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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데드 엔딩 후에-123화 (123/139)

123.

황도로 떠났던 헤이롯이 바그다트에 돌아왔다. 떠났을 때보다 다섯 배는 많은 인원과 함께 돌아온 그는 몹시 피로해 보였다. 그의 뒤엔 이번 성년식의 주인공 빌리넌트 황태자와 그의 어머니 아드리네 황후가 있었다.

황가의 성년식, 특히 황태자의 성년식이란 특별했다. 대신관과 함께 황성을 떠난 것부터 이미 그 기나긴 성년식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었다.

황태자는 바그다트에서 보름간 몸과 정신을 깨끗이 하고 성년식을 치를 예정이다. 이후 그를 축하하기 위해 일주일 동안 축제가 벌어지고, 이는 곧바로 건국제와 이어진다. 근 몇 년을 통틀어 가장 긴 축제 기간이 돌아온 것이다.

고귀한 신분의 등장에 신관을 비롯해 바그다트를 지키는 이들은 바짝 긴장한 채 열을 맞춰 섰다. 이들 중에 빌리넌트의 성질머리와 그 어머니, 아드리네의 다중성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혹시나 꼬투리가 잡힐라 다들 숨까지 죽여 가며 깊게 머리를 조아렸다.

그러나 걱정과 다르게 두 사람은 얌전했다. 모자 역시 짧지 않은 여정에 지쳐 있었던 까닭이었다. 바그다트의 사람들은 빠르게 안도했다.

마찬가지로 깊숙이 머리를 조아리고 있던 클로이가 슬쩍 고개를 들고 곁눈질로 그들의 표정을 살폈다. 두 사람은 잔뜩 겁을 먹은 것처럼 보였다.

클로이는 헤이롯이 황성으로 떠나기 전에 중얼거렸던 말을 떠올렸다.

“그나마 로덴시를 괴롭힐 생각을 하니 발걸음이 떨어지는구나.”

헤이롯은 황태자의 성년식을 굉장히 귀찮아했지만, 콧대 높은 로덴시가 닉스의 존재 때문에 겁먹었을 걸 생각하면 즐거운 듯했다.

바그다트로 오는 내내 헤이롯이 어떤 말로 두 사람에게 겁을 줬는지는 몰라도 특히 황후의 얼굴이 볼만했다. 아드리네는 바그다트의 신전에 처음 방문한 게 아니었음에도 연신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그녀답지 않게 불안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클로이는 다음으로 두 사람을 따르는 기사와 시종들을 빠르게 훑어봤다. 언뜻 봐도 당초 계획했던 인원보다 배는 많아 보였다. 저 정도면 황태자가 일부러 사고를 치고 싶어도 못 칠 것 같았다.

‘맥포이 가주님의 뜻대로 별 탈 없이 성년식이 끝나겠구나.’

그녀는 그제야 긴장을 풀고 순순히 눈꺼풀을 내렸다.

그 뒤로 따분할 만큼 평화로우며 단조로운 나날이 시작됐다. 클로이는 곧, 다시 세 명씩 조를 짜 대신관을 따라 정해진 시간마다 닉스를 봉인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모든 것은 계획대로. 사소한 것 하나 통제에서 벗어나는 일이 없었다.

황태자의 성년식을 사흘 앞둔 어느 정오를 제외하면 말이다.

해가 지고 다시 뜰 때까지 닉스에게 성력을 들이부으면, ‘그것’은 보통 다음 의식이 돌아올 때까지 죽은 듯이 잠에 들어 있었다.

간혹 소름 끼치게 눈을 부릅뜨고 있는 날도 있었지만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했다. 가끔 정신력이 약한 자의 머릿속을 파고들어 말을 걸려고 하긴 해도, 그 외엔 얌전했단 말이다.

“오필리아―!”

그러나 성년식이 코앞에 다가온 어느 날, 해가 중천에 걸릴 무렵. 동굴 깊숙한 곳에서 땅이 무너지는 듯한 비명이 울려 퍼지며 고요를 깼다.

순번대로 보초를 서고 있던 클로이는 너무 놀란 나머지 저도 모르게 주춤주춤 뒷걸음을 쳤다. 언어를 잊은 듯 짐승처럼 울음소리만 내는 게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마지막 발악을 하듯이, 사람의 말을 부르짖고 있었다.

