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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데드 엔딩 후에-113화 (113/139)

113.

노마는 대단한 절제력을 발휘해 한 뼘, 겨우 어깨선과 가슴골이 드러날 정도로만 실밥을 뜯어냈다. 오늘만 같은 드레스를 두 번 망친 셈이었다. 와중에 두 번째라고 이번엔 힘 조절이 능숙했다.

바깥에 노출된 적이 없던 속살이 아슬아슬하게 드러났다. 쇄골을 빨아올리던 그의 입술이 자연스럽게 아래로, 아래로 내려갔다.

노마의 어깨를 붙들고 있던 내 손은 허공을 몇 번 허우적댄 끝에 그의 머리통에 닿았다. 급한 대로 그의 머리칼을 약하게 쥐고 봤다. 손끝에 닿는 감각이 무척이나 보드라워서 차마 꽉 쥘 수는 없었다.

시선을 내리자 눈을 내리깐 그가 봉긋한 살을 빨아올린 끝에 약하게 깨무는 것이 보였다.

“아!”

난잡한 움직임에 나는 반사적으로 허리를 들썩이고 말았다. 숨구멍을 찾는 사람처럼 절박하게 턱을 치켜들고 사지를 파들거렸다.

다음 순간 노마가 겨드랑이 안으로 팔을 집어넣으며 나를 안아 올렸다. 순식간에 시야가 뒤집어지고 눈을 한 번 깜빡이면, 어느새 그의 허벅지를 깔고 앉은 채였다.

“…….”

몽롱한 기분에 휩싸여 코앞에 있는 노마의 얼굴을 바라봤다. 예쁘게 넘겼던 그의 머리칼은 어느새 잔뜩 흐트러져 있었다. 시각적 자극에 현기증에 가까운 아득함이 느껴졌다.

나도 모르게 충동적으로 손을 움직여 그의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그새 팔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우습게도 손끝이 덜덜 떨렸다.

“아…….”

탄성에 가까운 신음이 막을 새 없이 흘러나왔다. 엉덩이 아래에 단단한 것이 움찔거리는 게 적나라하게 느껴진 탓이었다. 옷가지에 묻혀 있는데도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약하게 박동하는 감각이 노골적이었다.

아, 나는 그게 무엇인지 알았고 또다시 강렬한 충동이 들었다. 이번엔 아래로, 손을 뻗고 싶다는.

갑자기 열이 확 몰리면서 마침내 정말 위험한 기분이 들었다. 반사적으로 몸이 바짝 조이며 나도 모르게 품위 없이 허리와 엉덩이를 들썩이고 말았다.

같은 순간 노마가 참기 어렵다는 듯이 눈가를 찌푸렸다. 그러곤 마치 그대로 먹어 치우려는 것처럼 내게 달려들었다. 나의 입술, 어깨, 허리는 힘없이 뒤로 밀려 넘어갔다.

분위기에 단단히 취한 나머지, 우리가 뒤엉켜 있는 곳이 가냘픈 나룻배 위라는 것도 잊고 말이다. 거친 움직임에 불안불안하던 나룻배가 크게 옆으로 기울었다.

세상에.

“…….”

끼익― 끼익― 끼익―.

고요한 적막 속에 한동안 나룻배가 다시 중심을 잡는 소리만 울렸다.

워낙 순식간이라 어떻게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하마터면 조각배가 뒤집힐 뻔했고 노마가 가까스로 중심을 잡았다는 사실만 알 수 있었다.

나는 직전의 아찔함과 결이 다른 느낌으로 놀라 그의 가슴팍에 안긴 채 눈을 깜빡였다. 노마의 심장이 어느 때보다 빠르게 뛰는 것으로 보아 그 역시 많이 놀란 듯했다.

그러나 한번 붙은 불은 쉽게 꺼지는 것이 아니었다.

“여, 역시 여기선 안 되겠죠?”

내가 정신 나간 사람처럼 지껄이자 틈 없이 맞닿은 탓에 그의 몸이 아까보다 딱딱하게 굳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엉덩이 아래, 그의 허벅지 부근이 더 부푸는 듯한 착각이 들어 마른침을 삼켰다.

“그런데 내가 조금…… 급한데. 그냥, 저기나 저기. 아무 데나 가서―.”

조바심이 극에 달한 나는 대담하게 가까운 풀숲을 힐끗 쳐다보며 계속해서 중얼댔다.

“아이사.”

그가 웬일로 내 말허리를 잘랐다. 무섭도록 가라앉은 노마의 목소리에 순간 귓불을 타고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덕분에 내가 얼마나 변태 같은 말을 뱉었는지 깨달았다.

“아마 당신보다 제가 더 급할 테지만, 밖은, 밖은 너무 지저분하니.”

지독한 수치심에 정신을 못 차리는데 그의 말은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위험한 음성과 다르게 노마가 촌스럽게 말을 더듬었다. 버벅대며 고개를 치켜드니, 시뻘겋게 달아오른 그의 목덜미와 얼굴이 보였다.

