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
‘어차피 돌아가 봤자 그도 없는걸.’
순식간에 시무룩한 마음이 들어 재단 위에 풀썩 엎드렸다. 엄청난 신성 모독이었지만 누구 볼 사람도 없으니 편히 드러누웠다. 규칙적인 빗소리와 어두운 사위 덕분인지 곧 여러 날 쌓인 졸음이 몰려왔다.
하지만 돌로 이루어진 재단은 영 불편했다. 편한 자세를 찾기 위해 몸을 뒤척이다 재단을 내려다보고 있는 조각상과 우연히 눈이 마주쳤다. 묘하게 생긴 조각상과 한동안 눈싸움을 한 끝에 홀린 듯이 입을 열었다.
“……처음엔 당신이 나를 싫어해서 맥포이에 이 지랄을 내는 게 아닐까 생각했는데.”
물론, 미쳤다고 조각상에게 시비를 건 것은 아니었다. 케케묵은 상념을 뱉어 낸 쪽에 가까웠다.
“요즘엔 그런 생각이야말로 자의식 과잉이었다는 생각이 들어.”
메헤라에게 특별한 것은 오직 오필리아뿐이고, 그 애를 제외한 모든 인간은 그저 개미 새끼 한 마리가 아닐까. 오히려 모든 건 메헤라가 맥포이나 나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기 때문에 생긴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 뒤로 1년이 다 되어 가도록 아무 일도 없는 걸 보면, 개미 한 마리 정도는 살려 둬도 문제가 없다는 말 아닌가?”
은근슬쩍 안일한 말을 뱉기 무섭게 쾅, 하고 번개가 내리쳤다. 기도실 구석에 작게 뚫려 있는 창으로 하얀빛이 번뜩였다. 빗줄기는 아까보다 맹렬하게 창문을 때리기 시작했다.
“……깜짝아. 오늘따라 별…….”
다시 한번, 나는 지극히 맨정신이었지만 마차에서부터 타이밍 좋게 이러니 언제나 대답하지 않던 여신이 반응을 한 것만 같아 가슴이 다 벌렁거렸다.
“내가 마음이 허한 게 맞나 봐.”
나는 놀란 마음에 조각상을 조금 더 노려보다, 이게 다 노마 디아시가 부족한 탓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조각상에게 말을 거는 감성적인 짓거리도 관뒀다.
얄팍한 유리창을 내려치는 빗줄기가 여전히 거셌다. 아무래도 비가 쉽게 그칠 것 같지 않아 가만히 눈을 감았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그러다 깜빡 잠이 들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주변이 고요했다. 그사이 비가 그친 것일까. 슬슬 눈꺼풀을 들어 올리려 했다.
“행복하니?”
별안간 어떤 목소리가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나를 위협하는 것들은 여전히 건재하고, 그것들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하기라도 하는 듯.
목소리는 굉장히 가까이서, 또는 굉장히 멀리서 들려오는 듯 기이했다. 기괴한 감각에 번쩍 눈을 떴다. 그러나 그 무엇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것도 없는 새하얀 공간에 혼자 떨어져 있는 듯했다.
‘분명 재단에 엎드려 졸고 있었는데. 납치라도 당했나? 하지만 문밖에는 도그만 경이 있었는걸.’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나는 주변을 살피며 신중하게 몸을 일으켰다.
‘행복하냐니…….’
저 괴상망측한 소리는 일전에 오필리아가 내게 물었던 말이었다. 또한 이 기묘한 목소리는 어쩐지 처음 들어 보는 게 아닌 것만 같았다. 그 사실을 깨닫자 심장이 쿵쾅 소리를 내며 불안하게 뛰기 시작했다.
“꿈인가?”
바짝 긴장한 채 연신 주변을 돌아보는데 뭔가가 손가락으로 등을 쿡 찌르듯 건드렸다. 기겁을 하며 뒤를 돌았다가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눈앞엔 생글생글 웃고 있는 오필리아가 서 있었다.
분명히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있었으나 풍기는 분위기는 서늘했다. 침실에서 마주쳤을 때와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무엇보다 나를 사람 취급 안 하는 오만한 시선, 아무런 감정이 남아 있지 않은 눈빛이. 저 여자는 오필리아가 아니라는 것을 말해 줬다.
그래, 눈앞의 저건 오필리아가 아니었다.
“넌, 또 뭐야. 오필리아를 어떻게 한 거야?”
내 말에 오필리아의 가죽을 뒤집어쓴 여자가 깔깔 웃어 대기 시작했다. 고막을 찢을 것처럼 날카롭고 커다란 소리였다. 나는 벼락을 맞은 듯 온몸이 울리는 충격을 못 이겨 앞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곧 이명이 시작됐다. 머리가 울리고 생리적인 눈물과 콧물, 헛구역질이 쏟아졌다.
“이게 마지막이야. 이걸로 ‘비틀기’는 전부 끝났어.”
