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
“깨셨군요.”
잠깐 사이에 잠이 든 모양이다. 노마가 잔뜩 헝클어진 내 머리통에 코와 입술을 비비며 계속해서 속삭였다.
“해가 뜨고 있습니다.”
“……벌써?”
벌써 해가 뜨다니. 그가 곧 바그다트로 떠난다는 말과 같아, 목소리엔 절로 아쉬움이 묻어났다. 그것과 별개로 겨우 눈꺼풀을 들어 올리는 게 고작이었지만.
“네.”
그의 말처럼 반투명한 커튼 사이로 어슴푸레한 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다시 잠들지 않기 위해 오만상을 써 봤지만 밀려드는 졸음은 강력했다.
재울 생각이 없다는 노마의 말에 가슴이 떨렸던 것이 벌써 하루하고 반나절 전. 노마는 분명 장난기가 많은 남자였지만, 나는 그가 결코 허튼소리를 하는 법이 없다는 것을 기억했어야 했다.
노마는 두 번의 밤을 새울 동안 아주 작정을 하고 달려들었다. 덕분에 평소보다 더 짜릿하고 막, 막 기분이 좋았지만. 마지막엔 머리가 곤죽이 되는 기분이 들었으며 다시 하라고 하면 못 할 짓이 분명했다.
‘이러고 있는 시간조차 아까운데. 차마 일어나진, 못하겠구나…….’
아무리 노마가 틈틈이 성력을 들이부어 줬다 해도 이틀간 제대로 자지 못한 여파가 컸다. 성력은 분명 치유에 있어 만능이었으나 오히려 잠이 솔솔 오는 효과가 있기도 했다.
그때 노마의 손이 등 뒤로 길게 늘어진 나의 머리칼을 가르고, 위에서 아래로 느릿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제야 그가 침대 머리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있고, 내가 그런 그에게 애처럼 찰싹 안겨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중요한 것은 아직 둘 다 맨몸이라는 점이었다. 너무 난잡한 것 같아 새삼스레 충격을 받았지만 이제 와 내외할 힘은 남아 있지 않았다.
나는 몸을 주욱 늘어뜨린 채 부드럽게 등을 쓰다듬는 손길을 느끼며 눈을 깜빡였다. 그의 몸은 울퉁불퉁 딱딱했으나 따뜻했고, 무엇보다 이젠 익숙했다.
기분 좋은 안정감을 느끼며 잠시간 누구의 것인지 모를 커다란 심장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이대로 다시 잠에 빠질 것만 같았다.
“한 달 넘게 떨어져 있어야 하는데……. 계속 주무실 건가요?”
‘맞다, 한 달.’
은근한 목소리가 타이밍 좋게 멀어져 가는 정신을 붙잡았다. 순간 잠이 확 깨는 기분이었다.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채 나도 몰래 한숨을 푹 내쉬었다. 살갗에 닿은 입바람이 간지럽기라도 했는지 노마가 옅게 웃음을 터뜨렸다.
순식간에 심각해진 나는 이유가 뭐든 실실 웃는 그가 그저 괘씸하기나 했다. 결국 남몰래 품고 있던 불만을 토로했다.
“당신은, 생각보다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군.”
“제가 그렇게 보이나요?”
“그럼. 나는 기분이 영…… 안 좋은데, 당신은 웃기나 하지 않습니까.”
“……기분이 안 좋으시군요.”
연신 부드러운 손길로 등줄기를 쓸어내리던 노마가 상체를 힘껏 끌어안으며 중얼거렸다. 숨이 막힐 정도로 꽉 안아 주는 감각이 좋았다. 그렇게 우리는 말없이 한동안 서로 마주 안고 있었다.
하지만 얼마 안 가, 나는 정수리에 찬물을 뒤집어쓴 사람처럼 퍼뜩 고개를 들곤 맞닿은 가슴을 황급히 밀어 냈다.
“……또 왜. 도대체, 왜?”
경악에 차 노마에게 물었다. 벌어진 거리에 나른해 보이는 그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몽롱한 낯에 잠시 부끄러운 기색이 스쳤다.
민망하긴 한가 봐? 도대체 방금 어디서 세울 게 있었다고…….
나는 분위기도 모르고 수줍음을 타는 노마를 심각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방금 우리의 대화에서 그가 흥분할 만한 지점이 있었는지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러나 그가 웃음을 터뜨리는 타이밍이 언제나 난해하듯, 흥분을 느끼는 지점 역시 이해하기 어려웠다. 도대체가 그의 아랫도리는 어떤 원리로 작동하는 건지 모르겠다. 노마는 지나치게 건강한 듯했다.
“걱정 마세요. 이렇게 안고만 있을 겁니다. 약속할게요.”
내가 꽤나 격하게 질색하자 노마가 안심하라는 듯이 속닥였다. 그러나 나는 침대 위의 노마 디아시를 딱히 신뢰하지 않았다. 그가 내 뒤통수와 허리 아랫부분을 조심스럽게 감싸더니 다시 자신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게 했다. 하지만 나는 경계를 풀지 않았다.
