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
“그런…….”
“이런 일을 아주 예상하지 못한 것도 아니잖나. 우린 그게 살아 있다면 언젠가 날 찾아올 거라는 것을 알았지. 그뿐이야.”
“봉인이 풀리기라도 했다는 말씀이십니까? 하지만, 말이 안 됩니다. 광신도의 씨를 말렸는걸요.”
나도 모르겠지만 그렇게 정해졌대, 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순간 실소를 뱉을 뻔했다.
봉인된 닉스를 풀 만한 사람은 죄다 없앴다. 나 역시 누가, 왜, 어떻게 그 봉인을 푼다는 것인지 지금으로서는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하지만 닉스가 나를 찾아오리란 것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전조도 없이 들이닥치는 것보단 상황이 낫다. 시간을 벌었으니.”
에리카는 한참 넋 나간 얼굴로 나를 바라본 끝에, 대답 대신 다시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 듯, 빠르게 지나가는 차창 밖 풍경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담담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늘어놓았지만 아까부터 불안하게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기 어려웠다. 나는 애써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에리카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에리카가 보고 있는 반대편 차창 너머 풍경을 바라보다, 울컥 치미는 참담함에 다시 눈을 감을 때였다. 마차가 예고 없이 급정차했다.
“……!”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몸이 앞으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그대로 엎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순간 에리카가 몸을 날려 앞으로 튕겨 나오던 나를 받아 냈다. 반동 탓에 좁다란 마차 안을 구르긴 했으나 에리카가 나를 감싸 안은 덕분에 커다란 아픔은 없었다.
몸 아래에서 얕게 앓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황급히 몸을 일으켜 에리카 위에서 비켜섰다.
“에리카! 괜찮나?”
“저는 괜찮습니다. 그보다―.”
통증이 있는 듯 에리카가 눈을 가늘게 찡그리며 말끝을 흐렸다. 그녀의 시선이 차창 밖을 향했다.
나는 반사적으로 그 눈길을 따랐다. 차창으론 푸른 벌판이 보일 뿐이었다. 고요하다 못해 목가적인 풍경이었으나, 심장이 아까보다 더욱 불안하게 뛰기 시작했다.
설마 벌써 닉스가 나를 찾아온 걸까?
“……있어라.”
나는 일단 에리카를 부축해 제대로 앉힌 후, 마차 문을 잠시간 노려봤다. 쿵쿵 뛰는 심장 소리가 바깥의 누군가에게 들릴 것만 같았다. 마차 문을 향해 신중하게 손을 뻗는데, 불시에 문이 열렸다.
“가주님?”
마차와 밀착해 달리던 글렌이었다. 다급하게 문을 연 그가 당황한 얼굴을 하고 나를 바라봤다.
“어째서 그런 표정이십니까. 다치신 곳은, 없으십니까?”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에리카 앞에서 실컷 덤덤한 척을 한 게 무색했다. 나는 글렌이 바로 옆에 있다는 것을 잊을 정도로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검정 깃발이 보입니다!”
그때 선두 쪽에서 기사의 목소리가 우렁차게 들려왔다. 검정 깃발은 위급함을 알리는 표시였다.
“가주님, 롬닥의 가노입니다!”
“하…….”
그제야 나도 모르게 참았던 숨을 내쉬며 눈꺼풀을 감았다.
솨아아―. 무더운 여름 바람이 피부를 스치고 지나간 것과 미약한 안도감에 속눈썹이 바르르 떨린 것은 거의 동시였다.
닉스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음에도 떨림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 * *
집무실의 창으로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도개교가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 풍경을 눈에 담은 끝에 천천히 등을 돌렸다.
“……메르케시의 성력이 그 정도라고?”
가노가 들고 온 소식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좋으냐 나쁘냐를 따지자면 당연히 나쁜 소식이었다.
메르케시는 뜻밖의 폭탄이었다. 그녀는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복잡한 인물이었다.
“완전히 미친 여자야. 선박 밑바닥을 모조리 부숴 놓고 불까지 지르고 튀었어. 섬 하나를 말아먹었다고.”
“어째서…….”
