맥포이 가주님께 서신을 보냈으나, 돌아오는 연락을 기다리기엔 늦을 듯해 고민 끝에 맥포이 경을 찾아왔습니다. 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대신관을 만나야겠다.”

나지막하게 중얼거린 노마가 즉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같은 순간 기사 하나가 다급하게 달려 들어왔다. 불길한 예감에 노마는 걸음을 멈춰 섰다.

“가주님, 맥 바인스 경으로부터 서신이 도착했습니다. 메르케시 황녀를, 놓쳤답니다.”

기사가 맥의 부상과 메르케시의 탈주 소식을 전했다. 일이 완전히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니콜라스가 반사적으로 제 형을 돌아봤다.

그때 노마는 아래를 보고 있었다. 니콜라스가 형의 시선을 따라갔다. 그 시선 끝엔 노마의 로브 끝을 물어 당기고 있는 앙투아네트가 있었다.

아기 맹수는 절박하게 제 주인의 옷자락을 당기고 있었다. 단순히 가지 말라는 몸짓이 아니었다. 앙투아네트를 내려다보던 노마가 아기 맹수가 잡아당기는 방향을 멍하니 바라봤다.

“……니콜라스.”

서쪽을 바라보며, 그가 홀린 듯 입을 열었다.

“나는 맥포이로 돌아가 봐야겠다.”

대신관을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고 노마가 맥포이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 * *

ㅎㅂㄹㄱ

어제 아침 식사 자리에서 아드리네에게 패악을 부린 뒤, 빌리넌트는 줄곧 자신의 침실에 틀어박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시종이 죽을 각오를 하고 그의 침실 문을 두드려 보았으나, 들어오면 죽여 버리겠다는 살벌한 협박만 돌아왔다.

빌리넌트의 기도를 돕던 신관들은 난감했다. 그들은 결국 뒤늦게 아드리네를 찾았다. 아들의 패륜적인 행태에 아드리네는 어제부터 유난히 까칠했다. 그녀에게 빌리넌트의 상태를 전한 것은 그들 나름대로 최후의 수단이었다.

“황태자가 어제부터 방 안에서 나오지 않는다고?”

아들에 대한 노기가 가시지 않아 그때까지 빌리넌트를 찾지 않았던 아드리네의 심장이 대번에 아래로 꺼졌다. 성년식까지 고작 이틀, 수순처럼 헤이롯의 경고가 떠올랐다.

“그 사실을 이제야 전하며 어쩌니!”

아드리네가 날카롭게 소리를 지르며 소식을 전한 시녀의 뺨을 쳐올렸다. 시녀의 잘못이 아니었지만 그녀는 눈치껏 아드리네의 발밑에 납작 엎드렸다.

씩씩거리던 아드리네가 신경질적으로 창밖을 돌아봤다. 어느새 해가 많이 내려와 있었다. 그녀의 고운 미간이 사정없이 좁아 들었다.

바그다트의 하루는 짧았다. 대신관이 해가 진 후에는 웬만하면 활동을 자제하라 했으니, 황태자를 달래려면 빠르게 움직여야 할 듯했다.

가볍게 치장을 마친 아드리네가 걸음을 서둘렀다. 아들의 거처는 하필이면 그녀와 멀리 떨어져 있었다. 메헤라의 말씀을 따르기 위해 남녀의 침실 건물이 정반대에 위치했기 때문이다.

아드리네가 황태자의 거처로 이어지는 기다란 중정을 지날 때였다. 고위 신관복을 걸친 신관 하나가 뜬금없이 길 한가운데에 버티고 서 있는 게 보였다.

신전 안에서 후드를 깊게 눌러쓰고 있는 것부터 몹시 수상스러워, 아드리네를 호위하던 황실 기사들이 재빠르게 튀어나와 경계 태세를 갖추었다.

아드리네는 감히 제 앞을 가로막은 정신 나간 신관에게 호통을 치려 했다. 하지만 수상한 신관이 천천히 후드를 내린 것이 먼저였다.

기사들의 어깨 사이로 그 얼굴이 천천히 드러나고, 그에 맞춰 아드리네의 얼굴이 끔찍하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오랜만이에요. 위대하신 황후 폐하, 아니 어머니.”

10년도 전에 황궁을 떠났던 메르케시였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얼굴엔 세월의 흔적이 새겨졌으나 눈앞에 서 있는 이는 분명 메르케시였다. 아드리네는 순간 비명을 지를 뻔했다.

