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
헤이롯은 맞은편에 앉아 오늘따라 정신 사납게 구는 아드리네를 잠시간 응시했다. 그러다 곧 겁에 질린 황후에게는 어떤 관심도 없다는 듯, 상석에 앉은 황제에게 시선을 돌렸다.
“다시 한번, 염려하실 것 없습니다. 매일 여신의 힘을 들이붓고 있으니 ‘그것’은 쉰 살이 넘은 병약한 인간에 불과합니다.”
헤이롯이 건성으로 말했다. 그는 걱정 많은 황제와 황후를 안심시키기 위해 몇 번째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뭐든 쉽게 싫증을 내는 그로서는 최고의 인내심을 발휘한 셈이었다.
“물론, 누군가 그걸 돕지만 않는다는 전제하에. 말이지요.”
결국 헤이롯은 자신을 귀찮게 하는 존재들에게 짜증을 숨기지 못했다. 제국에서 신전의 힘은 특별했다. 그는 황제 앞에서도 거침이 없었다.
헤이롯의 심술에 마찬가지로 기분을 숨길 필요가 없는 신분인 황제 역시 대놓고 얼굴을 구겼다. 아드리네는 습관처럼 기 싸움을 벌이는 황제를 속으로 욕하며 대신관의 심기를 살폈다. 그녀가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입을 열었다.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위대한 대신관께서 힘써 주실 것이라 믿습니다.”
“황태자는 성년식 내내 바그다트에 위치한 신전 안에만 있을 겁니다. 신관의 안내만 잘 따른다면 어떤 문제도 생기지 않겠지요.”
헤이롯의 뱀 같은 눈이 아드리네를 향했다. 아드리네는 순간 그가 자신을 낱낱이 꿰뚫어 보는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녀는 부러 눈꼬리를 기다랗게 접어 인자한 표정을 만들어 냈다.
“그러니 죄라도 지은 것처럼 불안해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런 그녀의 미소를 조롱하듯 헤이롯이 어깨를 으쓱이며 덧붙였다. 아드리네는 순간 입꼬리가 비틀릴 뻔한 것을 가까스로 참아 냈다.
“……대신관께선, 말씀을 참 재밌게 하십니다.”
그녀는 부채를 반쯤 펼쳐 자연스럽게 입가를 가리곤 능청을 떨었다.
‘감히, 이 몸에게 죄라니. 미친 신관 나부랭이 주제에.’
그러면서 속으론 헤이롯을 업신여겼다. 동시에 혹시 그가 무언갈 알고서 지껄인 말이면 어쩔까 하는 조바심을 냈다.
하지만 헤이롯은 아드리네에게 탐색할 시간을 더 주지 않았다. 그가 따분한 부모 면담을 끝내기 위해 슬슬 말하는 속도를 높였다.
“관례에 따라 제가 황성부터 바그다트까지 동행할 예정이니, 가시는 길 또한 염려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럼, 이제 궁금하신 것은 모두 풀리셨겠지요.”
황제가 더 물을 것이 있냐는 듯 아드리네에게 시선을 던졌다. 여전히 부채 뒤에 입가를 숨긴 그녀는 마지못해 눈웃음을 지어 보이며 우아하게 고개를 까딱였다. 헤이롯의 표정이 처음으로 밝아졌다.
다소 짧은 접견을 마치고, 황제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때 황제의 응접실을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고 싶은 사람처럼 굴던 헤이롯이 웬일로 그를 멈춰 세웠다.
“한데, 황제 폐하.”
“왜 그러시오, 대신관?”
“황태자는 어째서 오늘 자리하지 않았습니까?”
헤이롯은 마치 그제야 깨달았다는 듯이 뒤늦게 황태자의 행방을 물었다. 그에게 빌리넌트의 존재감이란 참담할 정도로 미약한 탓이었다.
동시에 황제의 얼굴이 불쾌한 소리를 들었다는 양 일그러졌다. 가면처럼 눈웃음을 짓던 아드리네 역시 탄식과 같은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곧 성인이 되는 그들의 아들은 최근, 말도 못 하게 엉망이었다.
* * *
황태자 궁으로 향하는 아드리네의 걸음이 무척이나 급했다. 마침내 황태자 궁이 가까워지자 유리 깨지는 날카로운 소리와 비명이 들려왔다.
“며칠간 ‘그것’과 가까이 있어야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신체와 정신이 약해진 상태에선 삿된 목소리에 끌리기 쉽지요. 그러니, 성년식 전까지 특별히 신경 쓰시길.”