그제야 내 허리를 감싼 그의 팔이 말도 안 되게 떨리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노마가 서서히 팔에 힘을 풀었다. 그러곤 손을 뻗어 아무렇게나 던져둔 망토를 주섬주섬 집어다 나를 꽁꽁 싸매기 시작했다.

“그러니 제가 최대한 빨리, 침실까지 날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

“꽉 잡아 주세요.”

그가 이렇게까지 흥분한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았다. 나는 오늘 또 새로운 충격을 느끼며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고 축축한 입술만 달싹였다.

그저 붉게 타는 노마의 얼굴을 홀린 듯 바라보다, 딱 눈앞의 그만큼 열이 오르는 걸 느끼며 그의 목을 꽉 끌어안을 뿐이었다.

* * *

할 수만 있다면 계속 자고 싶었으나, 문득 잠이 깨고 난 후엔 다시 잠들 수 없었다.

“씨…….”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렸다. 거친 소리가 절로 나왔다.

노마는 매일, 내가 눈을 뜨기 전에 언제나 내 몸을 살뜰히 씻기고 아픔을 느낄 새 없이 회복시켜 놓았다. 덕분에 나는 첫날밤 이후 미묘한 피로감 말고 고통을 느낀 적이 없었다.

그러니 첫날밤에 개꿈을 꾸다 잠깐 눈을 떴을 때 느꼈던 어마어마한 근육통과 생경한 아릿함을 또다시 겪게 될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평소에 몸을 이렇게 혹사하고 있었다는 말인가?

잠이 완전히 깨며 감각은 더욱 선명해졌다. 뚜렷한 통각을 느끼고 있자니 끝을 모르는 무자비한 남자에 대한 원망이 스멀스멀 차올랐다.

성력의 위대함을 뼈저리게 느끼며 천천히 눈을 떴다. 날 이 모양으로 만든 원흉을 찾기 위함이었다. 보자마자 그의 어깨나 팔뚝을 앙 물어뜯어 버릴 생각이었는데.

“…….”

그럴 수 없었다.

코가 닿을 거리에서 노마가 곤히 자고 있었다. 유독 허리가 무거웠던 이유는 그가 내 허리에 팔을 느슨하게 두르고 있었기 때문인 듯했다.

‘세상에 천사가 자고 있네’ 하는 주접도 잠시였다. 나는 놀라움을 느끼며 숨을 죽였다.

‘자고 있다니.’

사람이라면 자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노마 디아시가 자고 있다니. 그것도 곤하게!

그를 안 지 어언 사계절 한 바퀴. 그와 한 침대에서 자기 시작한 것도 벌써 두 달. 나는 그가 잠든 모습을 처음 봤다. 물론 눈을 감고 가만 누워 있는 모습은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아예 잠을 자지 않는 듯, 언제나 나보다 먼저 일어났다. 그 덕에 내가 잠에서 깨어나 가장 먼저 보는 것은 대부분 잠자는 내 얼굴을 구경하고 있는 초롱초롱한 금안이었다.

‘정말 자는 거지? 이게 웬일이람. 어제 술 조금 마셨다고 이러는 건가?’

눈 뜬 노마 또한 대단하긴 했지만, 그가 깊이 잠든 모습은 희귀하다는 점에서 아주 특별했다. 당장 화가를 불러다가 이 장면을 남겨야 하나 고민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나는 그 계획을 빠르게 철회했다.

그는 아주 예민했기 때문에 내가 여기서 조금만 움직여도 분명히 잠에서 깰 것이다. 유난을 떨며 화가를 부르는 대신 나는 더욱 숨을 죽였다. 절로 나오던 욕설은 자연스럽게 목구멍 뒤로 넘어가고, 통증은 잠시 잊혀졌다.

‘술은, 절대 밖에서 못 마시게 해야겠군. 아주 가끔 내 앞에서만 마시게 해야겠어. 밖에 내놨다간 정말 큰일 나겠다. 하여간 손이 많이 간다니까.’

진귀한 장면을 조금이라도 더 눈에 담기 위해 아픔도 잊고 열심히 눈알을 굴렸다.

‘속눈썹이 참 기네.’

촘촘하게 박혀 있는 기다란 속눈썹이 가지런하게 내리깔린 것이 유독 유혹적으로 보였다. 그가 이대로 깨는 것이 아까웠으나 한 번만 만져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할 때였다.

똑똑, 누군가 침실 문을 두드리는 게 아닌가.

안 돼! 하고 속으로 외친 순간 그의 눈꺼풀이 움찔거렸다. 깬 것이 분명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저 속눈썹을 만져 봤지. 겁도 없이 가주 부부의 침실 문을 두드린 자가 누군지 몰라도 가만두지 않으리라.

자리에서 일어나기 위해 몸을 들썩이기 무섭게 노마가 눈을 뜨고 말았다. 아차, 싶은 순간 몽롱한 눈을 한 그가 허리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줬다.

“아이사. 어디, 가십니까.”

