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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데드 엔딩 후에-114화 (114/139)

114.

나는 가노가 보냈다는 탄신 선물을 바라보며 살며시 인상을 썼다.

“알아보시겠습니까?”

내 표정을 살피던 에리카가 물었다.

“이걸……. 어떻게 못 알아보겠나.”

이 단도를 잊을 수 있을 리가. 핏자국이 눌어붙은 이 낡아 빠진 단도는 나와 가노의 관계에서 커다란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이 단도는 오래전, 맥포이에게 입은 은혜를 잊지 않고 작은 도움을 주기 위해 찾아온 가노에게 사기를 칠 때 써먹은 것이었다. 그날 그는 맹랑한 열다섯 살 가주의 꾀에 넘어가 세상에서 가장 불합리한 맹약을 맺었다.

그와 내가 맺은 맹약은 신관의 판단하에 이행되는 정상적인 것이 아니었다. 어기면 즉시 목숨이 빼앗기는, 서로의 피로 맺어야 하는 맹약이었고 지금은 제국에서 금지된 것이었다. 메헤라의 힘을 이용했다 뿐이지 실은 저주와 다를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가노는 그놈의 의리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맥포이에 왔다 내게 속아 노예 계약과 다름없는 불법적인 맹약을 맺게 된 것이다.

내게 속아 단도에 피를 묻힌 가노는 내가 스스로 손바닥을 긋는 순간 뒤늦게 모든 상황을 이해했다. 그는 한발 늦게 손을 뻗어 서로의 피가 덕지덕지 묻은 단도를 빼앗았고, 당장 내 목에 찔러 넣으려 했다.

하지만 불행히 그는 이미 내 손끝 하나 다치게 할 수 없는 몸이 되어 있었다. 사실을 깨달은 가노는 당연히, 어마어마하게 분노했다. 그는 내게 저주를 퍼붓듯이 악을 썼다.

“맹세하지. 언젠간 이 개같은 맹약을 반드시 깨 주겠다. 그날, 이 단도로 네 목을 따 줄게. 반드시, 죽여 줄게. 이 손으로.”

대단한 살의였다. 얼마나 화가 났는지 눈알의 핏줄이 죄다 터져 악을 쓰는 가노의 모습에, 당시 고작 열다섯 살이었던 나는 속으로 매우 졸았었다.

“그래, 얼마든지. 어디 그 단도로 내 목을 따 봐. 네가 ‘깰 수 없는 맹약’을 깰 수 있다면 말이야!”

하지만 나는 손바닥에 철철 피를 흘리면서 지지 않고 소리를 질렀다. 당시에 나는 눈에 뵈는 게 없었기 때문이다.

“악! 이 미친 계집애가 진짜!”

“소리 다 질렀나? 하지만 내 손을 잡은 것을 절대 후회하지 않을 거야. 해적질만 하고 살 생각은 아니었잖아? 내가 널 어느 왕 못지 않게 만들어 준다고.”

지지 않고 큰소리치는 나를 보고 가노는 말 그대로 뒷목을 잡았다.

결국 울부짖는 듯한 기다란 고함 끝에 그는 마찬가지로 피가 흐르는 손으로 협상 테이블에 단도를 내리꽂고, 그대로 테이블을 뒤집어엎어 버렸다. 말로만 듣던 책상 뒤엎기를 실제로 목격한 날이 바로 그날이었다.

그러니 가노와 첫 만남과 이 단도는 잊으려야 잊을 수 없었다.

이후 내가 큰소리친 것처럼, 나와 손을 잡은 결과가 막대한 부로 돌아왔음에도 가노는 맹약 깨는 방법을 찾는 것을 좀처럼 포기하지 않았다. 또한 스스로에게 한 맹세를 잊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처럼 단도를 버리지 않고 품에 지니고 다녔다.

시간이 흘러 나의 이익이 가노의 이득인 것이 확실해지고, 은근히 서로 쿵짝이 잘 맞는 구석이 있어서인지 언제부턴가 그와 나는 묘하게 한 가족 같은 분위기가 났다.