미치광이라더니 과연 대신관은 재수 없는 소리만 해 댔다. 아드리네가 뿌득 이를 갈았다. 감히 제 눈치를 보지 않고 곧은 말만 지껄여 대는 것이 가장 괘씸했다.
“아악―!”
멀리서 들리는 단말마의 비명에 아드리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조금 더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황태자!”
서둘러 아들의 침실에 들어갔을 때, 아드리네는 훅 풍겨 오는 비릿한 피 냄새를 맡고 우뚝 멈춰 서고 말았다. 커튼이 드리워져 아직 캄캄한 방 안을 배경으로 빌리넌트의 뒷모습과 그의 발치에 쓰러져 있는 하녀가 보였다.
‘피가, 너무 많이 나지 않나.’
아드리네 역시 숨 쉬듯이 시종에게 손을 대고 물품을 파손하곤 했다. 그녀 눈에 그들은 한낱 소모품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그랬기에 빌리넌트가 평소 아랫사람에게 손을 올리거나 폭력적인 행동을 해도 별다른 제지를 하지 않았다.
‘죽은 건가?’
그런 아드리네조차 당황스러운 상황이었다. 그때 석상처럼 멈춰 선 그녀를 향해 빌리넌트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젊었을 적 황제의 초상과, 죽은 칼리페시와 똑같이 생긴 얼굴이 그녀를 바라봤다.
안 돼. 아드리네는 남몰래 마른침을 삼켰다.
“어, 머니.”
그때 빌리넌트가 그녀를 불렀다. 아드리네가 멈췄던 다리를 움직여 조심스럽게 아들에게 다가갔다.
“황태자. 어떻게 된 건가요.”
“감히 이 나를 침실에 가둬 두고, 쥐새끼 주제에, 이것도 절 머저리 취급하지 않습니까……!”
양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은 빌리넌트가 화를 참지 못하는 사람처럼 더듬거리며 소리쳤다. 그의 손은 다른 사람의 피로 흥건했고, 얼굴 역시 피 칠갑이 된 상태였다.
아드리네가 빌리넌트의 넓은 등을 손바닥으로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그녀의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쉬……. 쉬, 진정하세요. 감정을 절제할 줄 아셔야 해요. 근신은, 폐하의 명이지 않습니까.”
“페하께선 그 옛날 메르케시에게 그랬던 것처럼 저를 좁은 방에 유폐하고, 그 미친 메르케시를 불러 후계자로 세울 생각이신 겁니다. 어머니, 폐하께서 제게 어떻게…….”
“황태자.”
주변을 의식한 아드리네가 귀신같은 목소리로 아들의 헛소리를 저지했다. 빌리넌트가 억울하다는 듯이 주먹을 쥐었다 힘없이 허공에 떨어뜨렸다.
아드리네가 눈동자를 움직여 미동 없는 하녀의 몸뚱이를 훑었다. 초점 없는 눈동자와 눈이 마주친 순간, 칼리페시의 방에서 매주 실려 나오던 것들이 떠올랐다.
“뭣들 하니. 어서 치우렴.”
그녀가 다소 강박적으로 문밖의 하녀들에게 외쳤다. 그러곤 최대한 달콤한 목소리로 빌리넌트를 달래기 시작했다.
“폐하께선 정무에 지친 황태자에게 잠시 쉴 시간을 준 겁니다. 머리를 비우고, 진정할 시간을요. 황위는 황태자의 것입니다. 메르케시는 미쳤어요. 황제가 되지 못합니다. 그녀는 죽을 때까지 제국에 발도 못 디딜 겁니다.”
빌리넌트가 최근 불안정한 이유는 황제와 사이가 틀어진 탓이 컸다.
최근 황도에서 가장 인기 있는 화제는 황태자가 맥포이를 제거하려 한다는 ‘음모론’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은밀히 돌기 시작한 소문이 티베이 부인의 무도회를 통해 부풀려진 것이었다.
영향력 있는 귀족들은 빌리넌트가 이번 일로 정치적 판단력이 형편없다는 사실을 증명했다며 조롱을 던졌다. 반대로 맥포이 가주가 탄타로스에서 살아 돌아와 광신도를 잡아들이고 디아시와 결혼한 것으로, 맥포이의 평판은 어느 때보다 좋았다.
황제 입장에서는 날벼락이었다. 그는 황태자를 위해, 무엇보다 자신의 노후를 위해 부유한 맥포이와 화친을 꾀하고 있었다. 이 계획에 황태자가 보기 좋게 찬물을 끼얹으니 그는 아들에게 노발대발했다.
