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의 데드 엔딩 후에-125화 (125/139)

125.

호위는 어디에 갖다 버렸는지 디아시의 젊은 가주, 니콜라스가 단신으로 바그다트의 신전을 가로질렀다. 밤새워 닉스를 봉인한 사람 같지 않은 가벼운 몸놀림이었다.

바람처럼 빠르게 달리던 그가 마침내 신전 입구에서 멈춰 섰다. 그의 금색 눈동자에 은색 자수가 새겨진 로브를 펄럭이는 무리가 들어왔다.

하얀 후드를 뒤집어쓴 채 무리의 선두에 선 남자가 때마침 천천히 등을 돌렸다. 그가 천천히 후드를 내리자, 햇빛 아래에 그보다 더 환한 미소를 띤 얼굴이 드러났다. 어제 늦게 바그다트에 도착했다던 그의 형, 노마였다.

“노마!”

니콜라스가 큰 목소리로 제 형을 불렀다.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노마가 사르르 눈꼬리를 접으며 팔을 흔들었다.

그와 동시에 평소 한 치의 빈틈도 허용하지 않는 니콜라스의 얼굴이 부드럽게 풀어졌다. 그가 다시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1년 만의 재회였다.

“…….”

니콜라스는 자신을 경계하는 새카맣고 조그만 생명체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귀엽지.”

그때 노마가 뿌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니콜라스는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으나 실은 썩 귀엽지 않았다. 거짓말을 하는 것은 가칙에 어긋나는 일이지만, 제 대답에 형이 만족스럽다는 듯이 웃으니 이런 거짓말은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니콜라스가 짧은 합리화를 마치고 다시 노마의 품에 안겨 있는 아기 맹수에게 눈길을 돌렸다. 앙투아네트가 기다렸다는 듯이 와앙, 송곳니를 드러냈다.

“…….”

낮선 사람을 봐서 경계하는 줄만 알았더니 아무리 봐도 자신이 마음에 안 드는 게 맞는 모양이다. 앙증맞고 깜찍한 외모를 가졌다고 해도 사납게 이를 드러내는 모습만 보여 주니 귀엽기보단 다소 위협적이라는 게 맞는 표현일 듯싶다.

신기한 점은, 그런 앙투아네트의 모습이 묘하게 익숙하다는 것이었다.

“앙투아네트는 아이사와 닮았지. 내 아내 말이다.”

아―.

들어도 들어도 적응이 안 되는 웅장한 이름에 잠깐 멈칫한 니콜라스는 그제야 묘한 기시감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절 보면 아르릉거리는 아기 맹수는 맥포이 가주와 닮은 구석이 많았다.

깨달음도 잠시, 니콜라스는 굳이 ‘아내’라고 덧붙이고 은근히 볼을 붉히는 형을 보며 눈을 깜빡였다. 니콜라스가 물었다.

“노마. 잘 지내?”

니콜라스다운 단순한 문장이었으나 노마는 동생이 묻고자 하는 바를 알았다. 그가 생각만 해도 즐겁다는 듯, 엷은 웃음을 머금고 대답했다.

“매일이 기대될 정도로 잘 지내. 내 부인께선 무척 귀엽고 재밌으시거든. 그녀와 있다 보면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다. 그렇다고 눈을 뗄 수도 없지. 네가 연인에 대해 이야기하며 너도 모르게 웃는 걸 봤을 때 어떤 기분인가 궁금했는데, 바로 이런 기분이었을까 싶다.”

니콜라스의 낯에 잠시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 노마가 사랑한다는 인물은 가상의 인물이 아닐까? 귀엽고 재밌다니. 일단 자신이 아는 맥포이 가주는 아닌 듯했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찰나의 표정 변화였지만 노마는 기가 막히게 동생의 혼란을 알아차렸다. 그는 동생의 반응에 그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굳이 저 혼란을 해소해 주지는 않을 생각이다. 아이사의 귀여움은 자신만 알면 되었다.

“얼굴이 많이 상했다.”

대신 노마는 동생을 향해 천천히 손을 뻗었다. 니콜라스의 이마 앞에 머문 노마의 손끝에서 그를 닮은 따스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어렸을 때나 하던 간지러운 애정 표현에 니콜라스가 픽, 웃음을 흘렸다. 아무나 볼 수 없는 귀한 표정이었다.

“지낼 만해.”