그가 꿈을 꾸는 듯 푹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동시에 똑똑, 불청객이 재차 문을 두드렸다.

“다시 자고 있어요. 금방 올 테니.”

급한 대로 노마에게 속삭이곤, 불청객을 혼쭐내기 위해 그의 팔을 잡아 조심스럽게 떼어 냈다. 다급하게 붙잡은 것치고 그의 팔은 의외로 간단하게 떨어졌다.

그러나 나는 바닥을 디딘 순간 꼴사납게 다리에 힘이 풀릴 뻔한 것에 한 번 놀라고, 아직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는 나신이라는 점에 두 번 놀라고 말았다.

‘젠장할. 이게 뭐람.’

식겁해서 가장 가까이에 있는 천 쪼가리를 집어다 있는 대로 몸을 꽁꽁 싸매고 봤다. 이불을 끌어다 훤히 드러난 노마의 상체를 가리고 반투명한 침대 휘장을 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고 나서야 여태 똑똑, 규칙적으로 문을 두드리고 있는 불청객을 향해 움직일 수 있었다. 한 걸음 뗄 때마다 신체 마디마디가 비명을 지르는 듯했다.

이를 악물고 문을 여니, 역시나 에리카가 서 있었다. 나는 불청객이 높은 확률로 에리카일 것을 알았지만, 그녀는 내가 나올 거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람처럼 드물게 놀란 표정을 했다.

“가주님이 웬일이십니까?”

“자네가 두드렸잖아. 오늘은 오전 집무를 빼라고 했을 텐데.”

간밤에 죄다 쉬어 버린 목소리가 새삼 걸걸했다. 다소 머쓱했지만 나는 그런 때일수록 더욱 당당하게 나갔다.

“여느 때처럼 부군께서 여실 줄 알았죠. 그리고 이미 정오입니다, 가주님.”

“정오라고?”

“예. 부군께서도 여태 주무신 겁니까? 별일이군요.”

에리카의 말대로였다. 잠 못 이루던 별 가루 인간은 숙면을 취한 것도 모자라 늦잠을 잔 것이다.

“……누구 보좌관 때문에 다 깼다.”

“송구합니다. 하지만 어젯밤에 두 분이 성을 발칵 뒤집어 놓으셨으니 이제 그만 수습하러 가셔야죠.”

에리카가 하나도 송구하지 않은 말투로 대답했다. 당당한 태도를 고수하던 나는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글렌이 울부짖는 소리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도그만 경은?”

나는 목을 쭉 빼 복도를 좌우로 살피며 글렌의 행방을 물었다.

“도그만 경이라면 어젯밤 일로 충격이 큰 모양인지 자리보전했습니다. 너그럽게 이해해 주십시오.”

“……약이라도 지어 보내라.”

“예, 가주님. 그럼 또다시 송구하지만, 어쩔 수 없이 오찬도 생략하셔야겠습니다. 어제 다 못 보신 탄신 선물과 서신이 많아서요. 준비를 끝내시면 바로 집무실로 모시겠습니다.”

에리카의 말에 나도 모르게 뒤를 돌아 반투명한 휘장에 비치는 인영을 응시했다.

“……뭐든 참아 주십시오, 가주님.”

내 뒤통수가 퍽 미련이 넘쳐 보였는지 에리카가 간곡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 생각도 안 했다. 대신, 조금만 기다려라. 금방 나올 테니.”

사람을 뭘로 보는지. 에리카가 영 못 미더운 눈초리로 쳐다봤지만, 나는 가볍게 그녀를 무시하고 도로 문을 닫아 버렸다.

그녀에게 말한 대로 뭘 더 할 생각은 없었다. 어기적거리며 침대에 돌아가니 내가 엉망으로 덮어 놓은 이불에 파묻혀 반쯤 졸고 있는 노마가 보였다.

이토록 무방비한 노마라니, 볼수록 신기한 광경이었다. 와중에 눈이 마주치자 그는 잠결에도 나를 향해 사르르 웃었다. 없던 생각이 생기는 기분을 느끼며 천천히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잘 잤습니까?”

“네…….”

“잘했네. 그거 마셨다고 숙취가 있는 모양이네요. 말해 놓을 테니 당신은 좀 더 누워 있어요. 난 이만 집무실에 가야 해서.”

내 말을 듣고 있긴 한지, 그가 느리게 팔을 뻗어 내 손을 가져갔다. 그러곤 손바닥에 천천히 얼굴을 묻어 왔다. 마치 가지 말라고 하는 것 같아 나는 속으로 흐흐, 변태처럼 웃음을 흘렸다.

숙취가 한몫을 했겠지만 노마는 어느 때보다 느슨하고 편해 보였다. 이게 뭐라고 그가 기특해 보이고 안심이 되는지 모르겠다.

문득, 나만 정신 똑바로 차리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간질간질한 기분을 느끼며 남은 손으로 그의 머리칼을 조심스럽게 쓸어 넘겼다. 아, 요즘의 나는 말도 안 되게 기분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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