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의 데드 엔딩 후에-121화 (121/139)

121.

사원으로 향하는 검은 마차가 덜컹― 요란하게 흙탕물을 튀겼다. 마차 차창까지 튀기는 질퍽한 물방울에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본격적인 우기가 시작된 지 보름이 지났다. 슬슬 그 기세가 잦아든 틈을 노렸는데도, 운 나쁘게 유독 날이 좋지 않았다. 맥포이는 정말 여신과 연이 없다는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슬부슬. 멈추지 않고 떨어지는 빗방울을 바라보다 가만 눈을 감았다. 최근 다시 숙면을 취하지 못하는 나날이 시작된 탓에 피로가 상당한 까닭이다. 어제는 오랜만에 악몽을 꾸기까지 했다.

덜커덩. 다시 한번 마차가 크게 흔들렸다. 특별히 신경 써 만든 나의 마차가 이렇게 흔들리는 걸 보면 며칠간 쏟아진 장대비에 길이 이곳저곳 팬 모양이다.

“오늘은 유독 가기 싫구나.”

“천상계 아름다움을 가지신 분과 결혼하셨다고 한들 그분이 진짜 신은 아니니, 신실한 시늉은 계속하셔야지요.”

나름 잘 참고 있었는데 에리카가 그리움에 불을 지폈다.

“지금쯤이면 바그다트에 도착했겠네.”

“예정대로면, 도착하셨겠군요.”

“……이럴 줄 알았으면 초상화부터 완성할 것을.”

나도 모르게 통탄스러운 혼잣말이 튀어 나갔다. 유능한 나의 보좌관은 주군의 헛소리를 못 들은 척 슬그머니 시선을 돌려 주었다.

노마 디아시와 떨어져 있는 시간은 상상했던 것보다 괴로웠다. 온종일 옆에서 따스한 빛을 쏘아 대던 별 가루 인간이 사라지니, 햇빛을 못 본 식물이 바로 이런 기분이지 않을까 싶었다.

나는 양분을 섭취 못 한 것처럼 찬찬히 생기를 잃어 가고 있었다. 정신 차릴 새가 없던 달콤한 신혼 생활은 모조리 꿈인 양, 하루하루가 버석했다.

그리움을 노래한 낭만시가 시대를 막론하고 유행하는 이유를 이젠 알 것 같았다. 누군가 내게 작금의 심정을 적으라고 양피지를 던져 주면 족히 열 두루마리는 채울 수 있을 듯했다. 꽤 긴 시간 그에 대한 마음을 인정하지 않고 버틴 것이 용할 지경이었다.

무자비한 별 가루 같으니라고. 도대체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람?

에리카가 딱한 눈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잠시 눈이라도 붙이시죠.”

“됐다. 이렇게 흔들리는데 잠이 오겠나. 그보다 참―.”

“말씀하십시오.”

“그 애는 찾았나? 소식이 올 때가 된 것 같은데.”

내가 새신랑에게 정신이 팔린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결코 일을 게을리하지는 않았다. 불시에 질문이 떨어지자 에리카의 얼굴에 잠시 난감한 기색이 스쳤다.

“아직입니다. 다만 그녀가 향하는 목적지를 세 곳으로 줄였으니 곧 접촉할 수 있을 겁니다.”

“역시 찾기 쉽지 않군.”

“그래도 10년 동안 뒤진 것보다 성과가 좋습니다. 순조로운 게 어색할 정도로요.”

에리카의 말에 픽 헛웃음이 나왔다. 아이사 맥포이는 오필리아를 찾을 수 없도록 정해졌기 때문인지, 그 애가 정말 잘 숨어 다녔던 건지. 시간이 지날수록 탄타로스에서 떠오른 기억들이 희미해져 뭐라 단언하면 좋을지 나로서도 알 수 없었다.

“가주님.”

그때 에리카가 조심스럽게 나를 불렀다.

“그녀를 다시 찾는 이유를 정말 말씀해 주시지 않을 겁니까?”

“그게 무슨 소린가? 분명 말했지 않나. 그 애 성력을 이용할 수 있나 방법을 찾아볼까 한다고.”

에리카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녀의 눈은 마치 ‘그게 다가 아니잖아요’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 눈빛에 내 눈썹이 삐딱하게 올라갔다.

“뭐야. 내가 맥포이에 오필리아를 들일까 걱정되나?”

에리카를 비롯해 살아남은 서부인은 오필리아에 대해 각기 다른 감정을 느낀다. 공통적인 감정이 있다면 원망이었다. 그 애 탓이 아니라는 사실을 머리로 알아도 ‘그 애만 없었으면’이란 생각이 드는 건 평범한 인간의 본능, 나약함 같은 것이었다.

