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
“곧 말해 줄 수 있을 것 같군요.”
그 말대로 나는 조만간 날을 잡고 노마에게 ‘사랑해요’를 외칠 계획이었다.
예상컨대 그가 없는 한 달은 어느 때보다 긴 시간이 될 것이고, 그 전에 어떻게든 내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다. ‘한 달 뒤’는 ‘조만간’이 아니며 무엇보다 그를 더 기다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갑작스럽게 목표에 정확한 마감일이 생기자 조바심이 났다. 거짓말처럼 시간이 빠르게 흐르기 시작했다. 덕분에 초조함이 배가된 탓일까. 한 번 타이밍을 놓친 뒤론 번번이 노마에게 고백할 기회를 놓쳤다.
“사. 사…….”
“네, 아이사.”
“……사, 탕 먹을래요?”
제발 그 입을 닥쳐라, 아이사 맥포이.
나의 어리숙함을 저주하며 슬며시 그의 시선을 피했다. 노마가 빤히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좋습니다.”
애매한 정적이 흐른 뒤, 노마가 평소와 같이 화사하게 웃으며 답했다. 마냥 행복한 얼굴로 습관처럼 입을 벌려 주고 있는 그를 보고 있자니 기분이 복잡했다.
‘하, 이런 머저리 같은……. 이번에도 장렬히 실패했구나. 서재라 다행이지. 사탕이 없었으면 어쩔 뻔했어?’
그놈의 ‘사랑해요’가 뭐라고 입 밖에 꺼내기 어려운지 모르겠다. 노마를 만나고 나도 몰랐던 다양한 내 모습을 보게 되는 것만 같았다.
그 면면들은 대부분 충격적이었는데, 스물여섯 살이나 먹고 감정 표현에 미숙하다는 것이 그중 하나였다. 너무 오랫동안 내 감정을 표현하기는커녕 무시하고 산 탓인지 고작 말 한마디 뱉는 일조차 어색함을 넘어 본능적인 거부감과 두려움이 덜컥 앞섰다.
‘이게 생각보다 보통 일이 아니군.’
나는 착잡한 마음을 애써 숨기며, 상자를 열어 벌어진 그의 입에 사탕 한 알을 쏙 넣어 줬다.
노마는 내가 요 근래 특히 이상하게 굴고 있다는 것을 뻔히 알 것이다. 이게 그가 바그다트로 떠나기 전까지 어떻게든 ‘사랑해요’라고 말할 틈을 찾고 있다는 강박이라는 것까진 모르겠지만.
아니, 저 앙큼한 인간이라면 알지도 모르겠다. 답답하겠지? 하지만 내가 제일 답답할 것이다.
새삼 당당하게 마음을 표현하는 노마가 대단해 보였다. 나도 모르게 부러움이 뚝뚝 떨어지는 눈빛으로 그를 쳐다봤다. 눈이 마주치자, 한쪽 볼에 사탕을 문 그가 말없이 눈을 깜빡였다.
‘이렇게 또 기회를 날렸으니 다음엔 또 어떻게 기회를 잡으면 좋지.’
그 모습이 언뜻 순진해 보인다고 생각하며 심각하게 다음을 고민할 때였다. 옆에 앉아 얌전히 나를 지켜보던 노마가 불쑥 입을 열었다.
“아이사. 많이 바쁘십니까?”
“곧 우기가 돌아오기도 하니 아무래도 그렇습니다. 갑자기 그건 왜 묻습니까?”
“그럼 바그다트로 떠나기 전날 하루 종일 함께 있는 것은 역시 어려우십니까?”
……이거다.
“오래 떨어져 있어야 하니, 그날은 당신과 내내 함께 보내고 싶습니다.”
노마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정말 내 머릿속을 읽기라도 한 걸까? 그는 가끔 독심술이라도 하는 것만 같았다. 나는 겉으로 최대한 점잖은 표정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루 정도야.”
반가운 기색을 숨기기 위해 꽤나 심혈을 기울였으나 너무 빠르게 답을 하고 말았다. 그러나 보좌관에게 의견을 묻는 과정을 생략한 속전속결에 그가 감동을 받은 사람처럼 활짝 웃지 않나. 노마가 기뻐하니 흐뭇한 마음이 앞섰다.
