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
로덴시는 욕심이 많았다. 빌리넌트 로덴시는 여러 방면에 재능이 없었지만, 제 몫이 조각조각 나는 것에 한해선 누구보다 기민했다.
그가 지금까지 군소리하지 않고 어머니를 따른 이유는 그녀가 자신을 어려움 없이 황좌에 앉힐 거라는 확신 하나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어머니와 권력을 나누겠다는 건 아니었다.
황태자라는 지위를 맛본 뒤 빌리넌트는 로덴시답게 늘 절대적인 힘을 원했다. 아들과 자신을 한 몸으로 여기면서, 특별히 자신이 머리라고 생각하는 아드리네와 상충된 꿈이었다.
독단적으로 맥포이 사람을 건든 것은 단순한 치기가 아니었다. 그 나름대로 이 기회에 맥포이를 견제할 정보와 세력을 모아 독자적인 힘을 키우기 위한 시도였다.
그저 빌리넌트에게 좋은 전략을 생각해 낼 머리가 부족했고, 그러한 머리를 대신해 줄 책략가가 없어 맥없이 실패로 끝났을 뿐.
“메르케시가 네놈보다 낫겠다! 오, 메헤라시여. 어째서 칼리페시를 데려가셨단 말입니까. 그 애가 죽지 않았다면―.”
빌리넌트가 이를 악물었다. 일은 좀처럼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고 아버지, 황제가 제게 역정을 냈던 것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한 번도 누이라고 생각해 본 적 없는 미친 여자에게 황위를 넘겨준다며 저를 겁박하는 아버지.
모르고트를 등에 업고 제 위에 군림할 생각을 하는 어머니.
한참 전에 죽었음에도 제게 평생 열등감을 안겨 주는 칼리페시와 저를 등신 취급하는 귀족들.
모든 행동을 통제하려 드는 밥버러지 같은 바그다트의 신관들까지.
빌리넌트는 인생 최고의 굴욕감을 맛보고 있었다.
그런 이유들이 모여 오늘의 화풀이 대상으로 그의 어머니가 걸렸을 뿐이다. 하지만 아드리네의 입장에선 아들의 분노가 갑작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녀는 최선을 다해 아들의 편의를 봐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황태자, 빌리넌트. 내 아들.”
아드리네는 눈앞이 하얗게 타는 분노를 애써 누른 채 일단 다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보석처럼 빛나는 아름다운 귀부인의 눈엔 이미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어째서 그런 생각을……. 모르고트는 조건 없이 황태자의 힘이 되어 줄 유일한―.”
“저는 천치가 아닙니다!”
하지만 빌리넌트에게 아드리네의 달콤한 세뇌는 더 이상 통하지 않았다. 빌리넌트가 자신이 앉았던 의자를 집어 던지며 소리쳤다. 아들의 횡포에 아드리네의 입꼬리가 결국 파들파들 떨리기 시작했다.
“저를 먼저 찾지 마십시오.”
빌리넌트가 아드리네에게 삿대질하며 경고했다. 창백하게 질린 아드리네가 이마를 짚고 옆으로 기울어졌다. 아드리네의 시녀가 ‘폐하!’ 하고 비명을 지르며 그녀를 부축했다.
하지만 빌리넌트는 제게 지극정성을 들인 가녀린 어머니가 눈이 뒤집혀 쓰러지건 말건 시종들을 밀치고 식당 홀을 빠져나갔다. 빌리넌트를 감시하는 수많은 하급 신관과 기사들이 황후의 눈치를 한번 보고 그 뒤를 줄줄이 따라 나가는 장면이 퍽 우스웠다.
시녀의 품에 안겨 늘어져 있던 아드리네의 몸이 분노와 수치로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혼절 연기는 그녀의 특기였다. 빌리넌트는 성정이 잔악해도 어머니라면 끔찍이 생각했으니 그녀 나름대로 비장의 수를 둔 셈이었다.
“…….”
식당 홀에 무서운 정적이 흘렀다. 연기를 집어치운 아드리네가 핏발 선 눈으로 아들이 빠져나간 문을 노려봤다.
언제까지 아들을 제 입맛대로 주무를 수 있다고 여겼던 것은 아드리네의 교만이자 패착이었다. 그녀의 원대한 계획은 옛적부터 흔들리고 있었다.
패륜을 저지른 빌리넌트라고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감히 황권을 나눠 가지려는 발칙한 야망을 가지고 있었지만 유일하게 사랑하는 피붙이였다.
빌리넌트는 도망치듯 식당 홀을 빠져나와 자신의 침실로 향했다. 그러나 단출하고 협소한 방 안의 풍경을 보자마자 새삼스레 뜨거운 분노가 치솟았다.