“최대한 빨리 돌아올 겁니다.”
그가 경직된 몸을 풀어 주려는 것처럼 아까처럼 조심스럽게 등을 쓸어 주며 소곤거리기 시작했다.
“제가 돌아올 때까지 위험한 일은 절대로 하지 마시고 부디 이대로만 있으셔야 해요.”
“누굴 걱정하는 겁니까? 조심은 당신이 해야지. 털끝 하나 상해서 오면 가만있지 않을 거예요.”
결코 농담이 아니었으나 그가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 어떻게 하실 건데요?”
“혼쭐을 내 줄 겁니다.”
“세상에. 어떻게 혼내 주실 건가요.”
그렇게 묻는 그의 목소리엔 즐거움을 넘어 왠지 모를 기대감이 어려 있었다. 실은 혼나는 걸 좋아하기라도 하는 걸까? 의아했지만 어쨌건 나는 성실하게 털끝 하나 상해서 돌아올 시 일어날 수 있는 일을 설명해 줬다.
“일단 본보기로 당신을 모시고 간 기사들을 벌해야겠지. 그래, 폰 바인스가 뭔가 하는 놈부터겠군.”
“……조심하겠습니다.”
뭘 기대했는지 몰라도 이쪽은 아닌 모양인지 그가 빠르게 꼬리를 내렸다. 그 반응이 어쩐지 우스워 피식 웃고 말았다.
그사이 해가 완전히 떠올라 방 안을 푸르게 비추기 시작했다. 당장이라도 누군가 침실 문을 두드릴 것만 같았다. 흐르는 시간이 야속해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이상하지. 이대로 영영 못 보는 것도 아닌데, 마지막인 것처럼 기분이 묘한 게―.”
“잠시만, 잠시만요. 아이사.”
별생각 없이 떠오르는 생각을 중얼거렸을 뿐인데 노마가 펄쩍 뛰어올랐다. 그가 자신의 어깨에 기대고 있던 나를 다급히 일으켰다. 갑작스럽게 마주하게 된 그의 얼굴은 자못 심각했다.
“왜 그럽니까?”
“이대로만 있어 달라는 청은 그냥 한 소리가 아닙니다.”
“……내가 애도 아니고. 설마 사고라도 칠까.”
이런 취급은 오랜만이라 꽤나 흥미로웠으나, 솔직히 말하자면 그의 당부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 참이었다.
“혹시나 제가 없다고 직접 연못에 가시거나 하면 안 되십니다.”
……귀신같긴.
“평소와 조금 달랐습니다. 꼭 누군가 못된 장난을 칠 생각으로, 안 좋은 기억을 억지로 끄집어내려고 하는 것만 같았거든요.”
일전에 연못에 빠진 경위를 털어놓던 노마는 묘한 이야기를 했었다. 이후 몇 번이고 연못을 수색해 봤지만 특별한 점은 찾지 못했다. 이게 꽤나 거슬렸던 참인데, 노마는 내가 연못에 집착하는 것이 신경 쓰였던 모양이다.
“……직접 갈 생각은 안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정찰을 보낼 생각이었지.”
노마가 내게 영 못 미덥다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 그는 내 목숨이 간당긴당하다는 걸 알고 나서는 종종 저런 표정으로 나를 보곤 했다. 마치 대단한 사고뭉치가 된 기분이었다.
“알았대도.”
“조금이라도 위험한 일을 하시면 저도 당신을 혼내 줄 겁니다.”
“……당신이 나를? 어떻게?”
화를 내려나? 하지만 언성을 높이는 그라니, 도무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먼저 한동안은 이 방에서 저만 보셔야 할 겁니다. 자세한 건…….”
그가 천사 같은 미소를 지으며 의미심장하게 말끝을 흐렸다.
지난 이틀간의 경험으로 미루어 보아 그건 어떤 벌보다 강력했기에, 나는 요사스럽게 눈을 빛내는 그를 향해 최선을 다해 고개를 끄덕였다.
* * *
“얘가 왜 이래?”
앙투아네트가 정신 사납게 몸을 버둥거리더니 내 품을 빠져나갔다. 내게 붙었다 노마에게 붙었다, 갈피를 못 잡는 모습이 무척이나 불안해 보였다. 아기 맹수가 한참을 그러는 덕분에 노마의 출발이 조금 늦어졌다.
“아가. 오늘따라 왜 이러니? 네 주인은 금방 올 거야. 아기가 말을 어떻게 타려고. 내게 오렴.”
보다 못한 내가 몸소 허리를 굽혀 앙투아네트에게 손을 뻗었다. 아기 맹수가 안절부절 나를 올려다봤다. 또다시 한참을 머뭇대던 앙투아네트는, 마치 큰 결심을 한 것처럼 내게서 등을 돌리더니 그대로 노마의 가슴팍에 쏙 들어갔다.
“앙투아네트는 역시 고모부가 제일 좋나 봐.”