웃음소리 하나로 나를 정신 못 차리게 한 여자가 드디어 웃음을 멈추더니 멋대로 떠들기 시작했다.
“자비는 여기까지란다. 이제부터 전부 너 하기 나름이야.”
비틀기라니. 무슨 자비를 베풀었다는 걸까. 자비를 말하는 저건 도대체 뭐지? 머리가 복잡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기억하렴. 일어날 일은, 반드시 일어난단다.”
오필리아의 탈을 쓴 것이 고집스러운 투로 말했다. 동시에 나는 목소리가 말하는 ‘일어날 일’이 아이사 맥포이, 나의 죽음이란 것을 직감했다.
아이사 맥포이는 절대로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말일까. 아이사 맥포이는 결국엔 닉스의 손에 죽어야 하는 걸까?
저 여자를 붙잡고 묻고 싶은 것이 산더미였으나 골이 울려 좀처럼 어떤 행동을 할 수가 없었다. 필사적으로 눈을 깜빡여 오필리아의 모습을 한 여자를 올려다보는 게 고작이었다.
여자는 부들부들 몸을 떨며 정신을 차리려고 애를 쓰는 나를 내려다봤다. 날 보는 시선에는 여전히 일말의 흥미도 없었다.
곧 나른하게 입꼬리를 올린 여자가 내게서 천천히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 모든 순간이 마치 눈알에 새겨지는 것처럼 느릿하게 느껴져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이야기는 그렇게 정해져 있거든.”
이야기. 오필리아를 원하는 닉스가 그녀를 찾아내기 위해 아이사 맥포이를 살해하는, 그놈의 이야기. 가혹하리만큼 단호한 목소리는 마치 사형 선고를 내리는 듯했다.
“아…….”
내가 탄식을 뱉기 무섭게 발밑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곧, 탄타로스에서 경험했던 것처럼 끝없이 몸이 추락하는 감각이 온몸을 덮쳤다.
이대로 떨어지면 죽음뿐이라는 공포가 뒤늦게 차올랐다. 어딘지 모를 아래로 떨어지는 와중에, 금빛으로 살랑살랑 흩어지는 기다란 머리칼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저건 오필리아가 아니었지만, 순간 그 애라는 착각이 들어 다급하게 손을 뻗었다.
탄타로스에서 <오필리아와 밤>이라는 괴상한 책을 떠올리지 못했다면, 나는 죽는 순간까지 오필리아에게 살려 달라고 애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넌 10년 전에 나를 떠났으니. 너는 10년 동안 내 앞에 나타나지 않았으니. 너는 내게 죽은 사람이니.
하지만 나는 이제 알지.
나는 네가 맥포이를 떠난 날에, 오래전에 너를 포기했지만. 너는 아직 나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을 이젠 알고 있다. 그래서 염치없게 도와 달라고, 살려 달라고 손을 뻗었다.
그래. 마치 어렸을 적, 내 기사가 되어 날 지키겠다던 너의 약속처럼, 위험할 땐 너를 부르라던 말처럼, 나를 구하라고.
그러나 나의 손끝은 그 애의 머리칼에 닿지 못했다. 이야기. 오필리아는 아이사 맥포이를 살리지 못한다는 그 망할 이야기처럼.
오필리아.
절박하게 그 애를 부른 순간, 온화한 빛이 눈앞을 가리고 그대로 눈이 먼 듯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모든 것이 저주처럼 느껴졌다. 지긋지긋했다.
* * *
기도실 안에서 아이사의 비명과 함께 문틈을 비집고 다량의 빛줄기가 뿜어져 나왔다.
“가주님!”
기도실 앞에서 대기하던 글렌이 기겁하며 기도실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부술 듯이 문을 열어젖히자 재단 앞에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아이사가 보였다. 글렌은 황급히 무릎을 꿇어 제 주군을 부축했다.
“가주님, 무슨 일이십니까.”
그가 부산하게 기도실을 살피며 물었다. 덜덜 몸을 떨던 아이사는 그제야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녀가 재단 위에서 온화하게 웃고 있는 조각상을 핏발 선 눈으로 노려봤다.
그때 글렌이 기도실에 남아 있는 미묘한 힘을 느꼈다. 기도실 문틈을 비집고 나왔던 따스한 빛은 신기루였던 것처럼 자취를 감췄으나, 그 기운이 어렴풋이 기도실 안에 남아 있었다. 정확히는 제 주군을 감싸고 있었다.
“……이게 대체.”
힘의 정체를 깨달은 글렌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오래전 오필리아의 성력을 경험한 적이 있다. 그 애의 힘은 너무나 따스하고 다정해서, 한 번 겪으면 좀처럼 잊을 수가 없었다.
글렌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오필리아의 성력이 제 주군을 감싸고 있는 것을 목격하고 든 감정은 다름 아닌 참담함이었다.
