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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데드 엔딩 후에-116화 (116/139)

116.

한편 미친 사람처럼 모래사장까지 달려간 메르케시는 축축한 모래에 무릎을 꿇고 토하기 시작했다.

“컥……!”

그녀가 며칠간 먹은 것이라곤 술밖에 없었다. 목구멍을 타고 매운 액체만 쏟아졌다.

“메르케시 님.”

빠르게 메르케시를 따라잡은 맥 바인스가 작은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그녀는 그사이 완전히 녹초가 되어 모래에 주저앉아 있었다. 초점 없는 눈동자는 시커먼 바다를 향해 있었고, 부서진 파도가 그녀의 발끝을 적셨다 물러나길 반복했다.

“이만 방으로 모시겠습니다.”

한쪽 무릎을 꿇고 메르케시와 눈높이를 맞춘 맥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메르케시는 그의 목소리가 전혀 안 들리는 사람처럼 오매불망 바다를 바라볼 뿐이었다.

“황녀님.”

맥이 영 정신을 못 차리는 메르케시를 재촉했다. 별 기대 없는 부름이었으나, 혼이 빠진 듯했던 그녀의 눈에 일순 초점이 돌아왔다. 정확히는 경악이 들어찬 것이었다. 메르케시의 몸이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메르케시 님? 왜 그러십니까? 황녀…….”

놀란 맥이 재빠르게 그녀의 어깨를 잡아 부축했다. 곧 메르케시가 맥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왜, 어째서, 갑자기.”

메르케시가 알 수 없는 말을 띄엄띄엄 중얼거렸다. 사시나무처럼 몸을 떨던 그녀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 * *

“황녀님.”

맥의 목소리는 완벽한 저음에 딱딱하기 그지없어, 사랑스럽고 부드러운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황녀, 오랜만이에요.”

그럼에도 맥이 오랜만에 자신을 ‘황녀’라고 부른 순간, 메르케시의 귀에 웬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메르케시 님? 왜 그러십니까? 황녀…….”

메르케시는 제 귀를 의심하며 자신을 황녀라고 불러 대는 맥 바인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주말 기도는, 잘 드리고 왔나요?”

그리고 잘못 들은 것이 아니라는 듯 다시 한번 세상에서 가장 고운 목소리가, 완전히 잊고 있었던 그 말이 그녀의 귓가에 울렸다.

왜. 어째서. 갑자기.

새어머니, 아드리네의 목소리가 떠올랐는지 메르케시는 알 수 없었다.

간혹 아주 사소한 일이 계기가 되어 완전히 잊고 있던 기억이 불쑥 생각나는 경우가 있다. 메르케시는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인가 싶었다. 오랜만에 들어 본 ‘황녀’라는 호칭 때문에 별안간 새어머니의 고운 목소리가 생각난 것이라고.

‘그러고 보니, 그런 일이 있었지.’

그녀는 눈을 감은 채 꽤나 오래전에 있었던 일을 더듬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황성의 안주인, 아드리네는 메르케시를 투명 인간 취급했다. 황좌에 아무 관심 없는 메르케시 입장에선 아주 고마운 일이었다.

아드리네 황후와 머무르는 궁부터 달랐으니 우연히 마주쳐 인사를 나누기조차 어렵기도 했다. 아드리네가 메르케시에게 개인적으로 말을 건 횟수는 한 손으로도 셀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중 한 번이 바로 칼리페시가 죽은 그해 초봄, 메르케시가 제 언니와 함께 주말 기도를 마치고 돌아온 어느 날이었다.

기도는 잘 드리고 왔냐고 묻던 상냥한 목소리. 정면으로 마주쳤으니 어쩔 수 없이 형식적인 인사를 건넨 것이겠으나, 아드리네는 그날따라 평소와 달리 몇 마디를 더 붙였었다.

“오늘 황태녀의 담당 신관이 바뀌었다 들었는데. 별일 없던가요?”

뜬금없이 칼리페시의 안부를 묻는다든가 하는.

칼리페시는 어딜 가기만 하면 꼭 누구 하나를 쥐 잡듯이 잡곤 했다. 황제는 그 패악질이 퍼져 나가지 않도록 막는 데 최선을 다했으나, 황후 입장에선 자신의 소생이 아닌 칼리페시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안하무인으로 행동하는 것은 그저 희소식이었다.

그러니, 황후가 황태녀의 새로운 기도 신관이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해하는 것은 딱히 이상할 게 없었다. 메르케시는 대충 ‘그렇다’라고 답하곤 그날 일을 완전히 잊고 있었다.