내가 아는 한, 메르케시는 특별한 사건을 일으키지 않는다. 다만 <오필리아와 밤>에서 그녀는 다음 황제를 낳았다.
아직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실은 빌리넌트는 버리는 패다. 그는 결국 황제가 되지 못한다. 성년식을 치르고 얼마 안 가 그가 괴롭히던 시종의 손에 어이없게 요절하기 때문이다.
황제는 결국 울며 겨자 먹기로 메르케시를 불러들이고, 황성을 혐오하는 그녀는 제 딸을 황제에게 던져 주고 영영 사라져 버린다.
‘메르케시는 분명 그게 다였는데.’
내가 아는 메르케시의 행적과 너무나 달랐다. 가노에게 메르케시를 주시하라 이른 건, 그 딸의 신분을 증명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수단이 그녀이기 때문이었다.
그 딸은 아직 너무 어렸다. 내 입장에선 황가가 잠시 혼란에 빠지는 것보다 빌리넌트가 죽지 않거나 차라리 메르케시가 직접 황제가 되는 편이 나았다.
물론 빌리넌트와 메르케시가 황제가 되는 것이 조금 더 편할 뿐이니, 굳이 나설 정도는 아니었다. 메르케시의 딸도 어쨌건 로덴시가 아닌가. 그러니, 로덴시의 역할은 그게 다였을 텐데.
“내 패착이다.”
<오필리아와 밤>은 어디까지나 오필리아의 이야기였다. 거기 나온 메르케시의 사연은 극히 일부였을 뿐, 그녀만의 이야기가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내가 살아남으면서 바뀐 상황들이 메르케시에게 어떤 영향을 준 듯했다.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으나, 나는 이 사실을 간과하고 말았다.
목소리가 말한 비틀기는 이런 걸 말한 것일까. 멈췄다고 생각했던 그놈의 이야기는 단 한 번도 멈춘 적이 없었던 모양이다.
“황녀를 호위하던 바인스인가 뭔가 하는 디아시 기사 놈을 하나 도와줬어. 그의 말에 의하면 메르케시가 힘을 숨기기로 무슨 약속을 했다더군. 내 생각엔―.”
“칼리페시와 한 것이겠지. 위고로 향했다고?”
“곧장 추적한 결과론 위고에 들어간 것까지 맞아. 적어도 제 호위 기사에게 한 말에 거짓은 없는 것 같더군.”
“단순히 딸을 보자고 그대와 바인스 경의 발을 묶을 필요는 없어. 할 게 있는 거야.”
“당신 생각처럼 닉스가 곧 당신을 찾아올 거라면, 내 감이 메르케시가 거기 한몫했다고 이야기하는군. 그렇다면 더더욱 시간이 없어.”
가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그는 뭔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급해 보였다.
“메르케시가 선박마다 불을 지르는 바람에 일주일은 섬에 잡혀 있었어. 그 여자가 위고에 들어갔다는 것도 벌써 일주일 전이지. 뭔가가 시작됐다면 한참 전이라고. 그러니 일어나, 아이사. 생각할 시간 없어.”
가노의 재촉에도 나는 우두커니 선 채 움직이지 않았다.
“일어날 일은, 반드시 일어난단다.”
그 목소리가 발목을 잡았다. 가노 말이 맞았다. 메르케시가 무엇을 위해 움직이는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메르케시든 아니든 누군가가 닉스의 봉인을 풀 것이고, 깨어난 닉스가 맥포이 가주를 찾아올 것이라는 사실이다.
아이사 맥포이가 닉스에게 살해당하고 오필리아가 다시 성력을 되찾는 이야기가 시작됐다. 한참 전에 이야기가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자 발밑이 아득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오필리아를 만나 이것저것 실험해 보려던 계획은 폐기다. 승산 없는 싸움은 하지 않는 것이 롬닥의 철칙이었지만, 이번엔 어쩔 수 없을 듯했다.
기회는 단 한 번. 되든 안 되든 부딪혀 볼 수밖에.
심호흡 끝에 눈을 감았다 뜨자 나를 바라보고 있던 가노와 시선이 마주쳤다. 새삼 그의 얼굴이 굉장히 상한 게 눈에 들어왔다. 밤낮없이 맥포이를 향해 달린 것이 분명했다.