“세상에, 메르케시 황녀. 뭣들 하나! 황녀에게 예를 갖추지 않고.”

하지만 아드리네는 가면을 만드는 것에 능숙했으니, 비명을 지르는 대신 곧바로 이게 얼마 만이냐는 듯, 그동안 어떻게 지낸 것이냐는 듯, 기쁨과 걱정이 넘치는 표정을 만들었다.

아드리네와 메르케시 사이를 가로막았던 기사들이 옆으로 비켜섰다. 아드리네는 떨림을 감추고 메르케시에게 한 발 한 발 다가갔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나요.”

여긴 어떻게 온 거냐고 멱살을 잡아 흔들고 싶었으나 아드리네는 서두르지 않았다. 성년식이 고작 이틀 남은 지금, 닉스가 가까이 있는 지금. 절대로 무슨 일이 생겨선 안 됐다.

메르케시와 가까이 마주 보고 서서 친근하게 양손을 부여잡은 아드리네는 필사적으로 무해한 사람을 연기했다. 메르케시가 맞잡힌 손을 바라보며 무표정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위고 신전에 다녀왔어요. 이곳엔 어제 도착했습니다.”

“……어제, 요. 그랬군요. 남쪽의 섬을 여행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아드리네의 감시인은 여태 메르케시가 세워 둔 ‘가짜’를 지켜보고 있었다. 덕분에 아드리네는 메르케시가 이곳저곳을 들쑤시고 다녔다곤 상상하지 못했다.

“위고 신전에는 대신전 서고의 소실을 염려해 만든 예비 서고가 있다는 사실을 아실 겁니다.”

주제를 바꿔 보려 했으나, 위고 신전에 대한 이야기가 끝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대신전은 일지, 경전 등 수많은 기록을 서고에 보관했다. 그 기록들은 하나같이 중요했기 때문에 내용을 베껴 곳곳에 분산해 놓았는데, 그중 한 곳이 위고였다. 그 사실을 모르지 않는 아드리네가 남몰래 침을 삼켰다.

메르케시가 속삭였다.

“칼리페시의 주말 기도를 기록한 일지를 봤어요.”

“……그래요.”

주말 기도. 무언가 낱낱이 밝혀질 것만 같은 기분에 아드리네는 저도 모르게 손끝에 힘을 줬다.

“칼리페시가 죽은 그해 봄부터 그녀의 주말 기도를 담당했던 신관의 이름이 모조리 지워져 있더군요.”

“그 이름은 더 이상 누구도 불러선 안 되니까요. 황녀, 그만두세요. 황제 폐하의 노여움을 살 겁니다.”

아드리네가 입 닥치라는 말을 부드럽게도 했다. 목소리만 들으면 진심으로 메르케시를 걱정하는 것만 같았다.

“그날은 왜 제게 물으셨습니까?”

“내가 황녀에게 뭔가 물었던가요?”

메르케시의 질문에 아드리네는 도무지 감을 잡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했다. 정말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듯한 반응에 메르케시는 그럴 줄 알았다는 양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정말 별 이야기가 아니었으니, 기억나지 않으실 겁니다. 저도 그랬으니.”

“싱거운 이야기네요. 메르케시, 그대의 동생 빌리넌트의 성년식이 곧입니다. 이만―.”

“그즈음에 빌리넌트의 기도를 담당했던 신관의 이름도 지워져 있더군요. 칼리페시의 담당 신관이 ‘닉스’로 바뀌기 직전, 몇 주간 말입니다.”

자연스럽게 대화를 끝맺으려 했던 아드리네는 메르케시의 입에서 기어코 ‘닉스’가 나온 순간 평정을 유지하지 못할 뻔했다. 그녀가 초조함을 숨기며 입술을 뗐다.

“……칼리페시를 맡기 전, ‘그것’이 빌리넌트의 기도를 담당했다는 말인가요? 그것참, 무서운 이야기군요.”

“어쩌면, 닉스에게 ‘그 망할 책’을 받은 게 칼리페시가 아니라 빌리넌트였을지도 모르죠.”

“책?”

“알포의 힘과 그 저주법을 적은 오래된 경전 말입니다, 어머니.”

