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의 데드 엔딩 후에-109화 (109/139)

109.

노마는 명백히 자신을 견제하고 있었다. 요나스는 크게 당황했다.

‘도대체 왜? 내가 과거에 그에게 실수를 한 적이 있던가?’

하지만 그는 영지 자체를 잘 안 벗어나는 사람이었다. 대회의가 있을 때 중앙에 나가는 것 외엔 대부분 영지에 틀어박혀 있었다. 디아시엔 가 본 적도 없었다.

물론 이름난 성기사 ‘노마 디아시’는 죽은 황태녀의 약혼자였으며 십수 년 전 온 제국을 떠들썩하게 한 사건의 중심인물이었기 때문에, 요나스는 그를 모른다고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요나스가 기억하기로 노마와 만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러니 도대체 무엇 때문에 노마가 서늘한 눈빛으로 자신을 한 번씩 쳐다보는지, 그로서는 전혀 짐작하기 어려웠다.

“오늘따라…….”

요나스가 어색하게 눈을 피하자, 아이사가 그런 그를 빤히 쳐다보더니 말했다.

“해괴하게 구는군. 편히 즐기다 가시오.”

짧은 정적 후 그녀가 요나스에게 쌀쌀맞지만 따스한 한마디를 건넸다. 그러곤 그의 안위 따위엔 딱히 관심 없다는 듯 아치에게 가볍게 시선을 돌렸다.

“아치. 얌전히 있었겠지? 내 손 잡아라. 얼굴을 비춰야 할 손님이 있으니.”

아이사의 말에 아치가 화색을 띄었다. 아이는 제 고모의 손이 동아줄이라도 되는 양 냉큼 붙잡았다.

그대로 세 명의 맥포이가 요나스를 지나쳐 갔다. 요나스는 그제야 자신을 스쳐 지나가는 노마를 바로 볼 수 있었다. 그는 남들보다 머리통 하나가 컸다. 덕분에 아치에게 말을 건네고 있는 그의 옆얼굴이 쉽게 눈에 들어왔다.

“내가……, 내가 또 잘못 본 것인가.”

요나스는 귀신을 본 사람처럼 멍하니 입을 벌렸다. 노마의 싸늘한 시선은 모두 요나스의 꿈이었다는 것처럼, 그의 눈빛엔 다정함만 가득했다. 그는 귀신에 홀린 기분을 느꼈다.

한편 한 발자국 떨어져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에리카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맥포이 가주의 수석 보좌관은 가주의 결혼을 기점으로 조금 더 극한 직업이 된 듯했다.

아이사의 뒤를 따르기 위해 걸음을 옮기던 에리카가 요나스를 그대로 지나치려다 우뚝 멈춰 섰다.

“노턴 가주님께선 아무런 죄가 없으시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분은 원래 저러십니다.”

“그게 무슨 소린가?”

넋을 놓고 있던 요나스가 에리카의 말에 화들짝 놀라 되물었다. 에리카는 입 밖에 꺼내기 민망한 듯, 주변을 재빠르게 둘러본 끝에 목소리를 잔뜩 낮추었다.

“……맥포이는 반짝이고 아름다운 것에 맥을 못 추지 않습니까. 저희 안주인 마님께선 그저 노턴 가주님의 외양을 경계하시는 것뿐이니 이해해 주십시오.”

“내 외양이라니, 그 무슨 무례한 소리를…….”

외양에 대한 언급을 면전에 대고 하는 것은 결코 귀족적이지 않았다. 요나스가 아무리 평화적인 인물이라고 한들, 그 역시 어쩔 수 없는 대귀족 꼰대였기 때문에 반사적으로 얼굴을 구겼다.

그러나 요나스는 역정을 내다 말고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에리카가 무슨 뜻으로 저 말을 꺼냈는지 이해했기 때문이다.

노턴은 맥포이의 사돈이었다. 아이노 맥포이를 겪어 봤기에, 그는 맥포이의 유구한 취향을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산 사람이었다.

서른 중반의 나이인 요나스 노턴은 적금발에 연갈색 눈동자를 가진 미남자였다. 무엇보다 이미 그의 쌍둥이 여동생은 아이노를 함락하고 맥포이를 정신 못 차리게 한 전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요나스는 에리카의 발언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나는 맥포이와 사돈이고 가정도 있는 몸인데.”

“저희 안주인 마님께선 편견이 없는 분이시라 성별을 따지지 않고 경계하십니다.”

요나스가 결국 왈칵 인상을 찌푸렸다. 그가 알기로 맥포이가 아름다운 것에 약하긴 하나 그 눈은 천상에 달려 있었다. 분명 그 취향을 만족할 수 있는 사람은 대륙을 통틀어 손에 꼽을 터였다. 아름다움에 약한 것이 그들의 치명적인 약점이 될 수 없었던 이유였다.