결국 황제는 빌리넌트를 불러다 죽은 칼리페시와 비교한 것도 모자라, 홧김에 ‘메르케시가 너보다 낫겠다’며 윽박을 지르고 말았다.
이걸로 끝이었으면 좋았겠지만 참지 않는 빌리넌트는 황제가 성을 부리는 것을 가만 듣고 있지 않고 함께 난동을 피웠다.
속이 꼬일 대로 꼬여 있던 부자는 쉽게 파국으로 치달았다. 그 결과 빌리넌트에게는 호위 명목의 감시인이 배로 붙게 됐다. 침실 근신령이 떨어진 것은 감히 황제에게 대든 괘씸죄였다.
“부디 마음을 편히 가지세요. 그래야 합니다.”
빌리넌트를 껴안은 아드리네가 간절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바그다트로 떠나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성년식을 미룰 수도 없는 노릇이니 대신관의 무신경한 조언처럼, 빌리넌트에겐 정신적 안정이 필요했다.
헤이롯의 목소리와 칼리페시의 마지막 모습이 아드리네의 머릿속에 가득 찼다. 그녀의 가슴이 어느 때보다 불안하게 뛰었다.
* * *
우기에 들어서기 전 맥포이 날씨는 어느 때보다 화창했다. 덕분에 다양한 나들이를 시도하는 중, 아치 맥포이는 잘 관리된 잔디에 천을 깔고 그 위에서 태평히 시간을 보내는 것을 가장 좋아했다.
그리고 특별히, 오늘의 나들이엔 손님이 있었다.
“저는, 고모가 이렇게 자는 건 처음 봐요.”
아치의 고모 아이사였다.
“그래?”
아치는 혹시 제 고모가 깰세라 노마에게 귓속말로 속닥거렸다. 간질간질한 느낌에 노마가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네. 이렇게 낮잠을 자는 것 말이에요.”
그도 그럴 게 잔디에 누워 세상 순한 얼굴로 낮잠을 자는 아이사 맥포이라니. 심지어 그 배 위엔 앙투아네트가 위풍당당하게 똬리를 틀고 앉아 졸고 있었다. 그녀가 어딘가 본인과 닮은 조그만 아기 맹수를 안고 낮잠을 자는 모습은 희귀한 장면이 분명했다.
애초에 아치는 제 고모가 잠자는 걸 본 적이 몇 번 없었다. 시모어 부인에 의하면 걸음마를 떼기 전까지 아이사가 직접 그를 데리고 잤다지만, 아기일 적 기억이 남아 있을 리가.
아치는 묘하게 기분이 들뜨는 것을 느끼며 고모 옆에 비스듬하게 누웠다. 가만히 누워 있기만 하는데도 지루하지가 않았다.
아이는 얌전히, 고모부가 잠든 고모의 머리칼을 몇 가닥 집어 촘촘히 땋는 모습을 세상 흐뭇한 얼굴로 구경하기 시작했다.
열두 살 아치에게 오랜 걱정거리가 있었다. 바로 자신의 보호자인 고모였다. 친구도 없고 가족도 조카뿐이고, 적만 많은 아이사의 인생은 어린 아치가 보기에도 그다지 즐거워 보이지 않았다.
입에 담기도 싫은 못생긴 전 약혼자가 그 난리를 피웠을 땐, 고모가 외롭지 않게 평생 단둘이 살 각오까지 다졌었다. 그런데 웬걸. 노마와 앙투아네트가 가족이 된 것으로 아치의 평생 걱정거리가 싹 사라졌다.
아치가 한껏 만족스러운 표정을 하고선 복덩이 같은 고모부에게 물었다.
“흐응. 그렇게 좋아요?”
“응.”
아치가 은근히 고모부를 놀리듯 키득키득거리며 묻자, 노마가 수줍게 볼을 붉히며 대답했다. 물론 아치는 아이사가 좋냐고 질문한 게 아니라 순수하게 머리 땋는 행위에 대해 물은 것이었다.
이 순간 흐뭇한 것은 아치뿐만이 아니었다. 몇 걸음 떨어져 단란한 세 사람을 지켜보던 사용인들 역시 뿌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때 노마가 아치에게 물었다.
“아치. 머리 땋는 방법을 알려 줄까? 네가 땋아 드리면 무척 좋아하실 거다.”
아치는 잠시간, 뚱한 얼굴로 거울을 보지만 자신의 서툰 작품을 자기 전까지 풀지 않을 고모의 모습을 상상했다.
“흠, 좋아요! 가르쳐 주세요.”
꽤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에 아치가 망설임 없이 몸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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