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
맥포이 성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성벽에 섰다. 옆에는 노마가 함께였다. 나는 익숙한 시가지를 내려다보며 묘한 감상에 빠졌다.
하루하루 사람이 늘어 가는 영지. 하나둘씩 거리를 밝히기 시작하는 상점과 주택의 등불. 떠드는 소리, 웃음소리, 악기 소리. 서부 사람들 아니랄까 축제가 시작하기 전부터 이미 잔뜩 취해 있는 것까지.
신에게 버림받은 죽음의 땅이라고 불리던 맥포이는 어디를 봐도 산 사람의 활기가 넘쳐흘렀다. 익숙한 풍경이었으나 갓난아기였던 아치를 안고 성벽에 올라섰던 날, 한 번 잃은 적이 있는 풍경이었다. 또한 정해진 운명대로라면 더는 볼 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
“카탐도 놀라웠지만 당신이 왜 맥포이를 사랑하시는지 알겠습니다.”
노마가 한참 시가지를 내려다본 끝에 잔뜩 상기된 얼굴을 하고 중얼거렸다.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그저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마침내 붉은 해가 땅에 닿고, 같은 순간 활기 넘치는 맥포이를 배경으로 한 남자가 활짝 웃는 낯으로 나를 바라봤다. 시간이 흐르는 기분이었다. 그날에 멈춰 있던 시간이 그와 함께 흐르기 시작했다.
긴 시간 숙성이 끝난 멧이 처음 세상 밖으로 나왔다. 통이 열리고 내 얼굴만 한 잔에 멧이 가득 부어졌다. 내가 잔을 높이 치켜들자 성 곳곳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우레와 같은 함성을 들으며 한입에 멧을 털어 넣으니 아까보다 더 큰 환호가 성 전체를 울렸다.
두근두근.
내가 마신 것은 고작 도수가 약한 술 한 잔일 뿐이었다. 그러나 술에 취하면 사람이 용감해지는 것처럼, 요나스 앞에서 충동적으로 뱉은 말에 완전히 자신감이 붙었다.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만 같아. 당신을 건져 낸 그날처럼, 어떻게든 될 것 같아.’
결국엔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알 수 없는 자신감이 모든 불안과 걱정을 눌렀다.
맥포이 가주가 한 번에 잔을 비운 것을 시작으로 맥포이가 하루 동안 공짜 술을 퍼붓는 짧은 축제가 시작되었다. 나는 한동안 대낮처럼 환하게 불을 밝힌 거리를 내려다보다, 불쑥 몸을 돌려 노마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와 나갑시다.”
노마는 습관처럼 내 손을 일단 잡고 봤다.
“자리를 비워도 됩니까?”
이미 걸음을 떼기 시작했을 때, 그가 한발 늦게 물었다. 참 빨리도 물어본다.
“내가 어딜 데려갈 줄 알고 덥석 손을 잡는담.”
“어디든.”
가볍게 인상을 쓰고 타박하자 그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순간 말문이 막혔다. 정말 어디든 따라올 사람 같아서 이 농담은 그만두기로 했다.
“나와 외성을 걸어 보고 싶다면서요.”
무심하게 던진 말에 노마의 눈이 땡그래졌다. 침실에서 패기 넘치게 소원을 줄줄 읊을 때는 언제고 순진하게 구는지. 그의 반응에 괜스레 얼굴이 화끈거렸다.
“맥포이의 시가지를 구경하고 싶다면 오늘처럼 복잡한 날이 최곱니다. 맥포이 사람들은 대부분 내 외양 특징을 알고 있어서 날 잘 찾아내거든.”
그의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가는 게 보였다. 그에 맞춰 내 기분 역시 끝도 없이 상승했다.
“대신, 당신은 후드를 절대 벗지 말고.”
기분이 최고조에 달한 내가 그의 손을 가볍게 잡아끌며 장난스럽게 속삭였다. 노마와 카탐까지 향하면서 내가 내내 그에게 했던 말이었다. 그가 내 노림수를 알아채고 하하, 소리 내어 웃었다.
손을 잡고 성을 빠져나가는데 그렇게 웃음이 나왔다. 어렸을 적에 몰래 성을 빠져나갔을 때 기분과 비슷했다. 어른들 모르게 일탈을 벌이는 짜릿함, 설렘 같은 것들 말이다.
거리를 메운 인파는 카탐의 축제 거리를 돌아다녔을 때와 비슷했다. 노마는 시장 구경이 처음이라고 했던 것처럼, 부어라 마셔라 하는 축제 역시 처음이라 눈을 반짝였다. 하여간 그는 온실 속의 화초가 분명했다.
그때와 다른 점이라면 애매하게 그의 망토 자락을 잡은 게 아니라 손을 잡고 있다는 것 정도일 것이다. 그걸 깨닫자 나도 모르게 마음이 들떠 맞잡은 손을 붕붕 흔들어 볼 뻔했다.