니콜라스가 이런 것쯤은 고생도 아니라는 듯이 조용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담담한 동생의 목소리에 노마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형제 사이에 잠시간 아련한 눈빛만이 오갔다. 말수 적은 디아시는 때때로 눈으로 대화를 하곤 했다.

그러길 한참, 노마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니콜라스.”

“응.”

“염치없는 것을 알지만, 나를 조금 더 도와주겠어?”

니콜라스는 형의 부탁이라면 습관처럼 고개를 끄덕여 긍정을 하고 봤다. 제 형이 바그다트에 방문한 진짜 목적이 아무래도 따로 있는 모양이었다.

“봉인으론 부족해. 닉스를 완전히 없앨 방법을 찾아야겠다. 서부에서 단서를 찾는 것은 한계가 있더군.”

“……알고 있는 방법, 오래된 방법은 다 시도해 봤어.”

“옛 신전의 기록도 소용이 없는 모양이구나.”

낮게 가라앉은 형의 목소리에 니콜라스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여신이 강림하지 않는 이상 그것을 없앨 수 없는 걸까. 잠시 눈꺼풀을 내렸다 올린 노마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그 상태를 직접 보고 싶은데.”

“하지만 형.”

니콜라스의 미간이 걱정스럽게 좁아 들었으나, 노마는 단호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난 이제 괜찮다. 이고의 목소리도 이젠 거의 들리지 않아. 무엇보다 언제까지 네게 전부 맡겨 둘 수 없고.”

“난, 괜찮아.”

“……닉스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노마가 입 밖에 내뱉는 것조차 힘이 든다는 듯 한 차례 헛숨을 삼켰다.

“그것이 또다시 아이사를 해치려 드는 것보다 두려운 게 없다.”

그렇게 말하는 노마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형을 설득해 보려던 니콜라스는 그대로 입을 다물고 말았다. 오필리아가 얼마 전 제게 보낸 서신에도 저 비슷한 말이 있었다.

“실은 무척 불안해. 나는 이제 그녀가 없으면 안 되는데……. 그녀는 너무, 용감하시거든.”

그렇다고 정말 어디 숨겨 놓을 수도 없고. 노마는 종종 치미는 충동을 애써 삼키며 중얼거렸다.

니콜라스는 노마를 언제나 여유롭고 산뜻한 사람으로 기억했다. 그런 형이 어둑히 가라앉은 눈을 하고 초조하게 말끝을 흐리다니. 생소한 모습에 니콜라스의 미간이 아까보다 더욱 찌푸려졌다.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두 사람이, 아이사 맥포이 덕에 숨을 쉬고 있다는 사실을 그만 인정해야 될 듯했다.

“이번엔 어떤 일이 있어도 봉인이 풀려선 안 돼. 봉인이 풀리면 그것은 곧장 아이사를 찾아갈 거야. 내가 아니라, 아이사에게.”

디아시에서 마지막으로 봤던 오필리아는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같은 말을 되뇌었다. 그녀가 가끔 보내오는 서신에도 절대 봉인이 풀려서는 안 된다는 당부가 언제나 빠지지 않았다.

니콜라스는 그녀에게 어째서 닉스가 봉인에서 깨어나면 이번에도 맥포이 가주부터 찾아갈 것이라고 확신하는지 굳이 묻지 않았다. 어렴풋이 그 이유를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탄타로스에 남아 있던 두 개의 성력. 하나는 노마의 흔적이 분명했고 다른 하나의 정체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 성력이 특별하다는 것 하나는 확실했다.

오필리아는 11년 전, 맥포이 가주를 구하다 성력을 잃었다고 했다. 자신의 추측이 맞는다면. 오필리아의 성력이 영영 사라진 게 아니라 맥포이 가주에게 있는 거라면.

그녀의 우려대로 닉스는 이번에도 깨어나자마자 아이사 맥포이에게 달려갈 것이다. 그 눈앞에 오필리아가 서 있다 해도 말이다. 그것이 집착하는 것은 오필리아의 몸뚱이가 아니라 그녀의 힘이니.

니콜라스는 머리가 더욱 복잡해지는 것을 느꼈다.

갑자기 봉인이 불안정해져 소란이 일어났던 것이 바로 어제였다. 혹시라도 닉스의 봉인이 풀려 맥포이 가주가 잘못된다면? 막아 볼 새 없이 두 사람이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미쳤다.