다만 그 강도는 사람마다 천차만별이었다. 누군가는 닉스만큼 증오했고 누군가는 딱 에리카만큼 탐탁지 않아 했다. 맥포이 가주는 맥포이가 가진 모든 아픔을 이해해야 했다. 이 자리엔 그런 책임이 있었다.

에리카는 잠시 당황한 듯 눈을 몇 번 깜빡였다. 그러곤 이내 올곧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니요. 맥포이 가주는 그러지 않을 겁니다.”

“그래. 맥포이 가주는 그러지 못하지.”

“……네.”

“자네가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건 또 처음이군. 내가 최근에 그렇게 해이해 보였나? 걱정 마. 자네 주인은 제 손으로 서부에 분란을 만들 생각이 전혀 없으니.”

“용서하십시오. 감히 그녀의 처우에 대해 여쭐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저, 자세히 말씀해 주시지 않는 걸로 보아 위험한 생각을 하시는 게 아닌가 싶었어요.”

에리카는 언제나 날카로웠으며 역시 뭐 하나 그냥 넘어가는 일이 없었다. 대쪽 같은 그녀의 성품을 아꼈지만 속으로 몰래 혀를 찼다. 내 반응에 에리카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역시. 그녀를 불러다 뭘 하실 생각인지 모르나, 가주님께 조금이라도 위험한 일은 절대 안 됩니다. 여차하면 바깥에 있는 도그만 경에게 불어 버릴 거예요. 가주님께서 위험한 일을 하시려 한다고 말입니다.”

에리카가 마차 차창 밖을 눈짓하며 감히 나를 겁박했다. 유난스러운 글렌의 주군 사랑을 떠올린 내가 질색을 했다.

“하기만 해. 요즘 왜들 이렇게 귀찮게 구는지.”

“아하―. 도그만 경이 아니라 부군께 직통을 날리면 되겠군요.”

에리카의 도발에 미간이 막을 새 없이 좁아 들었다. 그거야말로 안 되는 소리다. 노마에게 위험한 일은 절대 하지 않겠다고 무려 약속을 했단 말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입을 싹 닫으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에리카가 귀찮게 굴 줄은 꿈에도 몰랐다.

“자네가 알다시피 난 내 목숨을 끔찍이 아껴. 뭐든 내 목숨이 조금이라도 위험한 일이면 시도조차 안 할 것이다.”

진심이었는데도 에리카는 여전히 탐탁지 않은 시선으로 나를 바라봤다.

에리카는 나를 훤히 꿰고 있었으나, 나에 대해 한 가지 대단히 착각하고 있는 부분이 있었다. 그녀는 내가 언젠가 숭고한 자기희생을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몇 번 부정해 봤지만 저 눈빛을 보아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확실했다.

“매번 말하지만 쓸데없는 걱정이야, 에리카.”

나는 그렇게 말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런 건 영웅적인 인물이나 하는 것이지 아이사 맥포이가 할 만한 일이 아니었다. 예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내 사전에는 정의, 대의, 희생 따윈 없다는 말씀이다.

심지어 나는 하루하루가 충만하고 내일이 기대되는 감각을 되찾았다. 어쩌면 스물여섯 살의 아이사 맥포이에겐 열다섯 살 때보다 소중한 게 많았다.

‘이걸 누가 다시 잃고 싶을까.’

살아남기 위해서 어느 때보다 이기적인 선택을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염치 타령하며 주저할 새가 없었다. 비련의 여주인공, 오필리아의 힘이 필요하다면 이용할 생각이 만만했다.

‘그러니 나는 이번에도 널…….’

오필리아에 대해 깊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 애를 외면하듯이 다시 차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마차가 크게 흔들리며 흙탕물이 촥― 차창에 튀었다.

“……하.”

우연이겠지만 꼭 못된 생각을 하지 말라고 경고라도 하는 것만 같아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날씨 한번 지저분하군. 왜, 유명한 극을 보면 꼭 이런 날 재수 없는 일이 생기고 그러잖나.”

“하아……. 가주님, 제발.”

나는 창밖을 노려보며 부러 너스레를 떨었고, 내 농담을 싫어하는 에리카는 질색하며 이마를 싸맸다.

* * *

“가주님!”

마차에서 내리자 먼저 사원에 도착해 있던 이디오가 벙긋 웃으며 나를 맞이했다.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퍽 반갑게 나를 맞는 이디오를 훑어봤다. 이쪽은 활력을 잃었는데 그는 그새 포동포동 살이 붙어 있었다.