이쯤부터 가노는 나를 맹랑한 어린 계집애로 여기지 않고 동업자로 받아들이기 시작했을 것이다. 함께 상단을 키우며 전우애가 생기고, 세월이 쌓인 만큼 정이 들 수밖에.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맹약을 깨는 방법을 찾았으며 품에는 언제나 그 단도가 있었다. 시간이 조금 더 흐른 뒤, 급기야 내게 끈적한 시선을 보내고 치대면서도 그는 여전했다.

나는 그런 그에게 섭섭함을 느끼지 않았다. 가노는 누구보다 자유로운 사람이었으니, 그가 여전히 맹약을 파기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에 서운함을 느낀다면 양심에 털 난 것이라는 정도야 나도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와 맺은 맹약은 노예 계약만 못한 것이 사실이었다.

약간의 변명을 해 보자면 가노와 처음 거래할 당시 나는 그를 완벽히 통제할 힘이 없었고, 그는 ‘해적’이었다.

세상은 잔인했으니 대가 없는 호의는 없었다. 가노 역시 도움을 주러 맥포이에 왔지만 자신의 이득을 챙기는 것이 먼저였다.

가만 손 놓고 있다가 해적에게 가문을 저당 잡힐 수 없었다. 금기된 맹약은 어린 가주가 할 수 있는 가장 치사하고 강력한 선제공격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니 나는 그에게 사기 친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미안함도 섭섭함도 염치없는 감정이 분명했다.

어쨌건 어느 순간부터 가노가 보여 준 맹목적인 호의에 최근 몇 년 긴장을 놓았던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인지 그가 탄신 연회 기간에 맥포이에 방문하지 않았다는 것은 새삼 충격이 컸다.

가노의 의리를 높게 샀지만 그는 감정적인 구석이 있었다. 처음처럼 적대적인 관계로 돌아갈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었다. 속으로 그런 계산을 하면서, 스스로가 끔찍이 이기적이라는 사실에 새삼스레 자괴감을 느껴야 했다.

‘그런데 그 걱정이 무색하게 단도를 돌려줄 줄이야.’

그에게 단도를 돌려받은 기분을 표현하자면, 난생처음 기사에게 맹세를 받았을 때와 비슷할 것이다.

“하!”

나는 연신 헛웃음을 뱉으며 단도를 들어 이리저리 살폈다. 녹이 슨 단도는 보기엔 아담해도 살상용이라 위험한 물건이었다. 지켜보던 사용인들이 안절부절못했다.

“가노답지 않게 고상한 방식을 썼군. 누군가 조언을 해 줬나?”

그러거나 말거나 선물이 마음에 든 나는 단도를 손에서 놓지 않고 중얼거렸다.

“글쎄요. 그래도 가노 님은 은근히 섬세하고 낭만적인 구석이 있으니까요. 그분이 배를 타기 시작한 것도 그놈의 낭만 때문이 아니던가요.”

에리카의 신랄한 분석에 나는 재차 하하, 소리 내어 웃었다.

“내가 운이 더럽게 없는 사람인 것은 맞는데. 그게 다 인복이 있어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그는…… 나보다 언제나 어른이군.”

가노는 내 말투를 버려 놓은 장본인이긴 했지만, 나는 그에게 많은 것을 배웠다. 치사한 세상에서 살아남는 법이라든가.

“사람 보는 눈이 정확하신 편이죠.”

“가노가 비록 싸가지가 없지만 내게 없는 ‘의리’가 있지.”

“무식하게 ‘사내의 의리’ 타령을 하는 것은 또 흠이지만요.”

“자네는 가노에게 언제나 박해.”

“대부분 무례하게 구는 것은 사실이지 않습니까.”

“깃펜과 종이를 가져와라. 가노가 내게 신의를 보여 주었으니 직접 답신을 써야 맞지.”

“예, 가주님.”

에리카가 드물게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쌀쌀맞게 말하면서도 그녀 역시 가노가 보내온 선물이 퍽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 * *

ㅎㅂㄹㄱ.공금

“이야, 그래서 정말 생일 선물로 단도를 보냈다고?”

우수에 젖은 눈으로 수평선을 바라보며 술잔을 기울이던 가노가 결국 살기 어린 얼굴로 옆자리를 돌아봤다. 몇 시간째 옆에서 속을 긁는 목소리를 무시하고 또 무시해 봤지만 한계였다.