어찔한 기분에 니콜라스가 다시 제 형의 표정을 살폈다. 서늘하게 굳은 낯과, 뾰족한 수 없이 대뜸 그것을 죽여야겠다며 초조함을 드러내는 것을 보면 노마도 이 사실을 알고 있는 듯했다.

‘무슨 일이 생겨도 닉스가 바그다트를 벗어나게 해선 안 되겠다.’

니콜라스가 복잡한 상념을 떨치고 마음을 다잡을 때였다.

“맥포이 경!”

고위 신관 하나가 노마를 찾아왔다. 기사들에게 붙들린 채 다급하게 노마를 부르는 여자를 보고 니콜라스의 눈매가 가느다래졌다.

노마를 찾는 신관은 헤이롯이 부리는 위고의 고위 신관이었다.

* * *

이디오를 납치하듯이 보조 마차에 실은 후, 나는 패퇴하는 병사처럼 정신없이 사원을 빠져나왔다. 검은 마차가 맥포이 성을 향해 질척한 흙길을 미친 듯이 내달렸다.

그러는 동안 마차 안은 죽음 같은 침묵이 흘렀다. 에리카가 내게 불안한 시선을 몇 번 던지는 것이 느껴졌으나 나는 눈꺼풀을 올리지 않았다. 당장 머리가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만 같았다.

노마의 손을 잡고 티베이 저택을 빠져나온 게 벌써 반년 전이던가. 그동안 안온한 일상에 흠뻑 젖어 있어 오랜만의 위협이 더 충격적으로 느껴진 것뿐, 잊고 있던 현실에 새삼 놀랐을 뿐이다.

‘알고 있었잖아. 이렇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오필리아와 밤>을 거스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안 해 본 것도 아닌데, 새삼스럽게 겁을 먹다니.

마침내 긴 생각 정리를 끝내곤 느리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가주님…….”

오매불망 나를 기다리고 있던 연녹색 눈동자와 마주쳤다. 그 순간 마음 정한 것이 무색하게, 에리카를 붙잡고 비명을 지르며 울고 싶었다. 나 이제 어떻게 하냐고.

“……성에 돌아가자마자 건국제 준비를 멈춰. 빠져나갈 수 있는 자들은 최대한 영지 바깥으로. 어려운 자들은 신전과 사원으로 보내라. 아치 맥포이와 최대한 많은 영지민이 사는 것이 최우선이야.”

하지만 나는 이럴 때일수록 침착한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뭘 어떻게 하긴. 맥포이 가주는 최대한 빠르게 정신을 차리고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했다. 어딘가 익숙한 지침에 에리카의 미간에 서서히 구김이 갔다.

“그 말씀은.”

“‘그것’이 올 거야. 나를 찾아서.”

“……좋지 못한 꿈을 꾸셔서 불안하신 거라면 잠시 심호흡을 해 보십시오.”

“그러게. 이게 꿈이라면 기분이 이렇게 엿같지 않았을 텐데.”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한 번만 더 말하지. 닉스는 탄타로스에서 하지 못한 일을 마무리 짓기 위해 나를 찾아올 거다.”

아쉽지만 그렇게 됐어, 라고 말하는 것처럼 무미건조한 목소리에 에리카가 혼란스러워했다. 그녀는 내 말을 더더욱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일단, 진정하세요.”

“나는 지금 어느 때보다 침착하다, 에리카. 자네야말로 진정해.”

“그것이 어떻게 가주님을 찾아옵니까?”

“내가 맥포이를 벗어나는 건 안 돼.”

“대신관과 디아시 가주가 매일 봉인을 하지 않습니까. 그럴 일 없습니다. 불길한 소리 마세요.”

에리카가 질색하며 창밖으로 팩 고개를 돌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침착하게 할 말을 이었다.

“닉스의 수법을 알지. 그것은 오필리아를 찾기 위해 나를 납치했었다. 내가 숨으면 나를 찾기 위해 무슨 짓을 할지 뻔해.”

애써 창밖을 보던 에리카가 일그러진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지금이라도 농담이라고 말해 주길 바라는 듯했지만, 난 그녀가 바라는 답을 해 줄 수 없었다.

“내가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맥포이를 뒤엎을 거다.”

맥포이 가주는 도망칠 수 없었다. 도망쳐선 안 됐다. 에리카의 얼굴이 완전히 일그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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