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
나는 들뜬 마음을 진정하기 위해 연신 차를 들이켰다. 낮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은 요나스는 그런 나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신나 보이는군, 맥포이 가주.”
요나스가 약하게 비아냥댔다.
“의도치 않았지만 무례를 저질렀군. 사과하겠소.”
“……자네는 아이노보다 더하는군.”
“뭐요?”
순순히 요나스의 기분을 맞춰 주다 본능적으로 정색을 하고 말았다.
나는 아이노와 닮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했다. 물론 나도 눈이 있으니 얼굴이 닮았다는 것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으나, 성격만큼은 아이노보다 훨씬 낫다고 자부했기 때문이다.
“그저 혼잣말이오. 그보다―.”
요나스가 능숙하게 내 성질머리를 차단했다. 조금 분했지만 시간이 별로 없으니 일단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빠르게 화제를 전환한 것치고 그는 쉽사리 입을 열지 않았다.
“할 말이 무엇인데 그러시오?”
“사실, 걱정이 많았소. 뜬금없이 디아시와 결혼을 한다길래.”
“……필요한 결혼이었소. 모퍽이 그런 찌질이인 줄은 몰랐거든.”
차를 한 모금 마신 요나스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난, 지난 건국제 일 이후 연달아 벌어진 사건들 때문에……. 자네가 더 이상 못 버티겠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다고 생각했소.”
“날 뭘로 보고.”
허세 반, 패기 반이 담긴 대답에 요나스가 작게 웃었다.
“그래서 아치 걱정이 많았소. 자네는 아치의 보호자니까.”
“결국 내 걱정이 아니라 아치 걱정이었군.”
“그렇게 되는가? 하지만 록시가 자네를 아꼈으니 나도 자네를 아끼는 것이 사실이오.”
“낯간지러운 말은 그만하시오.”
“전보다 좋아 보이네, 맥포이 가주. 걱정이 무색할 정도로.”
“이런 이야기만 하시려고 불렀소? 본론이나 말하시게. 성벽 올라가야 한대도.”
나는 좋아 보인다는 말에 부정하지 않았다. 그건 아마 사실일 테니까. 괜히 민망스러워 앞에 놓인 찻잔을 들었다.
내 재촉에 요나스가 이번엔 난감한 얼굴로 웃었다. 곤란할 때 나오는 표정으로, 역시나 본론은 따로 있는 듯했다.
“방금 동대륙에서 온 서신을 받았네.”
그렇게 말하는 그의 표정이 어두웠다. 잠시 안 보인다 했더니 그새 정보원을 만난 모양이었다. 나는 의식적으로 여유를 꾸며 내기 위해 입매를 늘어뜨렸다.
“못 찾았나 보군.”
“면목 없소. 동대륙까지 다 뒤졌지만 자네가 찾는 사람은……. 없는 듯해.”
“…….”
“지금 이 땅에서 가장 강력한 성력을 가진 사람은 대신관 헤이롯이 아니겠소. 그보다 나은 자를 찾는 건 처음부터 말이 안 되는 이야기였네. 그런 성력을 가진 자가 있었다면 진작 발견되어 대신관이 되었겠지.”
이 땅에서 가장 강력한 성력을 가진 사람은 대신관인 것이 진리였다. 대신관 헤이롯은 검기를 다루지 못해서 그렇지 순수한 성력만 따지면 디아시 형제보다 한 수 위였다.
그런 헤이롯도 오필리아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다. 맥포이에 ‘그런 일’이 없었다면 아마 오필리아는 성년식을 치른 후에 대신관 혹은, 그에 상응하는 역할을 짊어져야 했을 것이다. 가령, ‘성녀’라든가.
어쨌건 오필리아만큼은 아니더라도 그 비슷한 사람을 찾는 건 역시 무리인 듯했다. 애초에 이 세계가 그렇게 만들어진 곳일 테니.
“좋은 소식을 가져오지 못해 미안하오.”
요나스의 사과가 이어졌다.
“괜찮네. 큰 기대 없었으니. 노턴 가주, 그대 말처럼 그런 자가 존재했다면 이미 대륙이 떠들썩했겠지. 어린 오필리아가 그랬던 것처럼.”
잠시간 침묵이 흐르고 나는 아무 말 없이 차를 들이켰다. 애초에 불가능한 의뢰였음에도 요나스는 죄책감을 느끼는 듯했다. 그가 재차 어렵게 입을 열었다.
“……닉스의 봉인은. 문제없겠소?”
“아직까지는. 하지만 언제 풀려도 이상하지 않지. 언제까지 대신관과 디아시 가주가 성력을 퍼부을 수도 없고 말이오.”
요나스가 양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 마른세수를 했다.
“하……. 난감하군.”
말 그대로 그가 정말 난감해 보여, 나는 작게 실소했다. 남들 눈에도 답이 없어 보인다는 사실에 맥이 풀린 것도 있었다.
“맥포이 가주. 내가 더 도울 일이 있다면 편히 말하시게.”
“말만 들어도 고맙군.”
심드렁한 대답에 요나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 내가 크게 낙담한 나머지 허세를 떤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리고 그의 추측은 어느 정도 맞았다.
“……길이 막힌 때에 계속 좋지 못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 같아 미안하지만, 북부까지 새로운 소문이 돌고 있네. 아시오?”
요나스는 조카 때문인지 맥포이 안위에 무척 관심이 많았다. 그가 맥포이에 퍼붓는 것은 무조건적인 호의라, 나 역시 경계하지 않고 속사정을 의논하는 유일무이한 외지인이라고 할 수 있었다.
“내가 모르는 게 있겠는가? ‘황태자와 맥포이가 사이가 좋지 않다.’ 이것 때문에 그러는 것 아니오.”