그러니 요나스의 생각에, 아무리 새신랑이라고 해도 저렇게 두 눈을 시퍼렇게 뜨는 것은 과했다.

“너무, 너무 유난스럽지 않은가? 굳이 저러지 않아도 맥포이 가주는…….”

요나스가 치를 떨며 간신히 표현을 순화했다. 그는 대귀족 중에서도 순하고 고상한 사람 축에 속하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멀어져 가는 맥포이들을 보고 있자니,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절로 ‘지랄 났다’는 속된 표현이 치고 올라왔다.

그런 그에게 에리카가 그저 송구하다는 듯이 깊이 고개를 숙였고, 요나스는 더 이상 저 사이에 끼고 싶지 않다는 듯이 넌더리를 내며 등을 돌렸다.

에리카는 요나스가 웬만큼 멀어지고 나서야 고개를 들었다. 그러곤 무엄한 것을 알면서도 주군의 뒤통수를 흘겨봤다.

그녀는 두 분이 아침부터 과하게 사랑이 넘쳐 탄신 연회에 두 시간이나 지각한 일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난감했다.

‘가주 부군께서 산뜻한 외모과 반대로 투기와 집착이 심한 분이실 것은 짐작했던 바다. 그런데 가주님은……. 옆에서 부군이 저러고 있는 것을 뻔히 알고 계시면서 왜 내버려 두시지?’

노마의 기행은 별로 놀랍지 않았다. 그런데 웬일로 아이사가 그 장단에 어울려 주고 있으니, 수습하는 입장에서 기가 차지 않을 수 없었다.

부부가 쌍으로 연회 손님들을 괴롭히고 다니니 맥포이 가주의 수석 보좌관은 매우 고된 직업이 확실했다.

* * *

욕망에 져 손님들을 두 시간이나 방치했다는 사실에 자괴감을 느낀 것은 오래가지 않았다. 나는 손님들 앞에서 웃음을 터뜨리지 않기 위해 얼굴 근육을 꽉 잡고 있어야 했다. 이게 다 노마 때문이다.

내 생일이라고 이러는 걸까? 그는 오늘 하루 종일 골 때리는 짓을 했다. 그가 또 무슨 짓을 했냐 하면.

노마는 여전히 사람을 끌어모으는 재주가 있었다. 그와 함께 연회장에 들어서자마자 혼자였을 때보다 많은 사람이 먼저 다가오는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벌 떼처럼 몰려든 손님들은 나와 한두 마디 나누기 무섭게 하나같이 창백하게 질려 도망치더니, 급기야 아무도 먼저 다가오지 않았다.

처음엔 ‘왜지?’ 싶었으나, 곧 눈치채고 싶지 않아도 알아차릴 수밖에 없었다.

고개를 들어 나와 팔짱을 끼고 있는 남자를 올려다봤다. 올려다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새삼스럽게도 키 차이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내 시선을 눈치챈 노마가 빵긋 웃으며 눈을 맞춰 왔다. 천진난만해 보이는 그의 눈동자는 마치 ‘왜 그러십니까?’ 하고 묻는 듯했다.

“푸…….”

뻔뻔한 것을 넘어 패기가 넘쳐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오고 말았다.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노마는 누군가 나와 친밀하게 인사를 나누면 대놓고 그 사람을 노려봤다. 살기등등한 시선은 검기가 없어도 느껴질 정도로 노골적이었다. 묘하게 색소가 옅은 미인들과 인사를 나눌 때마다 그러는 것만 같았으나, 단순히 기분 탓이겠거니 했다.

노마는 딱히 손님을 경계하는 것을 내게 숨길 생각이 없어 보였다. 마치 나보고 알아 달라는 듯 상대를 가리지 않고 당당하게 노려봤다.

기가 차는 동시에 깜찍스러워 보이는 건 또 무슨 일인가 싶었다. 신화 속에 등장해야 할 것 같은 성스러운 얼굴을 하고선 유치한 낭만극의 등장인물이 할 짓만 골라 하니 웃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최근 내내 여유롭던 그가 유난스러운 행동을 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묘하게 신이 났다. 이상하리만큼 기분이 들떴다. 두근두근 심장이 속도를 높이고 슬그머니 장난기가 올랐다.

그래서 나는 노마를 말리는 대신 한술 더 뜨기로 했다.

평소 ‘맥포이 가주’는 연회에서 손님들의 인사를 잘 받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아무 손이나 덥석 잡아 흔들고, 아무에게나 불쑥 손등을 내밀어 입맞춤을 허용했다. 단순히 내 옆에 선 부군의 반응을 기대하고 한 일이었다.

그때마다 노마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놀라운 반응을 보였다. 묘하게 여유를 잃어 가는 그를 보는 게 그저 즐겁고 신기했다.