그랬는데. 갑자기 떠오른 아드리네의 물음이 완전히 새롭게 들리는 건 무슨 이유일까.

저 말은 칼리페시가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묻는 것이었을까.

아니면, 칼리페시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묻는 말이었을까.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메르케시는 자기도 모르게 꺼림칙한 상상을 하다 가까스로 멈췄다.

‘내가 미친 척을 하다 정말 미쳐 버린 게 분명하구나.’

그녀는 무더운 여름이면 극심한 악몽에 시달렸다. 취해 있지 않으면 미쳐 버릴 것 같은 끔찍한 기억에 말이다.

눈을 감으면 검게 문드러진 칼리페시의 몸이 보이고, 숨을 쉬면 살이 썩어 나는 악취가 나고, 알 수 없는 말을 중얼대는 쇳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망할 여름이라, 쓰레기 같은 내 자매가 자주 생각난 탓이지. 오랜만에 황녀라고 불리니 끔찍했던 그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 든 탓이다. 그러니까 이 미친 망상을 그만둬야 하는데.’

그러나 말도 안 되는 생각은 좀처럼 멈추지 않았다. 불행히도 메르케시의 정신은 어느 때보다 또렷했다. 참혹했던 칼리페시의 마지막 모습을 선명히 그린 끝에, 메르케시가 천천히 눈을 떴다.

“정신이 좀 드십니까.”

끔찍한 황궁의 풍경 대신, 목소리만큼 무미건조한 맥 바인스의 얼굴이 보였다.

“……어떻게 된 거지.”

목이 마르다 못해 찢어진 듯했다. 메르케시가 반사적으로 눈가를 찌푸렸다.

“술을 드시다 갑자기 해변까지 뛰쳐나가셨습니다. 기억나지 않으십니까?”

“……그래, 어쩌면 좋아. 나도 늙었나 봐. 이제 전처럼 못 마시겠어.”

메르케시가 다시 눈을 감으며 중얼거렸다. 목소리엔 은근한 장난기가 배어 있었다.

“정신을 잃으신 시간은 아주 잠깐입니다. 의원이 곧 올 테니, 잠시 누워 계십시오.”

“그래. 자네밖에 없다니까.”

맥은 평소보다 묘하게 차분한 메르케시가 꺼림칙했지만, 그새 평소처럼 농담을 던지며 킬킬 웃는 그녀를 보고 내심 긴장을 풀었다.

잠시 후 메르케시는 그대로 다시 잠에 든 듯했다. 그녀의 기척이 수면에 빠진 상태와 비슷한 것을 느끼며, 맥은 메르케시가 겉잠에 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긴 정적을 깨고 메르케시가 불시에 중얼거렸다.

“이거 아무래도 죽을병에 걸린 것 같은데. 죽기 전에 내 딸이 보고 싶구나.”

“어렵습니다.”

갑작스러운 메르케시의 목소리에 맥은 속으로 크게 당황했지만 평소와 같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아무 짓도 안 해. 나는 어차피 아무 생각도 없는 쓰레기라고. 자네가 가장 잘 알잖아. 잠깐이면 돼. 멀리서 얼굴만 볼게.”

여전히 눈을 감은 메르케시가 간절한 투로 소곤거렸다. 그녀의 어린 딸은 디아시 가문의 도움을 받아 위고 신전의 보호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맥의 임무 중 하나는 메르케시가 제국에 들어가지 못하게 감시하는 것이었다.

“안 될 일입니다.”

맥이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엄하기까지 한 그의 음성에 메르케시가 숨을 죽이고 웃기 시작했다. 한참을 웃은 끝에 그녀가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흐흐. 그렇게 말할 것 같았어, 맥 바인스.”

흐리멍덩한 눈동자가 맥을 향했다. 그 말을 끝으로 맥의 정수리에 낙뢰가 떨어지듯, 새하얗다 못해 시퍼런 섬광이 떨어졌다.

다음 순간 메르케시와 맥이 머무르던 막사 틈으로 강렬한 빛이 새어 나와 반짝, 캄캄한 사위를 밝혔다.

“…….”

쓰러진 맥은 멀어지는 정신을 붙잡기 위해 노력했다.

‘방금,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뿌연 시야로 침상에 누워 있던 메르케시가 바닥에 발을 딛는 것이 보였다. 팔을 움직여 그녀의 발목을 붙잡으려 했으나 아무런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자네는 한결같아서 알기 쉬워.”