저질 체력을 가진 나 때문에 거리를 오래 돌아다니진 못했다. 우리는 곧 아무 가게에 들어가 앉았다.
내 생일이란 공짜 술을 주는 날이다 보니, 이 기간엔 외부인의 출입이 유독 많기도 했다. 덕분에 여행객처럼 기다란 망토 차림에 후드를 뒤집어쓴 우리를 신경 쓰는 이들은 딱히 없었다.
무엇보다 인파는 넘치고, 하나같이 거나하게 취해 있어 구석 자리에 관심을 두는 사람은 없었다. 혹시나 알아보더라도 맥포이 성 사람들은 공사다망한 가주님을 보통 모른 척하기도 했다.
얼마 기다리지 않아 우리가 앉은 테이블에도 공짜 멧이 올려졌다.
“한 모금도 못 마십니까?”
멧을 앞에 두고 물끄러미 구경만 하는 노마에게 물었다.
“음. 사실 제대로 마셔 본 적이 없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두 분 모두 술을 전혀 못하시기도 했고 성기사단은 음주를 장려하지 않으니까요.”
“세상에. 안 마셔 본 거예요?”
“한두 모금 정도는 몇 번 마셔 봤습니다. 하지만 맛이 썩 좋지 않더군요.”
술이 맛없다니. 저게 지금 주 품목이 술인 상단주 앞에서 할 소린가. 그의 솔직한 말에 은근히 오기가 생겼다.
“……명색이 맥포이 가주 부군인데, 그래도 멧은 한번 입에 대 봐야 하지 않을까. 이건 다른 술이랑 다르게 달고 맛있습니다.”
“전 당신을 안전히 모시고 성으로 귀가해야 할 의무가 있으니, 술은 괜찮습니다.”
노마가 다시 한번 정중히 사양했다.
“엄청 달고 도수도 굉장히 낮은데.”
하지만 나는 알지. 내가 그에게 약하듯 그는 내게 약했다. 내가 드물게 질척거리자, 역시나 그가 선뜻 술잔을 들었다.
조심스레 멧을 한 모금 마신 그가 두 눈을 빛내며 말했다.
“맛있습니다.”
“그렇죠? 왜 잘 팔리는데요.”
기대 이상의 반응에 나는 주책맞게도 어느 때보다 멧을 만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걸 좋아하는 그는 멧을 한 번 맛본 뒤엔 자기도 모르게 손이 가는지 홀짝홀짝 잘도 마셨다. 그 모습을 지켜보다 나 역시 목이 꺾어져라 술을 들이켰다.
이것을 시작으로 오랜만에 진탕 마실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맞은편에서 쿵― 소리가 났다.
“……노마. 장난치지 마세요.”
재미없게도 노마가 테이블에 이마를 박고 있었다. 쿵 소리는 아마도 그의 이마가 테이블에 부딪히며 난 소리인 듯했다.
“노마?”
멀리서 지켜보던 글렌이 이상함을 감지하고 움직이기 직전, 노마가 벌떡 일어났다. 불시에 움직이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흠칫했다. 테이블에 세게 박았는지 이마가 조금 빨갛긴 했지만 그의 얼굴은 평소와 비슷했다.
“네, 아이사.”
“지금 그거 몇 모금 마셨다고 취한 겁니까?”
내가 묻자, 노마가 휘둥그레 눈을 떴다. 그러곤 내게 가까이 와 보라는 듯이 손짓했다.
나는 술을 좋아하지만 술주정뱅이는 절대로 상대해 주지 않았다. 눈을 가느다랗게 뜬 채 가만히 있자, 결국 노마가 내게 바짝 몸을 기대 오며 귓속말을 했다.
“모르겠습니다.”
취했군.
맥없이 나들이가 끝나 버렸다. 이건 명백히 분위기에 취해 두 번 권유한 내 잘못이었다. 그가 극구 사양할 때 그만뒀어야 했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글렌을 부르기 위해 손을 들어 올리려 했다. 그러나 노마는 언제나 나보다 더 빨랐다.
“악!”
노마가 오랜만에 공주님 안기를 시전했고, 나는 반사적으로 비명을 내질렀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그대로 나를 안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등 뒤로 날 호위하고 있었을 글렌의 고함이 들리는 듯했다.
가주의 탄신일에 가주 부군이 가주를 납치한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 * *
그런 사정으로 우리는 지금 동쪽 호수 한가운데 있었다.
“이런……. 미친, 미친놈 같으니라고…….”
술기운이 싹 달아난 내가 치를 떨었다. 엄청난 힘으로 날 껴안고 나룻배에 드러누운 노마는 아까부터 움직임이 없었다.