어디서 그런 힘이 솟았는지 모르겠으나 봉인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클로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뛰어난 성력을 가진 고위 신관이었음에도 한순간 형언 불가한 공포에 빠져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도둑년! 돌려줘, 내 오필리아를 돌려줘! 나의 그녀를 내놔! 그녀는 내 것이야, 그녀의 힘은 내 것이란 말이야……!”

처절하기까지 한 절규엔 누군가를 향한 맹렬한 분노와 살의가 넘쳤다.

‘오, 메헤라시여―. 저것은 재앙이다.’

클로이는 속으로 여신을 찾으며 찢어지는 비명이 들려오는 어둠 속을 넋 놓고 바라봤다. 극심한 공포심에 산소가 급격히 줄어드는 듯했다.

그녀는 오래 버티지 못했다. 식은땀이 전신을 덮었다. 뒤죽박죽이 된 정신이 희미해졌다. 마침내 돌바닥에 주저앉은 채 졸도하기 직전이었다.

하얀 형체가 클로이의 옆을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그와 동시에 클로이는 머릿속이 상쾌해지고 숨통이 트이는 감각을 느꼈다.

“허억……!”

돌바닥에 이마를 댄 그녀는 생리적인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다급하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는 중에도 여태 비명이 들려오는 동굴 안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곧 눈부신 빛이 흐릿해진 시야를 덮었다. 대신관, 헤이롯의 성력이었다.

끔찍한 비명이 빠르게 잦아들고 클로이는 그제야 정신을 다잡을 수 있었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동굴 안쪽까지 기어갔다. 그러곤 덜덜 떨리는 몸을 억지로 일으켜 헤이롯을 도와 죽을힘을 다해 자신의 성력을 퍼부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발작을 멈춘 닉스가 버석하게 갈라진 입술을 달싹였다.

“맥포이를, 죽여야 해.”

소리 없는 비명 같은 그것의 단말마에 클로이는 움찔 어깨를 떨었다.

“내, 오필리아…… 힘을…… 도둑질…….”

그 뒷말은 드문드문 끊겨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기 어려웠다. 그러나 저 입에서 맥포이가 나온 순간, 클로이는 새로운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맥포이를 죽여…….”

닉스가 마지막으로 입술을 움직였다. 이번엔 비교적 분명한 문장이었다. 목소리는 몹시 작았지만 맹렬한 살의, 혐오, 질투 따위가 질척하게 묻어나 한 번 들으면 죽어도 잊을 수 없을 정도로 끈끈했다.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당혹스러웠다. 봉인을 반쯤 깨고 한다는 소리가 맥포이를 죽이겠다는 것이라니.

문제는, 저 말을 클로이 혼자 들은 게 아니라는 점이었다. 클로이는 제 옆에서 묵묵히 닉스에게 성력을 퍼붓고 있던 헤이롯을 반사적으로 쳐다봤다.

다음 순간, 클로이는 두 번째로 당황하고 말았다. 찰나였지만 그녀는 헤이롯의 눈이 독사처럼 가늘어진 것을 목격했다.

‘방금, 무슨 생각을 하신 거지?’

헤이롯의 기묘한 반응에 클로이는 더는 봉인에 집중할 수 없었다.

황태자의 성년식을 앞두고 닉스의 봉인이 불안정해진 것은 좋지 않은 일이었다. 무엇보다 그녀가 알기로 귀찮음 많은 헤이롯은 예정에 없던 일을 처리하는 걸 몹시 싫어했다.

“……아하.”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그 헤이롯이, 싱긋 입꼬리를 올리곤 깨달음을 얻은 사람처럼 작게 감탄을 뱉다니.

클로이의 심장이 아까보다 더욱 불안하게 뛰기 시작했다. 그녀는 닉스가 맥포이 가주의 적이자 살아 있는 재앙이라는 것은 알지만, 맥포이 가주가 10년 전에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는 몰랐다.

‘느낌이 좋지 않다. 곧장 가주님께 서신을 보내야겠어.’

그녀로서는 닉스의 발악과 헤이롯의 뜬금없는 미소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클로이는, 본능적으로 무언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 * *

바그다트에서 빌리넌트에게 허용된 공간은 개인 침실과 기도실, 공용 식당과 욕탕. 단 네 곳이었다. 이미 여기서 빌리넌트의 쥐똥만 한 인내심은 바닥이 났으나 숭고한 통제는 거기서부터 시작이었다.

