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
“……그렇게 좋은가?”
또 다른 가게의 구석 자리에 나란히 앉아, 이번엔 메르케시가 똥 씹은 얼굴을 했다.
“저건 아직도 안 뒈졌군. 그냥 한 병 쭉 마시고 구석에 가서 처자라. 그게 낫겠어.”
연신 히죽이던 가노가 메르케시에게 정색하곤 독한 술이 담긴 병을 그녀 앞에 밀어 주었다. 헤벌쭉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메르케시는 가노에 대한 흥미가 팍 식는 기분을 느꼈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이사가 보낸 짤막한 서신이 뭐라고, 가노는 단숨에 평소의 자신만만한 그로 돌아왔다. 그는 슬슬 맥포이로 돌아가 아이사의 얼굴을 볼 생각을 했다. 망할 부군의 존재는 잊은 지 오래였다.
제대로 얼빠진 가노의 모습에 메르케시가 혀를 끌끌 찼다. 소문처럼 맥포이 가주가 정말 마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노의 말대로 오늘은 이만하고 독한 술로 마무리하는 게 나을 듯했다.
“이참에 독립을 하는 편이 낫지 않나?”
“그게 가능했으면 진작 했겠지.”
버럭 대던 가노가 담담하게 중얼거렸다. 몇 년 전 순정남으로 새로 태어난 그는 맹약이 아니더라도 몸도 마음도 아이사 맥포이의 노예였다.
답지 않게 차분한 그의 음성에 메르케시의 눈매가 가느다래졌다. 그녀는 가노의 진지함에 내심 놀라 하며 입꼬리를 늘어뜨렸다.
“……아하. 내가 너무 당연한 걸 물었구나.”
그 말을 끝으로 메르케시는 놀리는 것을 그만둔 모양인지 묵묵히 병나발을 불기 시작했다. 가노는 갑작스럽게 얌전해진 그녀를 경계하다가 결국 한마디 덧붙였다.
“아무튼, 넌 허튼 생각 말고 얌전히 이 섬에 있어. 죽을 때까지 여기 처박히는 것이 네게 가장 행복한 삶일지도 모르지. 언제나 술에 찌든 꼴을 보아 명줄이 길 것 같지도 않으니까.”
“어머, 말이 심하네. 하지만 네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어.”
메르케시를 괴롭힐 생각으로 부러 못된 말을 골랐으나 도통 통하지 않았다. 답답함을 느낀 가노가 술을 들이켰다. 입을 여는 족족 저 여자에게 말리고 있다는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제 그만 가지? 난 지금 기분이 좋고, 넌 너보다 우울한 사람에게서 즐거움을 찾잖아. 오늘은 어째 평소보다 더 끈질기군.”
결국 가노는 항복을 선언하듯, 드물게 회유를 선택했다. 간만에 되찾은 이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메르케시가 흐리멍덩한 눈을 느리게 껌뻑였다.
“……솔직히 그대가 근육 키우는 방법만 아는 바보인 줄 알았거든? 그런데 눈치가 상당히 좋은걸. 그래서 그 성품을 가지고도 너의 ‘그분’ 옆에 있을 수 있는 건가?”
그러나 항시 취해 있는 메르케시는 강적이 분명했다. 가노는 그녀에게 다시 말을 붙인 자신의 어리석음을 저주했다. 그가 치를 떨며 그녀에게서 한 칸 멀리 떨어져 앉았다.
“아하하, 같이 술잔을 기울여 주지도 않는가? 네 말처럼 오늘은, 정말 우울한데.”
“꺼져.”
“곧 사랑하는 ‘내 언니의 기일’이란 말이야.”
마치 이래도 네가 나와 술을 마시지 않을 테냐, 라는 뉘앙스였다.
“나는 그래서 여름이 싫어.”
메르케시가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뒷말을 속닥였다. 뜬금없는 이야기에 가노의 두꺼운 눈썹이 가파르게 올라갔다.
“……뭐? 이게 입만 열면―.”
“됐네. 역시 악명 높은 해적은 해적이라 이거군! 매정해라!”
가노가 짜증스럽게 대꾸하려 하자, 메르케시가 큰 소리로 너스레를 떨며 그의 말을 잘라 버렸다. 가게에 들어찬 손님들의 시선이 힐끗힐끗 두 사람을 향하는 듯했다.