그는 침실을 한차례 뒤집은 뒤에 시종 두 명을 잘근잘근 밟고 나서야 겨우 화를 누그러뜨렸다. 제 허락 없이는 신음을 내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는 약자를 일방적으로 깔아뭉갤 때, 그는 비로소 자신이 여전히 아무나 닿을 수 없는 고귀한 신분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머리끝까지 치솟았던 분노가 어느 정도 해소되자 약에 취한 듯 몽롱한 기분이 들었다. 여체에 대한 생각이 간절했다. 하지만 성년식을 앞두고 가장 엄격하게 통제하는 욕구가 바로 그 부분이었다.
“제기랄. 아직도 성년식까지 3일이나 남았다니.”
낮게 욕설을 뇌까린 빌리넌트가 침대에 걸터앉아 마른세수를 했다. 그는 제국에서 가장 고귀한 존재로 태어난 자신이 어째서 이런 굴욕감을 느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칼리페시만큼 대단한 성력이 있었다면, 이런 수모를 겪지 않았을 텐데.’
제국엔 여신의 축복을 받았다고 알려진 두 가문이 있다. 하나는 디아시, 다른 하나가 로덴시였다.
로덴시가 황가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타고난 성력 덕분이었다. 그 사실을 증명하듯, 그들은 제국이 세워진 몇백 년 동안 압도적인 성력을 바탕으로 군림했다.
그러나 무슨 일인지 무려 두 세대에 걸쳐 강력한 성력을 지닌 로덴시가 나오지 않았다. 만능이라 여겨지는 여신의 힘은 점점 사라지는 것처럼 보였고 자연히 황권은 갈수록 약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황제는 그나마 강력한 성력을 타고난 칼리페시를 특별히 여길 수밖에 없었다.
불행히 빌리넌트는 평범했다. 비참함을 느낀 그가 침대에 드러누운 순간이었다. ‘윽!’ 하고 그의 입에서 신경질적인 신음이 튀어나왔다. 대차게 인상을 쓴 그가 감히 자신의 휴식을 방해한 것의 정체를 확인했다.
“……이건 또 뭐야?”
처음 보는 나무 상자였다. 딱 두꺼운 법전 하나 들어갈 정도 크기의 상자는 낡아 빠지긴 했어도 장인이 만든 듯 견고해 보였다. 망할 기도 시간에 가져가야 할 새로운 경전, 뭐 그런 게 들어 있나 싶었다.
바깥의 신관들 들으라는 듯, 빌리넌트는 상자를 높이 들어 가차 없이 바닥에 내던졌다. 와작, 소리와 동시에 낡은 상자가 쉽게 부서지고 그의 예상대로 두꺼운 책이 나무 조각과 함께 바닥을 나뒹굴었다.
빌리넌트의 눈초리가 뾰족해졌다. 상자 안의 책은, 그가 지금껏 접한 경전과는 조금 달라 보였다. 가죽으로 만든 것 같은 책 겉면은 수천 년은 된 듯했다. 제국의 역사보다 오래되어 보이는 책을 향해 빌리넌트가 홀린 것처럼 손을 뻗었다.
“……!”
첫 줄을 읽자마자 황급히 책을 덮었다. 혹시나 누가 엿볼세라 미친 듯이 좌우를 살폈다. 이런 내용은……. 소지한 것만으로, 읽는 것만으로 이단 죄였다.
심장이 빠르게 뛰는 걸 느끼며, 빌리넌트는 자신이 잘못 읽은 게 아닐까 하고 다시 한번 책장을 펼쳐 첫 줄을 읽었다.
메헤라와 알포는 본래 같은 신으로 메헤라는 인간에게 쉽게 힘을 나누어 주지 않으나, 알포는 나누어 주었다. 인간들이 알포에게 의지하자 메헤라가 알포를 가장 깊숙한 곳에 가두었다……
잘못 읽은 게 아니었다.
“호, 혹. 시험인가?”
성년식을 앞둔 자신을 시험하는 것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아니고서야 이런 내용의 책이 보란 듯이 황태자의 침상에 놓여 있을 리가 없지 않나. 정체 모를 책에 대한 두려움으로 호흡이 가빠지기 시작했다.
메헤라와 알포는 본래 같은 신이고, 알포는 그 힘을 나누어 준다니…….
신이 나눠 준 힘은 태어난 순간 정해지는 것인데. 메헤라는 힘을 나눠 주지 않고 알포는 나누어 준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하지만 불행히 빌리넌트의 두려움엔 아주, 아주 약간의 기대감이 섞여 있었다. 심호흡을 한 빌리넌트가 다시 한번 주변을 살핀 후 조심스럽게 책장을 넘겼다.
