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
그것을 시작으로, 그는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이 아닌 듯 중얼중얼 사랑을 외기 시작했다.
사랑해요, 사랑해요. 그 목소리는 마치 기분 좋은 꿈을 꾸는 사람이 잠꼬대를 하는 것과 비슷했으며, 내게 주문을 거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눈을 감고 노마의 목소리를 가만 들으며 기꺼이 그의 계략에 빠져들었다.
더위가 한풀 꺾인 밤공기 덕분에 기분이 좋았다. 그의 체온과 목소리, 무게를 느끼고 있으니 나 역시 그에게 사랑한다고 말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대단한 이유는 없었다. 그저 사랑을 말하는 그는 언제나 기분이 좋아 보였고, 기쁨이 넘쳐 보였으며, 행복해 보였기 때문이다.
충동적으로 입술을 벌려 보았다. 그러나 막상 목소리를 내기는 쉽지 않았다.
“당신은 나를, 좋아한다는 걸 어떻게 알았어요?”
그를 따라 사랑을 말하는 대신 그에게 물었다.
“제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건.”
나는 아직 ‘사랑’이라는 단어를 입 밖에 꺼내는 것조차 어려웠지만 노마는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뭘 하든 당신 생각만 나고, 언제나 당신이 보고 싶어서 알았습니다. 하지만 저도 그게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릅니다.”
“내가 보고 싶었다고?”
“네. 지금도 보고 싶어요.”
그가 몹시 견디기 어렵다는 듯, 가련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는 얼마 전 노마가 이 호수 너머 연못에 빠졌다가 돌아온 날을 떠올렸다. 그날은 유독 온종일 그가 보고 싶었다. 결국 스토커처럼 그를 쫓아다니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나는 그날부터였을까?
하지만 그날뿐인가. 실은 그 전부터 종종 그가 보고 싶고 그랬던 것 같은데. 언제부터 시작이었는지 모르겠다는 그의 말이 무슨 소리인지 알 것만 같아 입 안이 탔다.
도대체 어느새? 이러니 대비할 방법이 없었지.
나와 그 사이엔 잠시 숨소리만 오갔다. 한참을 그렇게 있다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나도 내가 엉망진창이라는 것쯤은 압니다.”
스스로도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이 복잡스러운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그보다 먼저 뭐든지 정확히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성격이 살갑지 못하며 괴팍스럽고, 내 가문을 지킬 수 있다면 얼마든지 이기적이고 잔인해질 수 있습니다. 내가 보기에도 이 정도면 외양에 모난 구석은 없으나 기가 막히게 특출나지 않고. 흔히 좋은 신붓감에 드는 조건일랑 혈통밖에 없다는 것을, 나도 알아요.”
“…….”
“그러니까 내 말은, 성별을 차치하고 보통 나를 꺼려 하는데―.”
답지 않게 구구절절 말을 늘어놓자 복부에 철썩 들러붙어 있던 노마가 반짝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치고, 그의 얼굴엔 취한 기색이 하나 없어 나는 그대로 입을 다물어 버렸다. 정확히는 다음 말을 잊은 것에 가까웠다.
순서를 이어받은 노마가 말하기 시작했다.
“물론 저는 당신 이름 아이사와, 당신이 맥포이라는 것을 사랑합니다. 하지만 제가 당신께 정신 못 차리는 수많은 이유 중엔 크게 상대를 가리지 않는 용맹함, 그리고 자리의 무게를 견디는 단호함과 강인함이 있습니다.”
방금 내가 말한 부분을 어떻게든 장점으로 치환한 것 같았지만, 흔히들 말하는 이상적인 장점처럼 들리지는 않았다. 친절하다, 명랑하다, 사랑스럽다 따위 말이다.
“제 평생 당신보다 우렁차게 울부짖을 수 있는 사람은 절대 만나지 못할 거예요. 오죽했으면 제가 눈을 떴을까.”
“……취향이 이상하군요.”
얼핏 들으면 꼭 나를 놀리는 것 같았으나 아까부터 내게 고정된 그의 눈은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전 사실 열다섯에 죽은 적도 있습니다. 오필리아가, 순리를 거스르고 이 목숨을 붙잡고 있는 겁니다.”
그럼 이건 어떠냐, 하는 마음으로 남들 모르는 비밀스러운 과거를 하나 밝혀 봤다.