“사람 불안하게 왜 그딴 표정을 하는 거야. 누가 보면 롬닥이 망한 줄 알겠어. 메르케시는 그저 미친 여자야. 설마 그 여자가 바그다트까지 가서 봉인을 풀거나 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별일 없을 거야, 그러니까―.”
거짓말. 어쭙잖은 위로였다. 가노는 짐승처럼 촉이 좋았다. 특히 위험에 관해서라면 백발백중이었다.
“자네 감 좋잖아.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미치게 하네! 이럴 시간 없어. 가자고!”
어느새 코앞까지 성큼 다가온 가노가 결국 본심을 토해 내며 언성을 높였다. 당장 그를 따라 성을 떠나지 않으면 울기라도 할 것처럼 불안해 보였다.
하지만 가노가 나 대신 길길이 날뛰어 준 덕분일까? 어쩐지 머릿속이 점점 차분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차분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가노.”
“가자니까!”
“내게 할 말이 있으면 해도 좋다.”
눈치 빠른 가노는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단박에 이해했다. 그의 얼굴이 이번엔 해괴하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허락하지.”
“지금, 이런 상황에서 그런 말이 나오나? 시답지 않은 농담할 새가 없다니까.”
그가 모른 척 시선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자네가 알기에 내가 재미로 이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인가?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일 거야. 어서 해 봐.”
가노의 항의처럼 이런 상황에 이런 분위기라 미안하긴 했지만, 일전에 내 청혼을 망친 값이라고 치고 한 번 더 그를 재촉했다.
가노가 통탄한 표정으로 말없이 나를 바라봤다. 누군가의 넘치는 마음이 더 이상 무섭지 않았다. 나는 그의 눈빛을 피하지 않았고, 그는 길게 침묵하지 않았다.
“사랑해. 오래전부터 사랑했어.”
그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훌륭한 고백이었다. 피를 토해 내듯이 내뱉어진 그의 고백에 나는 반사적으로 숨을 들이켰다.
역시 가노는 나보다 여러모로 나았다. 고백조차 말이다.
“고맙네.”
진심으로 고마웠다. 작게나마 미소를 지으며 대답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노마를 사랑해. 내 남편 되는 사람 말이네.”
가노의 말처럼 시간이 별로 없기 때문일까. 번번이 실패한 것이 무색하게 노마를 사랑한다는 낯간지러운 고백은 의외로 잘도 나왔다.
뻔뻔할 정도로 당당한 거절에 가노가 골 때린다는 듯이 헛웃음을 지었다. 그가 찡그리듯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래. 잘했어. 잘한 거야.”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해.”
노마 디아시를 물에서 건져 낸 건 아주 잘한 일이지. 그를 사랑한 건 아주 잘한 일이라고,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당신도 그럴 때가 됐지…….”
가노가 정말 삼촌, 오라버니라도 되는 양 독백을 하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재차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그는 가끔 정말 보호자처럼 굴 때가 있었다.
“속이 다 후련하군. 가노, 자네도 그런가?”
“하여간 제멋대로야. 오늘은 정말 마녀 같아.”
“지금 말하지 않으면 기회가 없을지도 모르잖아. 탄신 선물로 단도를 보내온 것이 기특해 특별히 자비를 베풀었거늘, 말이 심하군.”
“재수 없는 소리. 청승 떨지 마.”
내가 부러 너스레를 떨자, 가노가 대번에 웃음기를 지우고 엄한 얼굴로 말했다.
“그 허여멀건 놈을 사랑한다며. 그럼 더더욱 살아야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살아남아야지.”
단호한 목소리가 내 머릿속에 경종을 울렸다. 그래, 나는 노마와 오래오래 함께 살기로 약속했다. 그가 돌아오면 이번에야말로 확실하게 사랑한다고 말하려 했었지.
“떠나자, 아이사. 살아남아야지.”
가노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천천히 시선을 내려 커다란 손바닥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마음이 어느 때보다 소란했다. 과연 롬닥의 가노였다. 그는 성에 남으려는 나를 설득하기 위해 아주 효과적인 방법을 선택했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