그래. 알고 이러는지 모르겠지만, 당신이 이렇게 판을 깔아 주는데 안 되어도 되게 하고말고. 진종일 붙어 있는데도 말을 못 하면 천치겠지.
‘딱 기다려라, 노마 디아시. 이번에야말로 내가 아주 멋진 분위기를 잡아 주지!’
침울했던 것도 잠시, 의욕에 불탔다.
노마가 바그다트로 떠나기 전날, 낮도 밤도 그와 단둘이 보내기로 한 나는 즉시 에리카를 불러다가 휴가를 선언했다. 물론 그녀는 격렬하게 저항했지만 깔끔히 무시했다.
* * *
‘……이게 아닌데.’
그러나 아이사 맥포이는 이 방면으로 천치가 맞는 모양이다.
꾹 누르듯이 닿은 그의 입술이 상당히 오래 나의 입술 위에 머물렀다, 핥듯이 아랫입술을 빨아올린 후에 떨어졌다.
질끈 감았던 눈을 슬며시 떴다. 노마와 나 사이에 타액이 늘어지고 그 끝에 붉게 부어오른 그의 입술이 보였다. 현기증 나는 장면에 헛숨을 들이켜며 다시 눈꺼풀을 내리고 말았다.
이런 순간에도 그는 느릿하게 밀고 들어오길 멈추지 않았다. 이제 익숙해질 만도 했는데 제자리를 찾으려는 것처럼 반복적으로 밀려 들어오는 느낌은 언제나 버거웠으며, 한없이 길게 느껴졌다.
그의 움직임에 맞춰 규칙적으로 몸이 흔들렸다. 아랫배부터 퍼지는 이상한 감각이 너무 적나라해서라도 차마 눈을 뜨고 있을 수 없었다.
“아이사. 눈.”
꽉 잠긴 목소리가 낮았다. 동시에 노마가 맞잡고 있던 손을 끌어 올려 자신의 양 볼을 감싸 쥐게 했다. 손바닥에 그의 뺨이 닿는 순간 손끝이 떨렸다. 불덩이처럼 뜨거운 것이 내 손인지 그의 얼굴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노마와 닿는 모든 곳이 화끈거리는 듯했다.
“제대로 봐 주세요.”
여전히 정중한 어조였지만 그가 말할 때마다 정수리가 쭈뼛 서는 오싹함이 들었다. 어쩔 수 없이 눈을 뜨자 기다렸다는 듯이 눈가에 그의 입술이 떨어졌다. 마치 칭찬을 하는 듯했다.
시선이 얽혀들었다. 언제나 화사하게 빛나는 금안은 빛을 등지고 있어 도통 무슨 생각을 담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그의 입술이 미미한 곡선을 그리고 있다는 것, 그의 눈동자가 끈질기게 날 훑고 있다는 사실만은 확실했다.
노마는 오늘따라 내가 눈을 감는 것을 봐주지 않았다. 꼭 눈동자에 그 얼굴을 새겨 넣으려는 사람같이 내내 마주 보는 자세를 고집했다.
‘하지만 자꾸, 자꾸 움직이니까 도저히…….’
눈을 뜨고 있기 어려웠다. 도대체 뜨라는 건지 감으라는 건지.
오늘도 그의 상체와 하체는 인격이 분리된 것 같았다. 상냥한 척 감질나게 움직이던 그의 하체가 점점 과감해지기 시작했다. 물기 가득한 마찰 음이 점점 커지는 것은 착각이 아닌 듯했다. 결국 민망함을 이기지 못하고 또다시 눈을 감고 말았다.
정신없이 휘몰아치던 그가 이내 깊숙한 곳에서 움직임을 멈췄다. 같은 순간 나는 어딘가 찔린 사람처럼 파드득 전신을 떨었다.
서로의 입술에서 탄성과 비슷한 신음이 막을 새 없이 흘러나왔다. 어느새 그의 양손은 내 골반을 붙잡고 있었고, 나는 그의 양 손목을 꼭 붙들고 있었다.
잘게 떨리는 몸을 주체하지 못한 채 숨만 몰아쉬다, 겨우 눈꺼풀을 들어 그를 올려다봤다. 끈적한 시선으로 나를 탐색하고 있던 그의 눈동자와 마주쳤다. 새삼 평소의 그와 사뭇 다른 분위기라 나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아. 지금, 지금인가?’