“저도 스물셋에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니콜라스가 저를 붙잡았습니다.”
그가 반갑다는 얼굴을 하고 산뜻하게 돌려줬다. 기껏해야 어설픈 위로를 예상했지 공감이 돌아올 거라곤 생각 못 했는데, 가만 곱씹어 보니 상대는 나만큼 인생에 굴곡이 많은 노마 디아시였다.
“……하지만 당신은 진짜 죽은 건 아니지 않았습니까?”
“몸이 조각나고 영혼도 반 이상 조각났으니, 죽었던 것에 가깝습니다.”
“모호한 말이군요.”
“더…… 정확히는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니었습니다. 경계에 있었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겁니다.”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게 가능합니까?”
“조각났던 것들이 다시 붙기까지는요. 제가 느끼기엔, 그랬습니다.”
기묘하고, 꺼림칙한 이야기였다. 어쩐지 오싹한 불안감이 들었다. 뒤늦게 그에게 힘든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지 않은 기억을 들추었군요. 미안합니다.”
“당신이 물으신다면 무엇이든 말해 드릴 수 있습니다.”
“……저도, 그러도록 해 볼게요.”
발음이 다소 어설펐지만, 이 정도면 훌륭하게 그의 말을 받아쳤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른 번 중 한 번 있는 일이었다. 처음엔 100번 중 한 번이었으니 장족의 발전이라 할 수 있었다.
“기쁩니다, 아이사.”
노마도 그렇게 느꼈는지 날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 약간의 놀라움 다음 기쁨이 떠올랐다. 그 표정을 보고 있자니 내심 뿌듯했다.
“…….”
그런데, 언제 이렇게 올라왔담?
허리춤에 매달려 있던 그는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 몸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덮치듯 올라타고 있었다. 순한 강아지 같다가도 온몸을 덮치듯 눌러 올 때면 위험한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양팔 사이에 나를 가둔 노마가 지긋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의 등 뒤로는 오늘도 휘영청 밝은 달이 떠 있었다. 새삼 그가 세상 온갖 빛을 끌어모으는 재주를 가졌다는 것을 상기하며, 멍하니 입을 열었다.
“나는 오래 살 거예요.”
뜬금없는 선전 포고 또는 각오였으나, 내겐 일생일대의 중요한 순간이 분명했다.
나는 긍정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운이 좋은 사람도 아니었다. 행운은 언제나 나와 거리가 멀었고, 그렇기 때문에 항상 최악을 생각해야 했다.
하지만 시모어 부인 말처럼 오늘이 좋은 날이기 때문일까. 아까부터 자신감이 마구 솟구쳤다. 막연한 확신이 들었다.
그는 그런 나를 매우 사랑스럽다는 듯이 바라보다 내 뺨에 살짝 입을 맞췄다.
“네. 저와 오래오래 살아 주세요.”
“정말 오래 살 건데. 그 긴 시간 정말 내게 착 달라붙어 있을 수 있어요? 아시다시피 나는 그리 관대하지 않고 한 입으로 두말하는 것을 싫어하니 지금, 신중하게 말해야 할 겁니다.”
“만약 다음 생이라는 것이 있다면 다음 생에도 붙어 있을 겁니다. 그러니, 저보다는 당신이 더 신중하셔야 할 겁니다.”
“아니요. 서부의 마녀가 악독하다는 건 소문이 아니라 사실입니다.”
“사람들이 그러길, 디아시는 지독하고 맹목적인 구석이 있다고 하더군요.”
그 말에 나는 순간 뒷덜미가 싸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들의 광기는 그와 처음 입을 맞추고 결혼하는 과정에서 충분히 엿볼 수 있었다.
내가 부자연스럽게 눈알을 굴리자 내 생각을 읽은 듯, 그가 푸스스 웃었다.
“하지만 이미 늦으셨어요. 저와 평생, 이다음이 있다면 모조리 함께하셔야 합니다.”
그러곤 그가 고개를 숙여 이번엔 입술을 향해 다가왔다. 어쩐지 여기서 입을 맞추면 긍정의 대답이 될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습관처럼 눈꺼풀을 내렸다. 꾸욱 누르듯이 닿은 입술은 아까보다 오래 머물렀다. 곧 입술이 벌어지고, 끈적한 입맞춤으로 이어졌다.