“하……. 그건 또 어디서……. 제발 내게 관심 좀 끊어, 이 주정뱅이야. 사라지라고. 꺼지라고.”

가노가 단단히 질렸다는 듯이 중얼거리자, 메르케시가 드디어 돌아온 대답에 화색을 띠었다. 밝아지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 가노는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을 느꼈다.

“드디어 대답을 해 주네. 역시 그 여자 이야기를 해야 반응하는구나.”

“혹시 내가 지금 왕국어를 하고 있나? 분명 제국어로 말하고 있잖아. 미쳤다더니 제국어도 잊은 거야? 아닌데. 분명 말은 하고 있잖아, 젠장.”

가노가 기가 차다 못해 혼란스러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메르케시는 그런 그의 반응에 더욱 신나 했다.

“아하하! 지금 이기오에 소문이 파다해. 사랑하는 여자에게 생일 선물로 녹슨 단도를 보낸 멍청한 놈이 있다고. 하지만 물론 그냥 단도는 아니겠지? 그 단도가 도대체 뭔데?”

“너만! 네 그 가벼운 주둥이만 하는 소리겠지! 이 새끼들은 일 처리를 어떻게 하길래 내용물을 이런 거한테 들키는……. 하, 제발 꺼져! 아니면, 내게 정말 관심이라도 있는 건가?”

“……저런. 그대 혹시 자의식 과잉이란 말을 자주 듣지 않나?”

“……!”

가노는 실제로 일전에 아이사에게 그 비슷한 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다. 아니, 저 단어 그대로였던가. 그의 얼굴이 보기 좋게 구겨지고 메르케시가 흐응, 하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술병을 깰 것처럼 손아귀에 힘을 준 가노가 결국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거친 발걸음으로 가게를 나섰다. 메르케시가 없는 곳이면 어디든 좋을 것 같았다.

그러나 이미 얼큰하게 취한 듯한 메르케시는 가노를 쫄래쫄래 따라오며 입을 쉬지 않았다. 가노의 부관 퍼시는 호위로서 그의 뒤를 따르면서 불안한 눈으로 그런 메르케시와 제 대장을 번갈아 봤다. 퍼시가 목소리를 낮추며 가노에게 소곤거렸다.

“저 미친 여자가 대장님께 정말 마음이 있는 거 아닐까요?”

하지만 가노는 싸늘하게 표정을 굳힐 뿐이었다. 그의 걸음이 아까보다 조금 더 빨라졌다.

‘마음이 있어? 차라리 그런 거라면 낫겠군.’

가노는 메르케시가 정말 자신을 좋아한다고 생각해서 제게 마음이 있냐고 물은 것이 아니었다. 그저 그녀의 속을 긁기 위해 한 말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짐승 같은 촉과 대단한 눈치를 자랑했다. 메르케시가 제게 마음이 있기는 개뿔이. 저 미친 여자는 그저, 자신이 재밌어서 따라다니는 것뿐이었다.

가노가 보기에 메르케시는 항시 취해 있는 술 중독자였으며, 하루살이였다. 인생이 너무나 지루해서 어떻게든 하루를 살아가기 위해 자극을 찾는 사람이라서, 온갖 자극을 쫓아 불나방처럼 퍼덕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극상의 자극이 있다는 오기아에 왔을 테고 어쩌다 보니 가장 재밌어 보이는 것이 실연을 당한 자존심 강한 해적이었을 뿐이다.

가노는 순간 저걸 그냥 죽이면 안 되나, 하는 살벌한 생각을 했다.

“명심해. 메르케시는 아직 죽으면 안 돼. 빌리넌트가 버리는 패가 되었을 때는 그녀가 황제가 되어야 할지도 몰라. 자네도 알다시피 황가의 이름이 바뀌면 대귀족의 사정은 곤란해지기 마련이거든.”

하지만 이어 아이사의 당부가 떠올랐다. 가노는 답답한 마음에 거칠게 뒷머리를 헤집었다. 말단 단원이 헐레벌떡 그를 찾은 것이 그때였다.

“대장! 대장님! 답신! 그분으로부터, 답신입니다!”

아이사 맥포이로부터 답신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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