“네 자매가 죽은 건 겨울이 시작될 쯤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도 있나?”
주변을 의식한 가노가 한껏 목소리를 낮췄다. 그리고 사랑하는 언니라니. 메르케시는 입만 열면 반이 거짓말이었다.
가노는 주로 선박을 이용한 무역과 정보를 모으는 일을 했다. 그는 칼리페시가 생전에 메르케시를 구박하고 학대한 사실과, 자매 사이가 주인과 종보다 못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칼리페시는 매사 어리숙하게 구는 메르케시를 수치스러워했고 자주 찾아가 화풀이를 했다. 가노가 알기로 둘의 교류는 그뿐이었다.
그게 다인 것을 뻔히 아는데. 사랑은 얼어 죽을, 슬플 것이 있을까? 오히려 그 죽음을 반겼다는 쪽이 더 믿음이 갈 듯싶다.
또한 가노는 망국 왕의 사생아였다. 왕관을 차지하기 위해 그 형제들이 서로 원수가 되는 일은 필연이라는 걸 몸소 겪기도 했다.
그때 메르케시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기분 나쁘게 히죽거리기 시작했다.
“흐흐……. 아닌데. 그녀는 이맘때 죽었는데.”
순간 가노는 굉장히 꺼림칙한 기분을 느꼈다.
“아―, 재미없어. 이제 네 멋대로 하렴. 난 네 소원대로 혼자 술이나 마실 테니.”
뚝, 웃음을 멈춘 메르케시가 더 말해 줄 생각이 없다는 듯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짐승 같은 촉이 가노에게 경고를 보냈다. 그녀가 단순히 취해서 헛소리를 하는 게 아니라는 감이 들었다.
“……넌 도대체가 꿈이나 야망은커녕 아무 생각도 안 하고 사는 것 같아. 보고 있으면 나까지 무기력해지는 기분이야.”
가노가 메르케시를 주시하며 운을 뗐다. 당장 이 찝찝한 간극을 어떻게든 좁힐 생각이었다. 다행히 기분 좋게 취한 메르케시는 곧바로 대화에 응했다.
“싸우자는 거니? 하지만 이번에도 맞았어. 그대는 정말 눈치가 좋구나?”
“그래서 욕심 많은 네 언니가 널 살려 뒀나? 적어도 앞길에 방해될 것 같진 않아서?”
가노가 가차 없이 메르케시의 허를 찔렀다. 그러자 잘만 떠들던 그녀가 처음으로 입을 닫았다. 무섭게 굳은 그녀의 얼굴은 아까와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다.
“네 언니가 새어머니와 배다른 동생을 죽일 듯이 괴롭혔단 사실은 그다지 비밀도 아니지. 너라고 예외는 아니었고.”
“…….”
“그럼에도 아직도 그녀를 추억하는 건 무슨 괴상한 취미인지.”
메르케시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지만 가노는 멈추지 않았다.
“죽일 듯이 괴롭혔어도, 정말 죽이진 않았으니 고맙기라도 한 건가? 그렇다면 세상에서 가장 미련한데.”
길게 침묵한 끝에 메르케시가 입을 열었다.
“……고맙기는. 그녀의 방에선 일주일에 한 번꼴로 사람이 죽어 나왔는걸. 도대체 몇 사람의 인생을 망쳤는지 셀 수 없을 거야. 그러니, 그녀는 죽어도 싸.”
메르케시는 혼자 과거로 돌아간 듯이, 멍한 얼굴로 계속 중얼거렸다.
“죽어야 마땅한 사람이 있다면 내 언니였을 거야. 그녀가 날 살려 둔 건, 글쎄. 그게 고마운가. 그건 그저…….”
넋이 나간 듯한 그녀의 모습에 가노는 칼리페시와 메르케시 사이에 뭔가가 더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 그가 메르케시의 목소리에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러나 한참 입술만 달싹이던 메르케시는 맥없이 입을 닫아 버렸다.
“아, 이제 그만. 재수 없는 말을 해서는. 토할 것 같구나.”
그녀는 정말 속이 안 좋은 사람처럼 오만상을 찌푸리며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술을 어지간히 마셨으니 그럴 만도 했다.