등 뒤로 서운함 가득한 아치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기 맹수에게 선택받지 못했다는 사실이 섭섭하긴 마찬가지였다.
“……왠지 모르겠지만 앙투아네트가 불안해하니 노마, 당신이 데리고 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앙투아네트의 이상 행동에 노마 역시 적잖이 당황한 듯 보였다. 그가 아기 맹수의 엉덩이를 토닥이며 대답했다.
“앙투아네트는 말도 잘 견디니 괜찮을 겁니다.”
“……그래요.”
“네, 아이사. 그럼.”
‘아아, 이러고 한 달이나 못 본다니.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안아 보면 안 되나? 손이라도 괜찮은데.’
사실 나는 내내 무신경한 표정을 유지한 채 속으론 대충 저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앙투아네트가 소란을 떨기 전 이미 그와 실컷 입도 맞추고 껴안았으니, 보는 눈을 의식하자면 또 하자고 말하기 어려웠다. 안달 난 사람처럼 보이고 싶진 않았다.
“조심히 다녀오세요, 노마.”
노마의 가슴팍에 안긴 앙투아네트가 부럽다는 미친 생각을 하며 마지못해 그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그 순간 노마가 웃음을 참는 것처럼 입술을 꽉 다물었다. 내가 남몰래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치챈 모양이다. 목소리와 표정까진 어떻게 태연함을 가장했다고 생각했으나 그를 속이기엔 역부족이었다.
“아이사. 한 번만 더 안아 주세요.”
노마가 눈썹을 모으곤 한껏 가련한 척을 하며 말했다. 속이 훤히 읽혔다는 사실은 언제나 당황스러웠으나, 바라던 바였다.
내가 기다렸다는 듯이 양팔을 활짝 벌리자, 그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폴싹 내게 안겼다. 그의 가슴팍에 들어 있던 앙투아네트는 불시에 몸이 눌리자 질겁하며 빠져나갔다. 그러거나 말거나 시간이 이대로 멈춰도 반가울 것 같았다.
“매일 절 생각해 주시면 기쁠 겁니다.”
“지금도 하고 있는데.”
내 대답에 노마가 흠칫 몸을 떨었다. 그에게 한 방 먹였다는 사실에 웃음이 나왔다. 나는 이제 자주 그를 놀라게 할 수 있었다. 생각해 보면 사랑한다는 말 빼곤 다 하고 있었으나, 자각이 없었다.
천천히 팔을 풀어 노마의 얼굴을 확인했다. 달아오른 얼굴, 어쩔 줄 모르겠다는 눈을 보고 있자니 말도 안 되는 만족감이 차올랐다. 그가 나를 놀리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이유를 이젠 나도 안다, 이거다.
여세를 몰아 팔을 뻗어 노마의 양 뺨을 덥석 잡았다. 그의 눈이 놀라움으로 커지고, 나는 그 표정에 뿌듯함을 느끼며 그대로 돌진했다. 까치발까지 든 나를 위해 그가 눈치 좋게 내 허리를 낚아채며 상체를 숙여 주었다.
짧고 굵은 입맞춤이 끝나고 정신을 차려 보면, 나는 어느새 노마의 단단한 팔에 안겨 그의 눈높이보다 높게 떠 있었다. 그와 코끝을 맞댄 채 내가 자그맣게 속삭였다.
“돌아오면, 당신에게 할 말이 있습니다.”
“저를 얼마나 더 기쁘게 해 주시려고.”
노마의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 그에 맞춰 둥글게 휘어지는 속눈썹이, 눈동자가, 아침을 밝히는 햇빛에 섞여 희게 부서지는 장면이 참 아름다웠다.
“그러니 빨리 돌아와요.”
다시 한번, 노마의 입술을 향해 얼굴을 내리며 그에게 속삭였다. 그 순간 세상에 둘만 있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것은 아이사 맥포이의 착각이다. 주변엔 어느 때보다 많은 구경꾼이 있었다. 가주 부군 노마는 이미 성에서 대단한 인기를 자랑하는 안주인이었기 때문에 이른 아침부터 성문은 그를 배웅하기 위해 모인 인파로 복닥거렸다.
맥포이 사람들은 눈치껏 숨을 죽이고 당장 기립 박수를 치고 싶은 것을 참았다. 대신 하나같이 얼굴을 붉힌 채 두 분의 애정 행각을 넋 놓고 구경했다.
‘가주 부군께서 드디어 가주님의 장르를 변경하는 데 성공하셨다!’
맥포이 역사에 길이 남겨야 할 날이 분명했다.
와중에 아이사가 아무런 신호 없이 노마에게 입을 맞추는 바람에 시모어 부인은 미처 아치의 눈을 가리지 못했다. 어린이의 눈앞에 성인의 끈적한 애정 행각이 고스란히 노출됐다. 농밀한 신체 접촉을 가까이서 본 아치의 입이 쩍 벌어졌다. 열두 살, 최초의 목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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