메르케시가 얕게 경련하는 맥의 손끝을 바라보며 무감하게 말했다.

“날 놓친 것을 너무 자책하지 마. 내 힘은 아무도 모르니까. 오래전에, 절대로 힘을 드러내지 않기로 약속했거든.”

칼리페시가 생전에 메르케시를 유난히 혐오한 이유는 자신보다 뭐든 재능이 넘쳤으나 동시에 아무런 의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그녀가 메르케시를 살려 둔 것은 어머니, 죽은 황후의 유언 때문이었다.

“황좌를 두고 나와 싸우고 싶지 않다면 힘을 숨겨. 그럼 어머니의 유언에 따라, 자매가 서로를 해치는 일은 없을 거야.”

어느 날 어린 칼리페시가 메르케시의 목을 조르며 말했다. 저 말은 결국 ‘힘을 들키면 나는 어쩔 수 없이 널 죽이겠다’라는 뜻이었다. 본능적으로 생명의 위협을 느낀 메르케시가 고개를 끄덕인 순간, 자매만의 비밀이 생겼다.

어린 시절을 더는 떠올리기 싫다는 듯 메르케시가 가볍게 고개를 털곤 쓰러진 맥을 지나쳤다.

“너무 걱정할 것 없어, 맥 바인스. 단지 확인할 게 있을 뿐이야. 확인만 할 거니까.”

맥에게 하는 말인지 스스로에게 하는 말인지 그녀도 알 수 없었다. 맥이 완전히 정신을 잃기 전, 막사의 천막을 반쯤 걷은 메르케시가 그에게 마지막 말을 남겼다.

“며칠 있으면 깨어날 수 있을 거야. 그럼, 날 잘 쫓아오게.”

그대로 막사가 즐비한 구역을 빠져나가던 메르케시가 우뚝 걸음을 멈췄다. 한 남자가 앞이 보이지 않는 듯 비틀대며 멀어지고 있는 것이 보였다.

한 걸음 뗄 때마다 엎어졌다 일어나길 반복하는 남자는 가노의 수하 중 한 명이었다. 막사에 숨어들었다 그녀의 공격에 휩쓸린 듯했다.

“……정말 눈치가 빠르다니까.”

메르케시가 코웃음을 쳤다. 가노가 제게 사람을 붙인 것은 알고 있었으나, 그 행동이 오늘따라 과감했다. 그녀는 계획을 조금 수정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동이 트자마자 이기오를 떠나는 선박에 조용히 몸을 실을 생각을 했던 그녀는 이기오 항구의 모든 정박선을 불태우기로 했다.

그날, 첫 번째로 출항을 알린 선박만이 이기오 섬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

메르케시는 갑판의 두꺼운 기둥 뒤에 숨어 불이 번지기 시작한 이기오 해변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등을 돌렸다. 타오르는 이기오 뒤로 동이 트기 시작했다. 붉은 바다와 하늘을 등지고 그녀는 가만 눈을 감았다.

메르케시는 검게 문드러져 가는 칼리페시를 홀로 지켜봤다. 역저주로 썩어 가며 발작하는 칼리페시를 더는 두고 볼 수가 없었다. 결국 유독 무더웠던 어느 날, 메르케시가 칼리페시를 죽였다.

칼리페시가 역저주를 앓기 시작한 후론 아무도 그녀에게 가까이 가지 않았기에, 그녀의 시체는 다시 오랫동안 방치됐다. 그러니, 칼리페시는 겨울에 죽지 않았다.

‘이 망상은 어떻게든 죄책감을 덜고 싶어서, 내가 미친 생각을 하는 것이어야 한다.’

오래된 죄책감을 가진 메르케시가 바다를 건너기 시작했다.

* * *

챙―.

찻잔과 잔 받침이 부딪치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언제나 완벽한 황실 예법을 구사하는 아드리네였지만 그녀는 오늘따라 실수가 많았다.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군요.”

그림 같은 미소를 지어 보인 아드리네가 전혀 부끄럽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황가의 사람은 사죄를 하지 않는 것이 미덕이었다.

그녀는 불안했다. 하나뿐인 자식, 빌리넌트의 성년식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런 때에 바그다트에 ‘그것’을 봉인하고 있다는 소식이 그녀에게 전해졌다.

닉스와 주말 기도. 온몸이 썩어 든 끝에 죽음을 맞이한 칼리페시. 아드리네는 애써 잊었던 충격적인 기억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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