“어찌할 생각이오. 뒷배 없는 황태자에게 백번 불리한 소문이라지만, 그는 하나밖에 없는 황제의 후계자요. 제아무리 맥포이라고 해도 좋을 것 없을 듯한데.”
북부는 산지가 많아 지형상 소문이 가장 느리게 퍼지는 편이었다. 북부까지 소문이 퍼졌다면 이미 중앙에선 어린애도 알 것이다.
“황태자가 겁도 없이 가만히 있는 롬닥을 들쑤신 것은 맞지.”
빌리넌트가 겁 없이 온 정보상을 들쑤셔 맥포이 가주의 오른팔이라고 할 수 있는 가노를 건드렸으니, 좋지 않은 소문이 나는 것이야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순진하신 황태자께선 ‘정보상’을 이용했으니 소문이 날 거라곤 생각도 못 하셨겠지. 황태자가 내 뒤를 캐고 맥포이와 척질 준비를 한다는 것이 하나의 정보가 될 줄도 모르고. 그는 이게 민감한 문제인지도 모를 것이오.”
“……가주, 설마.”
내 말을 듣고 있던 노턴이 약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과격한 걸 싫어하는 평화주의자였기에, 그동안 내가 하는 일에 일일이 기절할 것처럼 굴곤 했다.
“최대한 소문을 부풀릴 것이오. 자극적이게.”
“오, 맥포이 가주. 부디 조용히 소문을 덮을 생각만 하시오. 황태자와 완전히 척질 작정인가?”
“그 멍청이는 바그다트에 가기 전에 이 일로 한번 혼나 봐야 해. 정신이 번쩍 들게 말이야. 그 벌로 행동반경에 제한이 생기고, 호위 명목의 감시는 두 배로 늘어나겠지. ”
“그분의 성년식 때문에 그러는 것이오?”
“어느 정도는. 아무리 나라도 단시간에 사리 분별할 능력까진 못 키워 주니, 이렇게라도 할 수밖에.”
요나스가 조금 떨떠름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럼.”
이 걱정 많은 양반이 또 무슨 소리를 하려는지. 철저하게 듣는 귀를 막았음에도, 그가 한층 목소리를 낮추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역시 이것도 자네가 한 일인가?”
“무엇 말이오?”
모르는 소식이 없다는 건 허풍이 아니었다. 나는 한껏 여유를 부리며 되물었다.
“땅굴을 파고 숨어든 광신도 무리를 대량으로 살해한 흔적이 세리야 산맥을 따라 북서쪽으로 이어지는 것을 발견했소. 해서 일단 덮어놨는데.”
이런. 내가 모르는 소식이 있는 모양이다. 그러나 누구 짓인지 뻔했다.
“이대로 조용히 덮으면 되겠소?”
요나스는 맥포이가 한 일이라고 확신하고 있는 듯했다. 광신도 처리는 맥포이가 가장 열을 내는 문제긴 했으니 어쩌면 당연했다. 나는 최대한 당황한 티를 내지 않으며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아니. 그건 내가 한 것이 아니오.”
“무슨―.”
“가주님.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때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리며 요나스의 말이 잘렸다. 창밖을 바라보니 해가 성큼 내려와 있었다.
“이만 일어나지.”
나는 반사적으로 일어나자고 말했지만, 막상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일단 자리에서 일어난 요나스가 그런 나를 의아한 얼굴로 쳐다봤다.
“맥포이 가주?”
“……생각해 보니, 내가 한 게 맞겠군. 내가 내몰았거든.”
“그게 무슨 소리요.”
“일단 은밀히 덮어 주시오. 그리고 내 보좌관에게 정확한 위치들을 알려 주겠나? 이후엔 맥포이에서 흔적을 쫓겠소.”
분위기가 급격히 가라앉는 것을 느낀 요나스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제야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맥포이 가주. 너무 무리하지는 마시게.”
요나스의 말에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오늘 들려온 소식은 하나같이 암담했다. 무엇 하나 나아진 것이 없고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문제는 늘었다. 해결하지 못한 것은 산더미인데 나는 아직 해결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
‘그런데도, 이상하지.’
나는 여전히 기분이 좋았다. 반쯤 열린 발코니 창으로 더운 바람을 타고 영지민의 함성 소리가 들려왔다. 나를 부르는 소리였다.
내 시선이 무의식적으로 창밖을 향했다. 작열하는 태양이 성벽에 걸려 있었고 그 주변이 벌써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 광경과 아무 상관이 없었지만 수줍게 웃는 노마의 얼굴이 불쑥 떠올랐다. 나는 이제 시도 때도 없이 그를 생각했다.
문제는 쌓여 가고 앞은 보이지 않는데. 타인의 입으로 들으니 더더욱 답이 없는 것만 같은데.
‘어째서 뭐든 될 것만 같은 자신감이 생기는지 모르겠어.’
불가항력으로 입꼬리가 올라가는 게 느껴졌다. 나는 천천히 몸을 돌려 요나스를 똑바로 바라봤다. 요나스의 눈이 놀라운 것을 본 사람처럼 커졌다.
“아니. 나는 최선을 다할 것이오. 최선을 다해 살아남을 것이오.”
그렇게 말하는 내 목소리는 놀랍도록 차분했으며 웃음기가 어려 여유롭게 들렸다.
“아까 보지 않았소. 내가 이제, 나만 바라보고 있는 애가 둘이오. 딸린 식구가 늘어서 이대로 죽으면 1년 전보다 더 곤란해.”
아까 헤어질 때 본 노마의 표정이 떠올라 결국 재차 너털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런 나를 바라보는 요나스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 해괴했다.
“그러니 요나스. 나는 살아남을 방법을 찾을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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