“살기가 편한가 봐. 평안해 보이는군.”

“서부의 평안은 모두, 독실하신 맥포이 가주님 덕분 아니겠습니까.”

이디오는 부쩍 내게 친근하게 굴었다. 무슨 정신머리로 이러는지 모를 일이라 묘하게 기분이 나빴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최근 이디오뿐만 아니라 대부분 전보다 내게 편하게 말을 거는 것 같기도 했다. 위엄이 부족해졌나, 잠시 고민이 들었다.

그러고 나서야 사원이 눈에 들어왔다. 성혼식 이후 처음 방문하는 사원은, 옆에 노마가 없어서 그런지 몰라도 그때와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먹구름으로 뒤덮인 잿빛 하늘, 눅눅한 공기, 멈추지 않는 빗방울 덕분에 드나드는 사람도 평소보다 적었다.

‘후. 캄캄하고 휑한 것이 꼭 내 마음 같군.’

그런 생각을 하자 더더욱 사원 안쪽으로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때 눈치 없는 이디오가 시시덕거리며 나를 재촉했다.

“늘 사용하시던 기도실로 준비해 놓았습니다.”

이디오는 칭찬을 바라며 나를 바라봤지만, 나는 떨떠름한 얼굴로 말없이 그를 바라봤다. 그에게 공기를 읽는 능력이 없다는 건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나는 이디오의 안면에 짧은 한숨을 끼얹고 기도실로 향했다. 하나하나 지적하기엔 더 이상 입이 아팠으므로.

끼이익.

내가 퍼부은 돈은 어디로 새고 있는 걸까. 낡아 빠진 기도실 문짝에선 오늘도 녹슨 소리가 났다. 녹슨 것을 보고 있자니 어딜 봐도 반짝반짝 매끈매끈한 노마가 보고 싶었다.

……실은 핑계였다. 그냥 매초마다 그가 보고 싶었다.

탁―.

기도실은 겨우 내 마차만 했다. 좁은 내부에 맞춰 돌을 깎아 만든 협소한 재단이 한편에 자리했고, 그 위엔 성인 팔뚝만 한 조각상이 있었다. 아름다운 여인을 흉내 낸 조각상은 메헤라를 형상화한 것이었다.

별다른 것 없는 평범한 기도실의 모습이다. 이런 따분한 거 말고 다시 한번, 노마나 보고 싶었다.

사람들은 사원에 오면 보통 기도실에 들어가 신관 앞에서 몇 시간이고 여신께 기도를 드리지만, 신앙심이 부족한 맥포이 가주는 그 과정을 과감하게 생략했다.

정기적으로 사원을 찾는 목적은 단순히 남들 보라고, 겸사겸사 신전에 돈을 뿌리기 위함이었으니. 내가 사원에서 하는 일이라곤 말 그대로 얼굴도장을 찍듯 혼자 기도실에 들어가 몇 분 앉아 있다 나오는 게 다였다.

뚝, 뚝.

비 새는 소리는 곧 돈 새는 소리였으며, 이디오가 살이 찐 이유일 것이다.

나는 여신에게 그간의 신실함을 증명하는 대신 여신을 떠받드는 것들을 냉소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그 재미는 얼마 가지 못했다. 날씨 탓에 기도실에 유독 을씨년스러운 분위기가 흐르는 것도 한몫을 했다.

“이만 돌아가야겠다.”

결국 평소보다 이르게 기도실을 박차고 나왔다. 하지만, 이번에도 날씨가 따라 주지 않았다.

“빗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잠시 사원에 머무르셔야겠습니다.”

글렌이 안타까운 소식을 전했다. 내 만류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바깥에서 대기하던 그는 홀딱 젖어 있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것투성이였다. 이디오가 허둥대며 끼어들었다.

“자, 잠시만 기다려 주시면 방을 마련하겠습니다, 가주님.”

“됐다. 끝물이니 이러다 금방 잦아들겠지. 기도실에 잠시 더 있겠다. 도그만 경은 이만 문 앞에서 대기하게.”

어차피 곧 그칠 비, 전보다 편해 보인다 뿐이지 여전히 나를 보면 경기를 일으키는 이디오의 대접을 받는 것보다 다시 기도실에 들어가는 편이 나을 듯했다.

그렇게 다시 좁은 기도실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순간까지. 일이 마음처럼 안 풀린다 뿐이지 내게 위협이 될 만한 것은 낌새조차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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