그래도 아주 바보는 아닌지 나는 문득 바로 지금이 타이밍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멋진 분위기는 포기한 지 오래였다. 휴가가 시작된 이래 지금까지 이미 무수한 기회를 놓쳤으니, 이젠 시간이 별로 없기도 했다.
“하아!”
눈 딱 감고 외쳐 보려고 했으나, ‘사랑해요’보다 언어가 되지 못한 본능이 먼저 튀어 나가고 말았다. 첫째로 목이 쉬었기 때문이고 둘째로 그 순간 그가 아래를 더욱 바짝 붙여 온 탓이었다.
아, 이런. 본능적으로 허리를 틀며 미약하게 발버둥 쳤다. 그러자 노마가 도망가지 말라는 듯, 상체를 내려 온몸으로 덮쳐 왔다. 도피에 실패한 나는 서둘러 그의 목에 팔을 두르고 봤다.
“사랑해요.”
결국 이번에도 나 대신, 노마가 귓가에 대고 사랑을 속삭였다. 동시에 더 들어올 수 없을 것 같았던 그가 한계까지 자신을 밀어붙여 왔다. 숨이 넘어가는 와중에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나, 나도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순간 용기가 한 줌 부족했다. 맞장구로 끝나 버린 나의 고백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어설펐다. 심지어 그에게 들리기나 했을까 싶을 정도로 작았다.
“아이사.”
스스로에게 엄청난 실망감이 들려는데, 노마가 고개를 조금 들더니 나를 불렀다.
“잘하셨습니다.”
그 목소리는 여전히 평소보다 꽉 잠겨 있었으나, 기분 좋은 꿈을 꾸듯 달큰하고 기쁨으로 충만했다. 덕분에 밀려드는 자괴감이 순식간에 잊혀졌다. 나는 숨을 죽이고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저는 당신 남편이고 당신은 제 아내입니다.”
당연한 소리였지만 유난히 마음에 드는 말이었다.
“우리는 오래오래 같이 살 것이니 함께할 시간은 차고 넘칩니다.”
“……그렇지.”
그가 내 무릎 뒤를 잡고 있던 손을 풀곤, 이번엔 양 뺨을 감싸 쥐어 왔다. 시트에 반쯤 파묻혔던 얼굴이 그의 손길에 의해 자연스럽게 정면을 향했다. 슬그머니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그의 표정에 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러니 당신은 서두르지 않으셔도 됩니다.”
벌건 얼굴을 한 노마는 너무, 행복해 보였다. 고작 허접한 ‘나도요’에 저런 얼굴을 보여 주다니. 얼마나 더 내 버릇을 망쳐 놓을 생각인지 모르겠다.
“전 어디에도 가지 않으니, 당신 속도에 맞춰서 천천히 제게 와 주시면 됩니다. 아주 잘하고 계세요.”
또한 눈치 빠른 그는 내가 휴가 내내 어디에 정신 팔려 있었는지, 무엇에 실패했는지 전부 아는 듯했다.
“사랑해요.”
느슨하게 풀어진 얼굴로 노마가 몇 번째인지 모를 사랑을 속삭인 순간, 커다란 손에 붙잡힌 내 얼굴에는 곧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열이 올랐다.
‘세상에. 이건 또 무슨 기분이람.’
뭐라도 말하고 싶었으나 깊숙한 곳부터 끝없이 벅차오르는 기분이 들어 차마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한참을 입술만 달싹인 끝에 나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미숙하기 짝이 없는 내 반응에 노마는 푸흐흐, 웃기나 했다. 그러자 더는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다음 순간, 나는 갈급하게 팔을 뻗어 그를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
‘아, 나는.’
서툰 동작에 코끝이 부딪혔다. 그럼에도 나는 어떤 때보다 열심히 그에게 입을 맞췄다. 그것을 신호로 노마가 다시 천천히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말로 표현 못 할 만큼 좋은 거야.’
심장이 어찌나 빠르게 뛰는지 가슴이 울려 아프기까지 했다. 생리적인 눈물이 몇 방울 떨어진 듯했다. 이후 머릿속이 하얗게 씻겨 내려가는 듯, 정신이 빠르게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가 바그다트로 떠나기까지 고작 몇 시간 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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