귀찮게 하는 손님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가는 것도 재밌는 볼거리였다. 호전적인 성격과 거리가 먼 요나스가 특히 당황한 듯했으나, 노마의 반응을 즐기느라 그의 당혹감을 외면했다.

나는 연회를 싫어했고, 내 탄신 연회라 해서 예외는 없었다. 탄신 연회란 그저 나와 맥포이가 건재하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한 판일 뿐이었다.

‘분명 연회는 더럽게 재미없는 것인데. 익숙하다 못해 질려 버린 이 연회장을 쏘다니는 일이 왜 이리 즐거운지.’

노마와 팔짱을 끼고 손님들에게 인사를 받았을 뿐인데 지금까지 참석한 모든 연회 중, 가장 즐거웠다. 흥흥, 어느 순간부터 나는 속으로 콧노래까지 부르고 있었다. 근엄하게 꾸민 표정도 아마 수차례 무너졌을 것이다.

맥포이 가주의 위엄은 중요했지만 지금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내 행동 하나에 아름다운 남자의 기색이 시시각각 변하는 것에 정신이 팔려 있을 따름이었다.

그러다 보니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갔다. 정신을 차렸을 땐 어느덧 해가 지기 직전이었다. 지루한 연회가 이렇게 빨리 끝을 보이다니 정말이지 놀라운 일이었다. 역시 그는 여러모로 대단한 남자였다.

나는 헛웃음을 삼키며 슬슬 연회장을 빠져나갈 준비를 했다. 해 지는 시간에 맞춰 성벽에 올라야 했기 때문이다. 일몰에 맞춰 영지민 앞에서 작년에 담근 멧 통을 여는 것은 맥포이 가주 탄신 연회의 백미라고 할 수 있었다.

“맥포이 가주.”

그때 한참 안 보이던 요나스가 인파를 헤치고 내게 다가왔다. 동시에 노마의 기색이 서늘해지는 게 느껴져, 방심하고 있던 차에 다시 한번 표정 관리에 힘써야 했다.

요나스는 은근히 소심한 구석이 있었다. 노마의 시선 때문에 잔뜩 기가 죽어 있을 줄 알았는데 그는 의외로 담담해 보였다. 어쩐지 포기한 듯한 눈을 하고 있긴 했지만 말이다.

“노턴 가주.”

“급히 할 말이 있소.”

“꼭 지금 해야 하는가?”

“내일 일찍 노턴으로 돌아가야 해서 지금밖에 시간이 없을 듯하네. 무엇보다 자네에게 직접 물을 것이 있기도 하고.”

“일몰까지 시간이 빠듯한데.”

“길게 시간을 뺏지 않겠소.”

요나스는 그러면서 힐끔, 내 옆에 서 있는 노마를 한 번 쳐다봤다. 당사자를 두고 도대체 누구한테 허락을 구하는 것인지 우스웠다.

이게 또 재밌어서 괜히 몇 마디 더 해 보려다, 그랬다간 요나스가 다시는 맥포이에 오지 않을 것 같아서 그만뒀다. 물론 일몰까지 시간이 별로 없기도 했다.

“좋소, 휴게실로 가지.”

나는 요나스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까딱이곤 노마를 돌아봤다. 그러자 노마가 이글거리는 눈빛을 빠르게 감추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화사하게 웃으며 눈을 맞췄다. 보면 볼수록 웃겨 한 박자 쉬고 입을 열었다.

“……아치를 이만 방으로 돌려보내야겠습니다. 당신이 직접 방에 데려다주면 좋겠군요.”

“……네, 가주님.”

미련이 뚝뚝 흐르는 대답에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그의 면전에 성대하게 침을 튀겼을 것이다.

노마는 대답과 다르게 미적거리며 팔짱을 빼지 않았다. 대신 간절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 눈빛은 꼭 ‘함께 휴게실로 가자’라고 말해 달라는 듯했다.

그러나 나는 못 알아들은 척 냉큼 팔짱을 빼 버렸다. 그 순간 그의 금안이 잘게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심장이 절로 조여 오는 장면이었으나 짜릿함이 조금 더 커, 나는 도발을 멈추지 못했다.

노마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요나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즉, 지금부터 날 에스코트하는 사람은 노마가 아니라 요나스였다.

요나스는 ‘나한테 도대체 왜 이러냐’라고 말하는 얼굴을 했지만, 내 알 바 아니었다. 요나스의 원망 어린 표정을 무시한 채 억지로 그의 팔짱을 꼈다.

“성벽에서 봅시다.”

나는 그대로 몸을 돌려 요나스와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물론 요나스에게 에스코트를 받는 것이 아니라 그가 내게 끌려가는 모양새에 가까웠다.

“……푸하하!”

등 뒤에 닿는 뜨거운 시선에 나는 결국 웃음을 참지 못했다. 주변 사람들이 얼어붙거나 말거나, 맥포이 가주의 위엄 따위는 더 이상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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