* * *
아드리네는 고위 신관의 간호를 받으며 침대에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놀란 가슴을 좀처럼 진정하기 어려웠다.
놀라기만 했을까. 그녀는 어느 때보다 깊이 분노했다. 때아닌 아들의 반항에 기품은커녕 평정을 유지하는 것도 잊은 지 오래였다.
‘내가 저를 어떻게 키웠는데!’
늙은 황제의 두 번째 황후로 들어간 모르고트의 아가씨는 야심가였다. 하지만 황성엔 칼리페시라는 어마어마한 미친 자가 버티고 있었으니, 그 기에 눌려 그녀는 뜻을 펼치길 포기했었다.
그러나 여신은 아드리네의 편이었던 모양이다. 그녀에게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그녀의 천적, 칼리페시가 죽은 것이다.
수순처럼 빌리넌트가 황태자가 되었다. 아드리네는 접어 두었던 야망을 펼치기로 했다. 아들을 적당히 천치처럼 키울 것. 황위를 두고 다툴 경쟁자가 없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제게 전적으로 의지하는 아들이 황제가 되기만 하면 진짜 권력의 정점은 그녀가 될 것이었다.
아드리네는 오직 그것을 목표로 납작 엎드린 채 숨을 골랐다. 하지만 하나뿐인 아들은 그녀가 모르는 새 자아만 비대해져 있었다.
통제권을 상실한 아드리네는 이런 때 빌리넌트를 감시하는 눈이 늘어난 것이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아들을 살살 달래 다시 제 품에 들어오게 할 방법을 찾기 위해 열심히 머리를 굴릴 때였다.
아드리네의 시녀가 그녀의 머리맡에 소리 없이 다가왔다. 보고할 것이 있는 모양이었다.
“말하렴.”
“황후 폐하. 맥포이 가주 부군이 바그다트에 도착했습니다.”
아드리네의 허락이 떨어지자 시녀가 허릴 숙여 그녀에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아드리네가 신경질적으로 눈썹을 치켜올리며 눈을 떴다. 맥포이 가주 부군이라면, ‘노마 디아시’를 말하는 거였다.
“아…….”
그녀의 입에서 절로 앓는 소리가 나왔다. 아드리네가 질끈 눈을 감자 그 옆에서 부채질을 하던 하녀가 바짝 긴장했다.
사라졌다고, 죽었다고 믿었던 닉스가 멀쩡히 돌아오질 않나. 입맛대로 키운 아들이 맹랑한 마음을 품고 제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하질 않나. 칼리페시의 약혼자였던 노마 디아시가 다시 눈앞에 나타나 맥포이와 결혼하질 않나.
아드리네는 오랜만에 신경이 타들어 가는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신탁을 조작해 주십시오. 황제 폐하.”
아드리네는 노마 디아시와 반드시 결혼해야겠다며 신탁을 조작해 달라고 청하던 칼리페시의 목소리를 떠올리곤 저도 모르게 치를 떨었다.
욕심에 가득 차 오기를 부리던 그 모습과 마침내 디아시 가문까지 등에 업은 것을 본 순간. 그녀는 칼리페시에게 맞설 의욕을 모조리 상실했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것이 칼리페시에겐 몰락의 시초였고 아드리네에겐 재기의 단초가 되었다.
칼리페시는 노마 디아시의 날개를 꺾어 옆에 두는 정도로 만족하지 못했다. 아름다운 그녀의 약혼자는 딱히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그만 마음을 송두리째 뺏긴 탓이었다. 오만한 칼리페시는 그의 마음까지 원했다.
불행히도 칼리페시의 삐뚤어진 사랑은 그녀의 약혼자에게 닿지 못했다. 그 약혼자는 소유욕의 형태를 띤 그녀의 마음이 사랑이라곤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그는 오히려 자신의 오래된 친구가 칼리페시를 마음에 둔 것을 알고 친구의 사랑을 도와주려 했다.
칼리페시는 무정한 약혼자에게 분노했다. 지독한 굴욕을 느낀 그녀가 저주에 손을 댄 것이 그즈음이었다.
‘칼리페시의 죽음은 그녀의 과욕이 부른 것이지.’
아드리네는 다시 한번 마음속으로 되뇌며 가슴에 피어오르는 불안감을 털어 냈다. 어느새 가면 같은 미소를 지은 그녀가 말했다.
“기다리라 전하렴. 치장을 다시 해야겠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