‘저 입으로 직접 듣긴 틀렸군. 하여튼 뭐든 쉽게 가는 일이 없다니까.’
가노는 속으로 혀를 차며 메르케시에게 정보를 얻는 것을 빠르게 포기했다. 그의 감은 잘 맞는 편이었으나, 애초에 그녀가 헛소리를 했을 확률이 컸다.
온 세상 사람들이 알기로 칼리페시는 겨울에 죽었다. 메르케시는 항시 술에 찌들어 있으니 충분히 기일을 착각했을 수 있다.
무엇보다 칼리페시가 죽은 지는 10년도 더 됐다. 메르케시는 그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는 엮이고 싶지 않다는 듯이 황가와 관련된 모든 인연을 끊지 않았나.
가노가 팽팽 머리를 굴렸다. 저 여자가 맥포이와 롬닥에 해를 끼칠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 그는 한동안 날카로운 눈으로 테이블에 이마를 박은 메르케시를 노려봤다.
‘저 무기력한 인간이 이제 와서 혼자 뭘 하겠냐 만은 한동안 지켜보는 게 낫겠군. 하여간 온 세상이 방해하는 기분이야.’
빠르게 생각을 정리한 끝에 가노는 결국 해가 뜨자마자 맥포이로 돌아가려던 계획을 철회했다. 잠든 줄 알았던 메르케시가 스멀스멀 상체를 일으킨 것이 그때였다.
고개를 푹 숙인 탓에 산발이 된 기다란 머리카락이 메르케시의 얼굴을 가렸다. 덕분에 그녀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자세히 보니 메르케시는 미묘하게 몸을 떨고 있었다. 가노의 미간이 급격히 좁아 들고, 그가 메르케시의 상태를 채 파악하기도 전에 그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토, 토할 것 같…….”
우두커니 선 메르케시가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뭐…….”
바짝 긴장했던 가노는 순간 맥이 탁 풀리는 것을 느꼈다. 그사이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메르케시가 주정뱅이들을 거칠게 밀치곤 가게 뒷문을 향해 허우적대며 달려 나갔다. 네 발로 굴러가는 모양새에 가까웠다.
“허……. 뭐 저딴, 저딴 게 다 있지?”
가노는 그녀가 뛰쳐나간 뒷문을 멀거니 바라보다가 피곤하다는 듯이 눈가를 쓸었다. 순간 긴장했던 것이 무색하게 단순히 주사를 부린 모양이었다.
가게 뒷문은 해변의 모래사장으로 이어졌다. 동틀 때까지 운영하는 가게가 즐비한 섬의 중앙부면 모를까, 그 외에 이기오의 한밤중은 캄캄했다.
“메르케시는 아직 죽으면 안 돼.”
“아오, 진짜.”
뒷문을 노려보던 가노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함께 술잔을 기울인 사이도 뭣도 아니었으나 가노에게 맥포이 가주의 명령은 절대적이었고, 그는 누구보다 일 처리가 확실한 편이었다. ‘설마, 괜찮겠지’란 그의 사전에 없었다.
가노가 누구보다 의욕이 없는 표정으로 사라진 메르케시를 찾기 위해 뒷문을 밟았다. 그 순간, 누군가 바람처럼 그를 스쳐 갔다.
동시에 날 선 시선과 부딪혔다. 가노는 건조한 겨울 산에 사는 회갈색 늑대와 눈이 마주친 기분을 느꼈다. 찰나였지만, 한순간 살기가 오가 그 시간이 길게 느껴졌다.
‘디아시.’
동부 기사 특유의 서늘한 기운을 감지한 가노의 동공이 좁아 들었다. 메르케시를 호위하고 있는 사람은 역시나 디아시 기사인 모양이었다. 절대 모습을 보이지 않던 디아시의 기사는 더는 메르케시를 자극하지 말라는 듯이 그에게 경고의 시선을 보냈다.
가노는 가게에서 새어 나오는 샛노란 불빛을 등지고 서서, 가벼운 동작으로 자신을 제친 디아시 기사와 메르케시의 뒷모습을 가만히 응시했다.
뭐라 콕 집어서 설명할 순 없지만 다시 한번, 좋지 않은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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