메르케시가 아드리네에게 바짝 다가서며 속삭였다. 아드리네가 반사적으로 어깨를 움츠렸다.

“어째서 칼리페시에게 닉스를 붙이셨나요. 어머니.”

“그즈음에 빌리넌트의 담당 신관이 바뀌었던 일을 묻는 거라면, 그래요. 생각해 보니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단순히 빌리넌트가 그 신관을 어려워한 탓이었어요. 그뿐입니다.”

“황자의 담당 신관 자리에서 쫓겨난 자가 어떻게 황태녀의 담당이 될 수 있었을까. 누군가가 일부러 붙인 게 아니고서야.”

메르케시가 코웃음을 치며 비아냥거렸다. 그녀의 반응에 아드리네가 정색했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건가요? 단순히 우연입니다.”

“칼리페시가 닉스를 만난 게 우연만은 아닌 셈이지요. 당신께서 담당 신관을 바꾸셨으니까.”

“그만. 그대가 미친 게 분명하군요. 설령 내가 빌리넌트의 담당 신관을 칼리페시에게 떠넘겼다 한들, 고위 신관이 이단인 줄 그 당시에 누가 상상이나 했나요? 칼리페시가 그렇게 된 건 누구의 탓이 아니라 그녀 스스로가 이단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칼리페시가 죽은 건 내 탓이 아니야! 겉으론 여전히 차분했지만, 아드리네는 속으로 길길이 날뛰었다.

그녀는 맹세코 그 신관이, 닉스가 이단에 빠져 있는 줄 몰랐다. 그저 기분 나쁜 놈으로 알고 그자를 칼리페시에게 붙여다 그녀의 속을 긁을 생각이었다. 그게 그런 미친놈인 줄 알았다면―.

‘알았다면, 칼리페시에게 닉스를 붙이지 않았을 것인가?’

아드리네의 마지막 남은 양심이 속삭였다. 그녀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지만 한순간이었다.

‘그런 가정이 무슨 소용이람? 나는 정말 몰랐다고!’

아드리네는 이를 악물었다. 칼리페시가 이단을 저지른 끝에 역저주로 죽은 것은 그녀의 의도가 아니었다. 그녀는 칼리페시가 성질을 못 죽이고 끝내 고위 신관 하나를 때려죽여 신전의 미움을 사는 정도나 바랐다.

‘그러니 칼리페시가 죽은 게 어디 내 탓인가? 그 비극은 전부, 욕심 많은 칼리페시가 재촉한 것이지. 난 단순히 평판을 떨어뜨릴 생각이나 했다고.’

아드리네는 언제부턴가 표정 관리를 전혀 못 하고 있었지만 자각하지 못했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메르케시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네. 맞습니다.”

그러곤 산뜻한 목소리로 아드리네의 주장에 동의했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아드리네는 되레 찔린 사람처럼 움찔 몸을 떨었다.

“실은, 황후 폐하께서 대단한 음모라도 꾸며 그 비극이 일어났던 게 아닐까―. 그런 기대를 하며 위고 신전에 찾아갔던 거였지만. 맥이 빠질 정도로, 정말 별일 안 하셨더군요.”

“…….”

“그저 사소한 일 하나로 누군가의 운이 뒤바뀐 것 같아서. 저는 더더욱 누구를 탓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요.”

“황녀. 칼리페시의 일은 유감입니다. 하지만 벌써 10년도 더 된 일이에요. 이만…….”

“하지만.”

더 이상 아드리네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 메르케시는 허공을 바라보며 운을 뗐다.

“칼리페시가 닉스를 만나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그래서 칼리페시가 저주에 빠지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생각하면 말이에요.”

아드리네가 반사적으로 뒷걸음을 쳤다. 더 이상 메르케시를 상대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아드리네는 그동안 메르케시가 미쳤다는 소문을 퍼뜨리는 데 일조했다. 그녀가 진짜 미쳤는지 미치지 않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내 자매를 죽이지 않아도 됐을 거라고 생각하면, 역시 이 기분을 견딜 수가 없어요. 황후 폐하, 다시 한번 당신께서 옳으셨습니다. 저는 그날 이후로 정말 미쳐 버린 게 분명해요.”

그러나 황제와 아드리네가 만들어 낸 소문처럼, 메르케시는 정말 미쳐 있었다. 메르케시의 공허한 눈동자와 마주치고, 아드리네의 입이 경악으로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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