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
그러나 물 흐르듯이 움직이는 고모부의 손을 흉내 내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생각보다 어려워요. 이게 맞아요?”
분명 보기에는 무척 쉽게 느껴졌는데 말이다. 아치가 엉망으로 꼬아 놓은 머리칼을 보고 노마가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어린이의 의욕이 한순간 바닥을 쳤다.
“저런. 이렇게 네 가닥을 잡아서 두 번째 가닥을 가장 아래에 두는 거다.”
“……이대로면 고모 일어나자마자 혼나겠는데. 거울 보자마자 ‘아치, 내 이 녀석!’ 할걸요.”
“내 이 녀석을 정말, 하시겠는데.”
아치의 고모부는 다정하게도 아이의 말 하나하나에 맞장구를 쳐 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치는 와중에 노마가 어떤 상스러운 말을 해도 곱게만 들릴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서툰 것도 서툰 것이었지만, 아치가 아무리 조심스럽게 움직인다고 해도 아이의 손은 그리 섬세하지 못했다. 어떻게 수습을 해 보려고 엉킨 머리카락을 당기기 무섭게 아이사의 눈꺼풀이 움찔거렸다.
“헉, 깼다.”
아치가 망연하게 중얼거리자마자, 아이사의 눈꺼풀이 올라가며 보라색 눈동자가 드러났다. 아치는 슬그머니 그녀의 머리칼을 내려놓고 사라질 준비를 했다.
노마는 아치가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는 모습을 보고 웃음을 참았다. 그가 아치를 도와줄 겸, 고개를 숙여 아이사와 눈을 맞췄다.
“아이사.”
퍽 반갑다는 듯한 목소리에 반응한 아이사가 눈동자를 움직여 노마를 찾았다. 익숙한 얼굴을 발견한 그녀의 얼굴에 빠르게 안심한 기색이 스쳤다. 그녀는 그러면서도 의아한 듯 살풋 미간을 구기더니, 느릿하게 손을 뻗어 자신의 머리통을 더듬거렸다.
“주무시면서 모양이 망가져서요. 아치와 다시 땋고 있었습니다.”
“아치와?”
불길한 이야기에 아이사가 잠결에도 미간을 팍 찌푸렸다. 똑똑한 어린이는 이미 그녀의 배 위에서 졸고 있던 앙투아네트를 옆구리에 끼곤 사용인들 뒤로 쪼르르 내뺀 후였다.
“네, 그러니 조금 더 눈을 붙이세요. 보좌관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음. 그래요…….”
노마가 사근사근한 말투로 속삭였다. 안 그래도 비몽사몽 했던 아이사는 그 목소리에 불길함을 쉽게 잊었다. 특히 에리카가 아직이라는 말에 안심한 그녀가 다시 눈꺼풀을 내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노마가 입술을 천천히 끌어 올렸다.
등에 닿는 뜨거운 햇볕, 조그마한 그녀가 제 그림자 안에 쏙 들어가 있는 것. 그녀가 제 옆에서 경계 없이 졸 수 있게 됐다는 사실까지. 무엇 하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없었다. 아니, 이보다 행복할 순 없을 듯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노마의 행복한 시간이 깨진 것은 바로 그 직후였다.
“경. 황실에서 서신을 보내왔습니다. 그, 슬슬 가주님을 깨우시는 것이…….”
기사 하나가 헐레벌떡 달려와 황제의 사자가 당도한 사실을 고했다. 기사의 탓은 아니었지만, 넌 눈치도 없냐는 싸늘한 시선들이 그에게 꽂혔다. 의도치 않게 가주 부부의 단란한 한때를 방해하게 된 그는 땀을 삐질 흘렸다.
노마의 얼굴에 아쉬움이 뚝뚝 흘렀다. 하필이면 황제의 사자라니 이런 불청객이 없었다. 황제의 대리인을 기다리게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아쉬움을 뒤로한 채, 그는 어쩔 수 없이 아이사를 깨우기로 했다.
‘하지만 역시 이대로는 너무 아쉬운데.’