나는 별이 총총 박힌 하늘을 바라보며 아찔함을 느꼈다. 내 평생 야밤에 나룻배를 타고 호수 한가운데에 떠 있는 건 또 처음이었다. 오늘 아침 그가 머리를 땋아 준 것부터 지금까지, 하루 동안 일어난 일이 맞나 싶었다.
“당신 오늘…… 내가 본 사람 중에 제일 미친 사람 같아.”
“미치지 않았습니다. 착각이 아니에요.”
미동도 없길래 거나하게 취해서 잠이라도 자는 줄 알았더니, 노마가 단호한 목소리로 또박또박 대답했다. 이러니 또 맨정신인 듯싶어 오히려 간담이 서늘했다.
“……그래. 방금은 내가 잘못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호수 위에 있는 거예요? 물 안 무섭습니까?”
“저는 더 이상 물이 두렵지 않습니다. 당신만 생각하니까, 다른 건 아무래도 상관이 없어요.”
……그것참 대단했으나 그는 안전 불감증이 분명했다. 이러니까 일전에 놀러 나갔다가 물에 빠졌지. 나는 작게 혀를 찼다.
거대한 호수 한복판이었지만, 누군가에게 이 해괴한 꼴을 보일 생각을 하면 아찔하기도 했다. 나는 그를 달래 성으로 돌아갈 생각으로 부드럽게 목소리를 낮췄다.
“일단 다시 돌아갑시다. 두렵지 않다 해도 밤에 물가에 있는 건 위험해요.”
“잠시만 이렇게 있으면 안 되나요.”
한동안 순한 모습만 보여 줘서 잊고 있었는데 노마가 은근히 똥고집이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순간 이러다 글렌이 찾아올 때까지 꼼짝없이 이 종이짝처럼 허술한 나룻배에 구겨져 있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들었다.
“당신에겐 비밀이지만……. 사실 저는 당신을 훔쳐다가 저만 아는 데에 숨겨 두고 단둘이만 있고 싶습니다.”
내 불안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가 재잘거리기 시작했다. 어딘가 천진난만한 음성은 농담이 아닌 것 같아, 나는 또다시 목덜미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의 표정을 살피기 위해 간신히 목을 들어 올렸다. 그러나 노마가 온몸을 꽉 붙들고 달라붙어 있는 탓에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깔끔하게 그의 얼굴을 보는 것을 포기하고 목 근육에 힘을 도로 풀었다.
“대단히 심각한 소리를 하고 있는데……. 혹시 나를 납치할 계획인가요?”
내가 묻자 노마가 작게 한숨을 쉬더니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물론 내게 철썩 붙어 있었기 때문에 내 복부에 대고 얼굴을 문대는 격이었다. 와중에 간지러워서 웃음이 터질 뻔했다.
“하지만 그러면 당신도, 맥포이 사람들도 저를 몹시 미워하겠죠. 그러니까 잠시만 이러고 있어요.”
“잘 생각했습니다. 정말 그랬다간 전쟁이에요.”
“네.”
그렇게 잠시 고요한 시간이 시작됐다. 풀벌레 소리도 들리지 않는 광활한 호수 한가운데, 그가 색색 숨을 쉬는 소리만 울리는 듯했다.
규칙적인 숨소리와 마찬가지로 그의 심장이 일정하게 뛰는 것이 느껴져 묘하게 안정감이 들기 시작했다. 그와 딱 달라붙어 있는 탓에 따뜻하기까지 했다.
뭐, 가만히 누워서 이렇게 밤하늘을 보고 있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평소 하늘 볼 일이 없기도 했으니 색다르다면 색다른 경험이라고 할 수 있겠다.
바다처럼 넓은 호수 위에서 허술한 나룻배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만 빼면, 너무나 평화로웠다. 이대로 잠들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 돌발 상황에 편안함을 느끼다니. 내가 가장 미쳤군.’
지금쯤 글렌이 뒷목을 잡고 고꾸라지고 성안이 뒤집혔을 텐데. 태평하게 밤하늘이나 감상하고 있는 게 스스로도 어이가 없어 잇새로 피식피식 웃음이 새기 시작했다.
“당신은, 내가 당신에게 무른 것을 아주 다행으로 여겨야 해요.”
“네.”
내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잔뜩 취한 와중에 그가 즉답을 했다. 그게 또 웃겨 흐흐, 웃음이 흘러나왔다.
“주정뱅이는 정말이지 질색인데.”
“이제 저도 어쩔 수가 없어요. 해리 폴른이 뭘 해도 귀여워 보이니, 더 이상 도리가 없습니다.”
그때, 며칠 전 에리카가 난감한 얼굴로 했던 말이 불현듯 머릿속을 스쳤다.
“사랑해요.”
“…….”
타이밍 좋게 노마가 속삭였다. 바보처럼 간헐적인 웃음을 뿜던 나는 더 이상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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