바그다트는 여신의 힘이 아직도 깃들어 있는 성스러운 영역이었다. 이 땅을 밟는 순간 메헤라의 말씀을 지켜야 하는 건 당연했는데, 대표적으로 물욕, 색욕, 식욕 등 모든 탐욕적인 행위를 금하는 것이 있었다.

제국의 황태자는 이러한 사실을 교육받았기에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머리로 아는 것과 몸소 실천하는 것은 전혀 다른 법. 뭐든 참아 본 적 없는 그는 좀처럼 바그다트의 생활에 적응할 수 없었다.

물론 빌리넌트가 아무리 개차반이라도 처음엔 엄숙한 바그다트의 분위기에 눌려 군소리를 하지 못했다. 닉스의 존재에 대해 여러 차례 주의를 받은 바, 막연하게나마 생명의 위협을 느낀 탓도 있었다.

하지만 그의 망나니 같은 성품은 멀리 가지 않았다. 지루한 일들의 반복,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 위협에 빌리넌트는 서서히 긴장을 풀었다. 그는 곧 바그다트의 생활에 크게 불만을 가졌다.

“아악!”

결국 빌리넌트가 바그다트에 입성한 지 일주일도 되지 않아 그의 공간에서 다시 사람의 비명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는 따분함과 답답함을 아랫사람 괴롭히는 것으로 풀었다. 통제가 완벽할수록 심술을 넘은 화풀이가 심해졌다.

빌리넌트가 하루에 한 명씩 사람을 잡기 시작하니, 말없이 아들이 저지른 패악을 수습하던 아드리네는 빠르게 한계에 도달했다. 성년식까지 최대한 빌리넌트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게 내버려 두려던 그녀는 결국 직접 나섰다.

“이 어미가 누누이 말했지만 성년식을 앞두고 아랫것들에게 자비와 관용을 베풀어야 할 것입니다, 황태자.”

특유의 나긋한 목소리가 아드리네와 빌리넌트가 마주 앉은 식사 테이블을 부드럽게 가로질렀다. 그녀는 아들을 어르고 달래듯, 눈썹을 아래로 늘어뜨려 자애로운 얼굴을 만드는 것을 잊지 않았다.

빌리넌트는 지금껏 제 어머니의 말을 따르지 않은 적이 없었다. 아드리네가 가장 뿌듯해하는 점이었다. 백이면 백, 아들은 이번에도 제 말을 듣고 적어도 오늘만큼은 조용히 넘어가려 노력할 것이다.

쨍그랑―.

그러나 아드리네의 기대와 다르게 식탁이 뒤집어지고 식기가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테이블이 넘어가고 소박한 음식이 담긴 접시들과 여타 식기가 오래된 대리석 바닥에 곤두박칠치는 장면은 코앞에서 보고도 믿기 어려웠다.

아름다운 에메랄드 빛깔 눈동자에 당혹감이 차올랐다.

“어머니까지 절 천치로 보니 이 지경이 아닙니까.”

빌리넌트가 그의 인생에서 가장 소박한 밥상을 뒤집어엎곤 제 어머니에게 음산한 목소리로 뇌까렸다.

눈 다음, 아드리네는 귀를 의심했다. 어째서? 부들부들 떨리는 아들의 목소리는 놀랍게도 적대적이었다. 아들은 자신을 탓하고 있었다.

“저는 곧 성년식을 치르는, 이 나라의 황태자입니다.”

“황태자―.”

아드리네가 겨우 입을 벌려 아들을 불러 보았으나 빌리넌트는 그녀의 말허리를 가볍게 잘랐다.

“예, 황후 폐하. 제게 어째서 한마디 의논도 없이 맥포이 계집을 건드렸냐고 물으셨지요.”

아드리네는 갑작스러운 화제에 숨을 죽였다. 빌리넌트와 황제가 언성을 높인 날, 그녀는 이마를 짚으며 한숨처럼 빌리넌트에게 도대체 왜 저 몰래 이런 짓을 벌었냐고 물었다. 그때 그는 그저 분한 얼굴을 하고 고집스레 입을 꾹 다물었었다.

“어머니와 모르고트가가 감히, 장차 황제가 될 이 나를, 치마폭에 감싸 멋대로 주무르려 한다는 것을 모르지 않습니다.”

“그게 무슨……!”

“어머니와 어머니의 가문이! 절 꼭두각시로 부리려고 하는 걸 제가 모를 줄 아셨냐는 말입니다.”

때아닌 반항기를 겪는 소년처럼 빌리넌트가 비틀린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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