얌전히 아이사를 깨울 생각이 없어진 노마가 사용인들에게 무언의 신호를 보냈다. 가주 부군의 아련한 눈빛을 읽은 유능한 사용인들은 화색을 띠었다. 그들이 일사불란하게 시선을 돌리고, 최근 저 신호의 의미를 알게 된 시모어 부인 역시 황급히 아치에게 손을 뻗었다.
시모어 부인의 손바닥이 아치의 눈을 가린 순간. 기대감 가득한 미소를 지은 노마가 잠든 아이사의 턱을 약하게 쥐고 그녀를 향해 몸을 숙였다.
서로의 입술이 닿고, 그의 머릿속엔 문득 예전 같았으면 감히 잠자는 그녀에게 입을 맞추는 일은 상상도 못 했을 거란 생각이 스쳤다. 그러자 알 수 없는 만족감이 차올랐다.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그가 평소보다 거세게 그녀의 입술을 파고들었다.
몸 아래에서 아이사가 움찔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입을 맞추는 중에도 그의 잇새로 웃음이 샜다. 이제 그녀가 슬슬 숨이 부족할 즈음이었다. 노마는 아이사가 너무 놀라지 않게 이쯤에서 혀를 빼 주기로 했다.
서로의 코끝이 닿는 거리까지 물러나자,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잘잘 흔들리고 있는 보라색 눈동자와 마주쳤다. 평소 창백하다고 느껴질 만큼 하얀 그녀의 얼굴이 어느새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는 것 또한, 아주 잘 보였다.
어떻게 매번 기대한 것보다 귀여운 반응을 하시는지. 또다시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한 노마는 얼굴 근육이 멋대로 움직이는 걸 경험했다. 그녀가 알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을 테지만, 노마는 세상에서 아이사가 제일 재밌었다.
아이사는 자다가 봉변을 당한 사람의 심정이 되어 입술을 꾹 다물었다. 퍽 억울해 보이는 눈빛에 노마는 그녀를 그만 놀려야겠거니 했다. 더 놀렸다간 서러운 얼굴을 할 것이고, 그런 표정을 보면 그의 마음도 갈기갈기 찢어지기 때문이다.
노마가 눈치껏 아이사가 특별히 좋아하는 각도를 잡아 눈웃음을 날렸다. 억울한 것도 잠시, 자신의 얼굴에 집중하는 그녀의 투명함이 그저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노마는 결국 또다시 두근거림을 주체하지 못했다. 그가 한숨을 쉬며 그녀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맞댔다.
별안간 박치기를 당한 아이사가 아, 하고 짧게 앓는 소리를 냈다. 이게 또 무슨 짓이냐는 소극적인 항변인 것을 알았으나 사랑에 빠진 별 가루는 개의치 않았다. 그녀는 정말 싫을 땐 ‘싫소!’라고 단호하게 외치는 사람이었다.
‘역시, 신중해야 하는 것은 당신인데.’
노마는 그녀가 말 그대로 ‘아이사를 한입에 넣어 보고 싶다’는 충동을 이마를 맞대는 것으로 참아 냈다는 걸 몰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안녕. 일어날 시간이에요.”
속내를 감춘 노마가 산뜻한 얼굴을 하고 아이사에게 인사를 건넸다.
* * *
ㅎㅂㄹㄱ
황태자의 성년식이 가까워졌으니 조만간 황제의 대리인이 찾아올 것은 예상한 바였다. 그럼에도 빌리넌트는 어쩜 태어난 때까지도 이렇게 눈치가 없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필이면 닉스가 바그다트에 있을 때 성년식을 치를 것은 또 뭐란 말인가?
어쨌건, 황태자와 불화설이 불거진 맥포이는 더더욱 그의 성년식에 불참하기 어려웠다. 며칠 전 엑트라로부터 황제가 빌리넌트에게 근신령을 내렸다는 소식을 받았겠다, 슬슬 그와 관련된 소문을 종식할 차례이기도 했다.
하여간 다시 한번 빌리넌트는 여러모로 손이 많이 가는 인간이었다. 그러나 진짜 청천벽력 같은 소식은 따로 있었다.
“송구하나 바그다트엔 두 분 중 한 분만 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곧 건국제가 있으니 말입니다.”