글렌은 아이사가 극비리에 자신의 몸 상태에 대해 이야기할 때 머리로 이해는 했지만 그 말을 실감할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아이사는 이렇게 심장이 뛰고 말을 하고 있지 않나. 맥포이에 돌아왔을 때 마주쳤던 형체 잃은 시신들과는 달랐다.
하지만 아이사에게 머무는 오필리아의 성력을 확인한 순간 글렌은 그날, 그가 사랑한 모든 것이 죽은 날, 아이사 역시 한 차례 목숨을 잃었다는 것을 실감하고 말았다. 주군의 결혼 이후 잠시 잊고 있던 불안감이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작은 소란에 뒤늦게 기도실로 달려온 에리카가 숨을 죽였다. 창백하게 질린 두 사람의 모습은 마치 습격을 받기라도 한 것 같았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일이 좋지 않게 돌아가는 것을 느끼곤 저도 모르게 손바닥으로 입을 가렸다.
“가자.”
그때 아이사가 말했다. 글렌은 눈물을 터뜨리지 않기 위해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그의 주군의 눈빛은 어느 때보다 흉흉했으나, 목소리는 그가 들은 것 중 가장 지쳐 있었다.
“성으로 돌아가자.”
재단을 짚은 작은 손과 부러 꼿꼿하게 편 어깨가 떨리는 것, 희다 못해 창백하게 질린 아이사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던 글렌은 그만 대답하는 것을 잊고 말았다.
아이사를 부축해 기도실을 나가며 그는 문득 기도실 구석 높은 곳에 자리한 창문을 바라봤다. 어느새 비가 개어 있었다. 언제 비가 내렸냐는 듯, 거짓말처럼 하늘이 맑았다.
* * *
ㅎㅂㄹㄱ.공금
오필리아와 잭은 몇 시간 째 쉬지 않고 깊은 숲속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일부러 길이 없는 곳을 택한 까닭이었다.
마땅히 쉴 곳은 당연히 없었다. 그럼에도 10년 넘게 숨어 다닌 덕분에 모든 게 익숙했다. 그들은 드디어 험준한 세리야 산맥의 북서쪽 끄트머리에서 벗어나 길다운 길을 밟기 직전이었다.
잭은 마음이 가벼웠다. 오필리아에게서 ‘앞으로 한 곳만 더 처리하면 얌전히 디아시 본성으로 돌아가겠다’라는 약속을 받아 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경계를 놓치지 않았다. 오필리아는 가만히 두면 어디로 튈지 몰랐으니까. 잭은 그녀가 어째 아까부터 조용한 것이 괜히 찝찝해 뒤를 돌아봤다.
역시나. 오필리아와 거리가 벌어져 있었다. 멍하니 하늘을 쳐다보고 서 있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고 잭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오필리아, 뭘 보고 있는 거야. 멈춰 서면 늦어진다고. 어서 처리하고 집에 돌아가야지.”
‘집’이라는 말에 하늘을 바라보던 오필리아가 움찔했다. 디아시가 그녀의 집이 된 세월이 맥포이가 집이었던 기간보다 길었지만, 새삼스럽게 놀라고 말았다. 최근 맥포이를 너무 많이 생각한 탓이었다.
“설마 돌아가겠다는 약속을 어길 생각은 아니지? 지금 은근슬쩍 시간 끄는 거야?”
10년 넘게 제 주군과 오필리아에게 다양한 방법으로 뒤통수를 맞은 전적이 있는 그가 불안한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아니야, 그냥.”
“뭐라고?”
그제야 잭을 돌아본 오필리아가 혼잣말처럼 대답했다. 그녀의 말을 못 알아들은 잭이 큰소리로 되물었다. 텅 빈 숲에 그의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누가 날 부른 것 같아서.”
오필리아는 여전히 하늘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중얼거렸다. 그녀가 꼭 귀신을 보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자 잭의 얼굴이 서서히 일그러졌다.
“……넌 나 좀 그만 놀려. 난 이제 결혼도 했고, 곧 아이 아빠야.”
잭의 울적한 목소리에 오필리아가 정신을 차렸다. 그와 알고 지낸 지 10년. 잭은 오필리아가 그동안 알고 지낸 사람 중, 가장 변화가 많은 인물이기도 했다.
“아냐, 잭. 놀린 게 아니야! 정말 누가 부른 것 같대도.”
맹세코 잭이 귀신 따위를 무서워한다는 것을 놀릴 의도가 아니었다. 오필리아가 결백하다는 듯이 두 손을 들어 올리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됐어. 빨리 오기나 하라고.”
그러나 잭은 더 이상 속지 않겠다는 듯, 팩 뒤를 돌아 다시 앞장서기 시작했다.
‘이런, 삐졌네.’
오필리아가 벌어진 거리를 좁히기 위해 걸음을 서둘렀다. 그러면서 힐끗, 다시 한번 하늘을 쳐다봤다. 구름 한 점 없는 새파란 하늘과 울창한 나뭇잎이 일제히 흔들리는 것이 보일 뿐이었다. 솨아아― 평화로운 소리만이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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