입 안을 파고들어 열심히 혀를 섞으면서도 그는 간간이 사랑해요, 라고 속삭였다. 말 그대로 입 안에 퍼부어 주는 사랑에 나는 푸하, 하고 웃고 말았다.
“흐, 노마. 잠시, 잠시만!”
내 웃음에 산통이 깨졌다. 불굴의 노마가 재차 입을 붙이려고 했으나 잽싸게 그를 막아섰다. 그의 눈동자에 충격이 스쳤다. 하지만 나는 지금 당장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내가 당신의 사, 랑한다는 말에.”
“…….”
“지금은 답을 못 합니다.”
“네.”
몇 번 본 적 있는 흐릿한 미소를 지은 그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오해 말아요. 내 말은, 이건 그저 단어가 어색해서 입 밖으로 안 나올 뿐이라.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까?”
내가 다급하게 덧붙이자 그는 순간 상승하는 입꼬리를 주체하지 못했다. 울 것 같은 얼굴을 했다가 웃었다가 난리도 아니었다.
“……네, 아이사.”
쑥스러움이 가득했지만 묘하게 여유로운 반응에 나는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뭐야, 역시 당신은 나도 모르는 내 마음을 전부터 알고 있었나 봐? 최근 묘하게 신나 보였던 건, 잔뜩 즐기고 있었기 때문인가?”
그가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감 없는 솔직함에 헛웃음이 나왔다.
하여간 괘씸한 인간이야. 하지만 그 순간 그가 너무 예뻐 보였다. 원래도 예쁜 인간이었지만 유별나게 말이다.
까만 밤하늘, 하얗게 빛나는 조각들과 그 중심에 있는 남자. 그 모든 장면이 눈이 부시게 아름다웠다.
나도 모르게 손을 들어 올려 느긋한 동작으로 그의 볼과 보드라운 머리칼을 쓸었다. 노마가 간지러운 듯이 속눈썹을 떨었다. 그런 그를 보며 홀린 듯이 입을 열었다.
“내 생각엔……. 곧 말해 줄 수 있을 것 같군요. 오래, 아. 기다리지 않게, 아. 할게요. 아! 말 좀 합시다!”
그러다 그가 어절마다 쪽쪽 입을 맞춰 오는 바람에 결국 약하게 성질을 내고 말았지만.
“네.”
그러건 말건 노마는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하여간 언제나 대답은 잘했다.
“……그대 눈에 내가 상당히 어색해 보일 거라는 사실을 압니다. 당신은 이제 능숙한데 난 여전히 이 모양이라 면목이 없어요. 하지만 이건 언제쯤 괜찮아질지 나도 장담을 못 하겠군.”
오늘의 나는 수다스러웠다. 멧 몇 잔과 간지러운 분위기 탓일 것이다.
“그런 걱정을 하셨나요.”
“나는……. 최근엔 당신과 눈만 마주쳐도, 조금만 닿아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
“그러니까 실은 지금도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어딜 보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이사, 저도. 저도 그렇습니다.”
완전히 붉어진 그가 다급히 외쳤다. 노마는 대단히 감격스럽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나는 그의 말에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거짓말 치시네. 그런 사람이 밤마다 그럽니까?”
그는 언제나 여유로웠고 특히 밤에는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무자비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아이사, 저는 당―.”
볼이 잔뜩 상기된 노마는 말을 다 잇지 못했다. 내가 그의 멱살을 잡아끌어다가 입을 맞췄기 때문이다. 입술이 맞붙고 나서야 나는 먼저 입을 맞춘 것이 처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촌스럽게도 갑자기 긴장이 몰려왔다. 순식간에 몸이 뻣뻣하게 굳으며 혀까지 딱딱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노마는, 어느 때보다 흥분한 사람처럼 그대로 내게 달려들었다.
그것을 시작으로 분위기가 급물살을 탔다. 나룻배가 아슬아슬하게 기우뚱거렸으나, 그가 움푹 들어간 쇄골 언저리에 내려와 난잡하게 혀를 굴리는 바람에 그쪽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혀를 굴림과 동시에 집요하게 허리를 더듬던 그의 손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나는 다급하게 그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같은 순간 투둑 실밥 터지는 소리가 고요한 호수를 울렸다.
언제부터 숨을 참고 있었는지 모르겠으나, 나는 그와 동시에 참았던 숨을 가쁘게 터뜨렸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