부끄럽게도 나는 에리카의 말을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왜 그런 표정이십니까? 작년에 대회의 참석차 건국제를 황도에서 보내셨으니, 올해는 맥포이에 얼굴을 비치셔야지요. 황태자의 성년식에 가시면 건국제가 끝나고 나서야 맥포이에 돌아오시게 될 겁니다.”
바그다트에 둘 중 한 명만 가도 된다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전에 노마가 부부 사이라면 뭐든 함께하면 좋다고 한 적이 있어, 나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황태자의 성년식에 불참할 수는 없으니 한 분은 맥포이에 남으시고 한 분은 바그다트에 가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머리로는 에리카의 명쾌한 계획에 즉시 승인을 날렸지만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내가 바그다트에 가겠다.”
그때 노마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부부는 뭐든 함께하는 게 좋다더니 이 무슨 단호함이란 말인가. 혹시 두 사람이 말을 맞추고 집무실에 들어왔나 의심이 들 정도였다.
“혹시나 당신이 닉스와 가까워지면 그것이 반응을 할까 걱정됩니다. 닉스의 봉인은 불안정해 작은 자극에도 깨질 수 있으니까요.”
그렇게 말하는 노마의 표정은 드물게 굳어 있었다.
“그러니 당신은, 바그다트에 가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일전에 호수 한가운데 단둘이 떠 있을 때, 분위기를 탄 나는 그에게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충동적으로 꺼낸 바 있었다. 또한 그는 은근히 엄격했으니 뭐든 그냥 넘어가는 일이 없었다.
결국 나는 다음 날, 동틀 때까지 그의 집요한 물음에 시달린 끝에 오필리아의 성력에 대해 상세히 털어놔야 했다. 단순히 오필리아가 나를 되살려 놨다고만 알았던 노마는 내색하진 않았지만, 내 목숨이 여전히 간당간당하다는 사실에 적잖이 충격을 받은 듯했다.
생각해 보니 내 상태는 심장을 바깥에 빼놓고 다니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의도치 않게 결혼 사기를 친 듯해서 나는 그의 눈치를 제법 봤었다. 설마 이 나이 먹고 내 집에서 눈치 봐야 할 존재가 생길 줄은 꿈에도 몰랐다.
“바그다트는 아직도 성력이 깃든 땅입니다. 그 힘을 다루지 못하시니 변수가 너무 많습니다. 저 혼자 다녀오겠습니다.”
노마가 쐐기를 박았다. 그의 말대로였다. 나는 탄타로스 이후 오필리아의 힘을 쓴 적이 없었다. 정확히는 못 쓴 것이었다.
내 침실에 불쑥 찾아왔던 오필리아는 분명 자신을 부르는 것이 조건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 후 아무리 불러 봐도 그녀의 힘은 내 목소리에 반응하지 않았다. 추측하기론 정말 목숨이 위급한 상황에만 그 애의 성력이 튀어나오는 게 아닐까 싶으나 근거는 없었다.
“제 생각에도 부군께서 바그다트에 가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두 분 사이가 각별하다는 소문이 자자하니, 가주 대리로 가신다면 성의는 충분할 것입니다.”
오늘따라 내 보좌관과 부군은 쿵짝이 잘 맞았다. 다시 한번 두 사람이 나 몰래 미리 짜고 들어온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말을 타고 소수의 인원으로 움직이면 한 달하고 며칠 안에 돌아올 수 있을 겁니다, 아이사.”
내가 어떤 표정인지는 모르나, 노마가 퍽 애틋한 표정을 하고 나를 달랬다. 그의 목소리는 마치 아이를 두고 잠시 떠나야 하는 어머니처럼 걱정이 한가득이었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한 달’이 나온 순간 나는 절로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별안간 생이별을 앞두게 되자 싱숭생숭한 기분을 미처 숨길 수 없었다.
“망할 로덴시.”
‘그보다 더 망할 닉스 새끼’는 속으로만 되뇌며, 나는 결국 노마가 바그다트로 떠나는 것을 허가해야 했다.
한 달. 더 정확히는 한 달 조금 넘게. 노마와 그만큼 떨어져 있어야 한다니 상상이 잘 가지 않았다. 근 세 달 가까이 가장 오래, 자주 붙어 있던 사람이 바로 그였다.
무엇보다 나는 그에게 아직 못 한 말이 있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숙제를 하지 못한 아이처럼 초조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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